시간의 한 부분을 떼어 내 보여주는 영화는 시간의 기록인 역사 속에서 소재를 찾곤 합니다. [그 영화의 전후사정] 에서는 영화의 소재가 되는 주요 사건의 원인과 그 후의 이야기를 통해 역사를 전후 맥락으로 이해하고 역사를 균형 잡힌 시선으로 바라보게 도와줍니다.
‘비틀즈’가 연기하는 ‘비틀즈’
# 프롤로그. 비틀즈도 아이돌이었다
데뷔와 동시에 슈퍼스타가 된 비틀즈. 가는 곳마다 진을 치고 있는 팬들을 간신히 따돌리고, 다음 일정을 위해 기차에 오릅니다. 대사는 없습니다. 대신 뛰고 또 뛰는 비틀즈와, 노래 「A HARD DAY’S NIGHT」가 영화의 첫 장면을 터질 듯 채우죠. 빈틈없는 스케줄과 극성팬, 엄격한 매니저들... 비틀즈는 뮤지션이기에 앞서, 영락없는 아이돌이었습니다.
# 줄거리. 링고스타가 사라졌다고?
영화는 한 생방송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비틀즈의 하루를 보여줍니다. 호텔에 짐을 풀고, 분장을 받고, 인터뷰에 나가고, 연출자와 미팅 후 리허설을 하죠. 음악을 할 때만큼은 진지하지만 ... 좌충우돌! 아름다운 여성과의 연애를 꿈꾸고, 기성세대에게 조롱을 퍼붓는 것이 일상입니다. 이들은 태생적으로 자유롭죠. 하지만, 막상 탈출을 시도하지는 않습니다.
“분칠하는 너희들은 모르겠지만, 난 지금 너무 답답해!”
그런데 비틀즈와 동행하게 된, 그들보다 더 자유로운 폴의 할아버지 조지가 오히려 틈만 나면 크고 작은 사고를 칩니다. 게다가 결국 조지의 꼬임에 넘어간 링고 스타가 사라져 버렸네요!
“45분 뒤에 생방송인데 가수가 없다고요?”
# 에필로그. 그리고, 그들은 전설이 되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다시 비틀즈의 노래 [A HARD DAY’S NIGHT]입니다. 이번에는 기차가 아니라 헬기를 타고 다음 공연장으로 이동하는 비틀즈와 조지. 그들이 떠난 자리에는 조지가 팬들에게 팔기 위해 준비했던 싸인 포스터가 흩날리죠. 모두가 알다시피! 이제 그들은 아이돌을 뛰어 넘어 전설이 될 겁니다.
‘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앨범을 판매한 그룹 ’
‘ 빌보드 핫 100 (싱글 차트) 최다 1위 보유 : 총 21곡 ’
‘ 빌보드 최장기간 1위: 총 113 주 ’
前後事情
소설과 서커스와 뮤지컬로, 지금 우리 곁의 비틀즈
비틀즈는 사라졌고, 4명의 멤버들은 각자의 운명에 따라 다른 길을 걸었습니다. 존 레논은 1980년 12월 8일, 그의 팬이었던 마크 데이비드 채프먼이 쏜 총에 맞아 숨졌고, 조지 해리슨은 2001년 11월 29일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죠. 하지만 그들은 지금까지도 우리들이 살아가는 세상에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Norwegian Wood’를 소재로 한 소설 「상실의 시대: 노르웨이의 숲」을 썼고, 기 랄리베르테는 서커스 쇼 ‘태양의 서커스-러브’를 기획하는데 비틀즈에게 영감을 받았다고 고백했습니다. 네드 벤슨 감독의 영화 「‘엘리노어 릭비: 그 남자 그 여자’」도 비틀즈의 ‘Eleanor Rigby’에서 만들어진 작품입니다.
한동안 비틀즈의 음원은 쉽게 찾아 들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죠. 그러다 해외에서는 지난해 12월 24일부터 스트리밍 서비스와 다운로드 서비스를 받을 수 있게 되었고, 한국에서도 드디어 지난 2월부터 서비스가 시작됐는데요. 13장의 정규음반을 비롯해 총 17장의 음반에 담긴 음원(무려 307곡!)을 들을 수 있게 됐습니다. 또 다시 비틀즈 붐이 일면서 뮤지컬 '렛잇비'가 영국 오리지널 첫 내한공연으로 찾아왔고, 경기도 양주에 비틀즈 상설 전시 공간인 '비틀즈 투마로우 아트 스페이스'가 만들어졌다는 소식도 들리는데요.
영화 「비틀즈 - 하드 데이즈 나이트」의 국내 개봉도 대중들의 비틀즈에 대한 사랑이 여전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존 레논, 폴 메카트니, 조지 해리슨, 링고 스타... ‘우리들의 비틀즈’는 아마도 영원히, 그러나 늘 새롭게 변주될 겁니다.
영화가 시작되면 지난 역사도 함께 시작된다
비틀즈에게도 흑역사가…
그들의 첫 오디션 점수는?
비틀즈의 첫 오디션은 1962년 1월 1일, 런던에 위치한 데카 레코드 본사에서 치뤄졌습니다.
물론 비틀즈의 매니저였던 브라이언 엡스타인의 영향력으로 겨우 얻게 된 오디션 기회였는데요, 그만큼 귀중한 기회였기에 비틀즈 멤버들의 멘탈도 상당히 흔들렸나 봅니다. 긴 여독에 시달리기도 했고 영국에서는 당시 상당히 큰 오디션 중에 하나였기에 제정신이 아니었겠죠.
오디션에서 불렀던 노래 15곡을 모두 똑같은 박자로 쳤던 드러머(그 때는 링고스타가 아니었습니다, 피트 베스트라는 드러머였죠)가 있는가 하면 시대를 풍미했던 비틀즈의 메인 싱어, 존 레논은 자신의 소절이 기억나지 않아 폴 메카트니에게 넘기기도 했습니다.
노래를 잘 하지 않는 기타리스트, 조지 해리슨 역시 긴장의 늪에 빠진 메카트니가 넘긴 몇 소절을 부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오기도 했습니다.
이쯤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천부적인 재능은 숨기지 못하여 결국 계약에 성공했다는 말이 나와야 할 것 같지만 악몽 같았던 오디션이 끝난 지 3주가 지나자, 데카 레코드사의 음악감독 딕 로우는 “미래가 없다”는 말로 단칼에 계약을 거절합니다. 딕 로우의 입장에서는 아마 죽을 때까지 후회할 실수가 아니었을까요?
아, 위에서 언급했던 문제의 드러머 피트 베스트는, 비틀즈가 EMI 레코드사와 계약이 성사되자, EMI의 프로듀서 조지 마틴의 요청으로 추방됐답니다. 그리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링고 스타가 비틀즈에 합류하게 됩니다.
화려했던 비틀즈, 불운의 매니저
1961년 말 당시 비틀즈는 영국 리버풀의 작은 무대에서 연주하던 그룹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음반잡지, “Mersey Beat”에 기고를 하고 있던 리버풀의 대형 음반사, NEMS(North End Music Stored) 의 사장인 브라이언 엡스타인은 비틀즈의 남다른 음악성과 재능에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잡지가 비틀즈를 상당히 비중 있게 다루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당시 리버풀에서 가장 잘 나가는 음반사의 사장을 하고 있던 엡스타인이 그 동
이렇게 엡스타인은 큰 기대를 안고 비틀즈를 만나기 위해 같은 동네에 위치한 “캐번”이라는 클럽을 찾아갑니다.
그곳에서 엡스타인은 만나게 됩니다. 20세기 최고 밴드로 성장하게 될 비틀즈의 모습을요. 마침 매니저가 없었던 비틀즈에게 리버풀 최대의 음반사 사장이었던 엡스타인과의 매니지먼트 계약은 거절할 이유가 없는 제안이었습니다. 브라이언 엡스타인은 원래 배우가 꿈인 청년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다 제 갈 길이 있는 것이었을까요. 영국의 왕립 극예술 학교에 진학했지만 연기에 만족하지 못하고 집안이 운영하는 가게에서 일을 하며 음반사를 내게 됩니다. 그의 사업적 수완이 워낙 뛰어났기에 음반사 NEMS는 순식간에 리버풀에서 가장 큰 음반 매장으로 거듭나게 되죠. 그리고 비틀즈를 키워낸 후 이 음반사는 NEMS 엔터 프라이시스라는 매니지먼트 회사로 성장하며, 훗날 세계 최고의 기타리스트 지미 핸드릭스와 그룹 비지스 등이 계약하기도 합니다.
비틀즈의 뒤에는 언제나 그들의 매니저 엡스타인이 있었습니다. 세계적인 스타를 만들어 낸 그이기에 상당한 부를 축적하고, 행복한 여생을 보냈을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군요. 물론 그 만남은 위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드라마틱했을 지는 모르지만 끝은 너무도 가혹했습니다. 비틀즈의 인기가 이미 치솟을대로 치솟은 가운데, 폴 메카트니가 점점 매니지먼트 쪽 사업에 관심을 가지게 되자 엡스타인은 그들이 더 이상 자신과 계약을 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여 다량의 수면제와 정신안정제를 복용하게 됩니다.
결국 1967년 8월, 약물 과다복용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고, 서로 간의 불화가 있었던 비틀즈는 엡스타인이 죽자 해체에 이르게 됩니다.
케네디 암살로 암울했던 미국도 심쿵
리버풀 출신 노동계급의 그들은 가난하고 촌스러웠죠. 돈이 필요했고 음악을 하고 싶었기에 ‘죽도록 열심히 공연하는 아이돌’이 되었는데요. 대부분 곡들의 작곡·작사를 맡았던 존과 폴의 천재적 재능으로, 수많은 히트곡들을 쏟아내며 위대한 뮤지션으로 성장했습니다. 1962년부터 1970년까지 비틀즈의 활동기간은 단 8년! 하지만 이 짧은 시간동안 그들은 한 시대의 상징이 되었죠. 1964년 비틀즈가 미국에 진출한 해는 케네디 대통령의 사망으로 온 나라가 실의에 빠져 있던 때인데, 그들의 음악에 열광하면서 활기를 되찾았다고 할 정도입니다. 첫 발표곡 ‘I want to hold your hands’는 전미 차트 7주간 정상을 차지했죠.
응답하라 1960년대 음악과 트렌드
그런데 사실 비틀즈는 음악으로만 기억되는 것이 아닙니다. ‘비틀즈 모즈’, 즉 그들의 패션과 헤어스타일도 당시 트렌드를 주도했거든요. 비틀즈 덕분에 미국 팝 음악 시장에서 롤링 스톤즈(Rolling Stones)나 더 후 (The Who) 등 여러 영국 뮤지션들이 잇달아 인기를 얻었는데요. 이들 역시 음악뿐 아니라 디자인, 사상 등 사회 문화적 측면에서 젊은이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 현상을 가리켜 ‘브리티시 인베이전(British Invasion)’ 이라는 용어가 만들어졌을 정도죠. 1962년 그 후, 한동안 비틀즈가 없이는 아무것도 떠올릴 수 없습니다.
영화는 끝나고 역사는 계속된다
불후의 명곡 렛잇비, 사실은 해체 이후 떴다
비틀즈는 1970년 4월 10일 폴 매카트니가 솔로 앨범을 발매함과 동시에 탈퇴를 선언하면서 자연스럽게 해체됐습니다. 그런데 앨범 [Let It Be]는 그로부터 한 달 후에야 나오게 됐죠. 멤버들의 불화가 극심했던 상황에서 만들어진 앨범이라, 제작 당시 각자 스튜디오에 들어가 자신의 파트만을 따로 녹음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비록 비틀즈는 해체됐지만, 수록곡 ‘Let It Be’, ‘The Long and Winding Road’가 싱글 차트 1위, 앨범 또한 빌보드 차트 1위에 올랐죠. 어쨌거나, 비틀즈는 각 멤버가 솔로로 활동하면서도 모두 정상의 자리를 차지했던 유일한 그룹입니다.
아, 특히 존 레논은 이후 평생의 연인 오노 요코와 반전·평화 운동을 음악을 통해 실현하면서 더욱 유명해졌죠. 존의 음악세계는 오노 요코를 만나기 전과 후로 나뉜다고들 이야기하는데요. 그는 이제 남녀 간의 사랑을 넘어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에 대한 고민을 곡에 담기 시작했습니다. 남녀, 인종에 대한 야만적 차별에 대해 노래하고, 베트남전의 한 복판에서 반전 운동을 전개했는데요. 영국이 미국의 월남전을 지원하자, 영국인들이 가장 명예롭게 여기는 대영제국 공로훈장을 반납하기도 했습니다. 음악, 그것은 때로 세상의 모든 것을 바꾸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