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는 동화

내 마음이 보여

생각하는 동화생각하는 동화

“어제 본 수학시험지를 나눠 주겠어요. 손미나, 이정민…….”

미나는 시험지를 받고 깜짝 놀랐다. 사선으로 그어진 빨간 막대가 시험지 여기저기에 쿡쿡 박혀있었다. 동그라미는 겨우 세 개 뿐이었다. 눈을 크게 뜨고 다시 보았다.

“그럼 그렇지. 이정민, 바뀌었잖아. 네 시험지네.”

미나는 시험지를 쫙 펼쳐 정민이 앞에 들이댔다.

“아, 뭐야. 창피하게.”

정민이는 구기듯 시험지를 가방에 넣었다.

“이정민, 몇 점인데?”

미나의 짝인 상진이다. 상진이는 무슨 일이든 참견하길 좋아해서 반장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학급반장이 아니라 동네반장이다. 얼마 전에는 반 아이들 싸움을 말린다는 게 잘못해서 저 혼자 발목을 삐끗한 일도 있었다. 그런 상진이 말에 정민이가 퉁을 놓았다.

“몰라도 되거든. 그러는 넌?”

그러자 상진이가 정민이에게 말했다.

“우리 내기 할까? 하나, 둘, 셋 하면 동시에 시험지 보여주기. 이긴 사람이 진 사람한테 딱밤 때리는 거야. 어때?”
“좋아. 시작한다. 하나, 둘, 셋!”

시험지 두 개가 허공에 나란히 멈췄다. 30이라고 쓰인 빨간 숫자 두 개가 쌍둥이처럼 마주보았다. 그 모습을 보고 미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정말 한심해. 이정민, 저 터질 것 같은 얼굴 좀 봐. 몸이 둔하면 머리도 나쁜 건가?’

미나는 100점이라고 크게 쓰인 시험지를 보란 듯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엄마가 그러는데, 우리 학교 시험은 너무 쉬워서 진짜 실력을 알 수가 없대.”

미나는 일부러‘너무’라는 말에 힘을 주었다. 그런데 미나의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정민이와 상진이는 교실 밖으로 나가 버렸다. 미나는 어쩐지 무시당한 것 같아 기분이 상했다.

다음은 체육시간이었다.

“이어달리기를 하겠어요. 모둠에서 두 명은 여기서 출발하고 나머지 두 명은 반대편 출발선에서 바톤을 받은 후 달리는 거예요.”

그 때 상진이가 번쩍 손을 들었다.

“선생님, 저는 발목을 다쳐서 못 뛰는데 어떻게 해요? 저희 모둠은 세 명인데요.”

동네반장다운 질문이었다.

“그럼 정민이네 모둠이 다섯 명이니까, 정민이가 가면 되겠구나.”

정민이가 미나네 모둠으로 옮겨갔다.

‘뭐야. 뚱뚱보, 느림보 정민이가 우리 팀이야?’

안 그래도 교실에서의 일로 기분이 상한 미나는 주위 아이들에게 다 들릴 만큼 큰 소리로 투덜댔다.

“왜 하필 이정민이야. 우리 모둠 1등 하긴 다 틀렸네.”

그러자 옆에 있던 상진이가 미나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야, 너무 심하다.”
“왜? 사실이잖아. 저번에 정민이 뛰는 거 못 봤어? 뒤뚱뒤뚱. 뛰는 건지 걷는 건지.”

그런데 정민이는 화도 내지 않고 남의 일 얘기하듯 웃기만 했다.

“내가 좀 느리긴 하지. 하하.”

그 모습을 보자 미나는 속이 더 뒤집히는 것 같았다.

‘뭐 저런 애가 다 있어. 정말 얄미워 죽겠어.’

미나를 포함해서 여섯 명의 아이가 출발선에 섰다.

“준비, 출발!”

선생님의 신호에 아이들은 팽팽한 활시위를 벗어난 화살처럼 후두둑 튀어나갔다. 미나도 바톤을 손에 꼭 쥔 채 달려 나갔다. 중간 정도 왔을 때 다음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정민이가 보였다. 갑자기 기운이 쭉 빠졌다.

‘내가 1등으로 가면 뭐하냐고. 쟤 때문에 뒤쳐질 게 빤하잖아.’

그런데 이상했다.

‘왜 거리가 줄어들지 않는 것 같지? 집중을 안 해서 그런가?’

미나는 더 힘을 내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달려도 앞에 있는 정민이와의 거리는 좁혀지지 않았다.

‘이럴 리가 없는데. 제자리 뛰기도 아니고.’

미나는 점점 힘이 들었다. 물 먹은 솜처럼 몸이 밑으로 가라앉았다. 얼마 남지 않은 힘을 쥐어짜느라 다리에는 경련이 날 지경이었다. 심장이 쿵쾅쿵쾅 폭발 직전의 화산처럼 뛰었다.

‘아, 안 돼. 더 이상은.’

순간 미나는 다리에 힘이 풀리면서 운동장에 쓰러졌다. 까무룩 정신을 잃은 미나의 귀에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미나야, 괜찮아?”

미나는 가까스로 눈을 떴다. 빙 둘러선 아이들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미나를 보고 있었다. 선생님도 있었다. 그런데 모두 낯선 얼굴이었다.

‘여기가 어디지? 내가 정신이 이상해졌나?’

미나는 눈을 깜박거렸다. 학교 건물이며 운동장, 나무, 모두 미나네 학교와 같았다. 담장 너머로 미나가 사는 아파트도 보였다. 그런데 선생님과 아이들만 달랐다. 그 때 수업이 끝나는 종이 울렸다.

“미나야, 같이 가자.”

여자아이 하나가 미나에게 말을 걸었다. 미나보다 키가 한 뼘은 큰 아이였다.

“은채야, 빨리 와.”

앞서 가는 다른 아이가 그 아이에게 손짓했다.

“알겠어.”

은채가 큰 소리로 대답했다. 고무공이 튀듯 밝고 경쾌한 목소리였다. 미나는 처음 보는데도 어쩐지 그 아이에게 마음이 갔다. 아이들은 5학년 2반 교실로 향했다.

‘5학년 2반은 우리 반인데.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네.’

미나는 목이 바짝 탔다.

복도에 있는 정수기 앞에 대여섯 명의 아이들이 모여 있었다. 미나는 정수기 옆에 있는 컵을 꺼냈다. 그러자 뒤에 있던 아이들이 수군댔다.

“미나 쟤 꼴찌 아니야? 왜 물을 먼저 마셔? 1등 한 아람이가 제일 먼저 마셔야지.”
“맞아. 우리도 다 기다리는데, 쟤는 뭐야?”

그 때 단발머리 여자아이 하나가 찌푸린 표정으로 걸어왔다. 까무잡잡한 얼굴에 깡마른 아이였다.

“손미나, 너 왜 새치기해?”

아이들이 말한 아람이였다. 아람이는 미나를 옆으로 팍 밀었다. 그러고는 태연하게 자기 컵에 물을 따랐다. 그 모습을 보니 미나는 어이가 없었다. 화가 머리꼭대기까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무슨 짓이야!”

이번에는 미나가 아람이를 두 손으로 세게 밀었다. 넘어질 듯 아람이의 몸이 휘청했다. 그 바람에 물이 쏟아져 아람이의 바지가 흠뻑 젖었다. 아람이는 얼굴이 울상이 되었다. 미나는 속으로‘쌤통이다.’하며 웃었다.

“꼴 좀 봐라. 너 몇 살인데 바지에 오줌을 싸니?”
“이게, 꼴찌 주제에.”

아람이가 미나에게 와락 덤벼들었다.

“내가 왜 꼴찌야?

미나가 아람이를 밀쳐내며 소리쳤다.

“칠판에 쓰여 있는 거 보면 몰라? 너 오늘 꼴찌 맞거든.”

‘정말, 내가 꼴찌라고?’

미나는 아람이를 제치고 교실로 달려갔다.

1등 이아람 132점
2등 한다솔 127점

25등 손미나 34점

‘말도 안 돼. 만날 1등이었는데, 내가 어떻게 꼴찌냐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계속되자 미나는 답답해서 가슴을 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 때 아람이가 급식차를 밀고 들어왔다.

“비켜! 뭘 그렇게 넋 놓고 서있냐? 하루 이틀 꼴찌도 아니면서.”
“너 정말.”

미나가 주먹을 번쩍 치켜들었다. 그러자 아람이는 쪼르르 달아났다. 1등인 아람이는 급식도 제일 먼저 받았다.

“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치킨너겟이다.”

아람이는 치킨너겟을 여섯 개나 가져갔다. 급식당번인 아이가 말했다.

“야, 이거 세 개씩이야. 네가 많이 가져가면 다른 애들이 못 먹잖아.”
“뭐 어때. 난 1등인데. 1등은 많이 먹어도 되거든.”

아람이는 혀를 날름 내밀고 자리로 들어가 버렸다. 아이들이 급식을 다 받고 마지막으로 미나의 차례가 되었다. 역시나 치킨너겟은 하나도 없고 시뻘건 김치만 잔뜩 남아 있었다.

“선생님, 저는 치킨 없어요.”

미나의 말에 선생님이 드르륵 의자를 끌며 일어났다.

“정해진 양만 받아야지 앞 사람이 많이 가져가니까 못 받는 아이가 있지.”

선생님 목소리에 짜증이 잔뜩 섞여 있었다. 미나는 괜히 목이 움츠러들었다.

“그리고 미나는 만날 억울하다고만 하지 말고 급식을 좀 일찍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게 어떻겠니?”

그 말을 듣자 미나는 밥을 먹고 싶은 생각이 싹 달아났다. 얼굴이 훅훅 달아올랐다. 반찬을 잡은 집게가 후들후들 떨렸다.

‘도대체 내가 왜 꼴찌야. 게다가 꼴찌라고 물도 나중에 먹고, 밥도 제일 늦게 먹고. 세상에 이런 게 어디 있냐고.’

식판을 들고 자리에 오니 아람이는 벌써 다 먹고 밖에 나간다며 설쳐댔다. 미나는 아람이의 뒤통수를 째려보았다. 한대 때리기라도 하면 속이 좀 풀릴 것 같았다.
급식차를 치우고 뒷정리를 하는 것도 미나의 몫이었다.

‘어휴, 정말 너무하네.’

미나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내가 도와줄게.”

낯익은 목소리에 미나는 고개를 들었다. 은채의 웃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고, 고마워.”

그제야 꽁꽁 뭉쳐있던 마음이 조금 풀리는 것 같았다. 빗자루로 바닥을 쓰는 은채의 뒷모습이 마치 다정한 언니 같았다.
그 때 복도에서 우당탕탕 소리가 들렸다. 아람이가 어떤 아이와 교실로 달려오고 있었다.

“1등! 내가 이겼지?”

아람이가 큰소리치며 운동화를 벗었다. 교실 바닥에는 흙 자국이 점점이 찍혀있었다. 그걸 보고 미나가 소리쳤다.

“이아람, 실내화는 밖에서 갈아 신고 와야지.”

앉아서 실내화를 신던 아람이가 미나를 보았다. 아니꼽다는 표정이 얼굴에 가득했다.

“그럼 좀 어때서.”

아람이는 이기죽대며 운동화를 바닥에 탁탁 쳤다. 운동화에 붙어있던 모래가 바닥으로 우수수 떨어졌다.

“이게 진짜. 이거 네가 다 쓸어.”

미나는 던지듯 빗자루를 거칠게 내밀었다.

“내가 왜? 청소는 꼴찌인 네가 하는 거잖아.”
“너 자꾸 꼴찌, 꼴찌 할래? 꼴찌가 뭐 어떻다는 거야. 청소 다 해 놓은 거 더럽혔으니까 네가 다시 해.”
“싫은데.”

아람이는‘네가 어쩔 건데?’하는 얼굴로 빙글빙글 웃기만 했다. 그 때 은채가 아람이의 운동화를 집어 들더니 창밖으로 내밀었다.

“이래도 안 할 거야?”

미나와 아람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성은채, 내 운동화 안 내놔?”

아람이가 꽥 소리쳤다. 은채는 한 손을 허리에 걸치고 선 채 아람이를 쏘아보았다.

“먼저 바닥부터 쓸어.”

그 사이 아이들이 모여들었다.

“내 신발 달라고!”

아람이가 은채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러자 이번엔 미나가 아람이의 앞을 막았다.

“자. 여기 빗자루.”

아람이는 씨근덕대며 아이들을 둘러보았다. 누군가 자기편을 들어줄 사람을 찾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선뜻 앞으로 나서는 아이는 없었다.

“아유 씨, 진짜.”

아람이는 쿵쾅쿵쾅 신경질을 내며 복도로 나갔다. 은채는 별 일 아니라는 듯 아람이의 운동화를 신발장에 넣었다.

수업이 끝난 후 아이들은 거의 교실을 빠져나갔다. 미나는 칠판에 있는 점수판을 보았다. 자신의 이름이 맨 밑에 적혀 있는데도 화가 나지 않았다. 이상했다. 얼마 전까지도 100점을 맞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그 때 은채가 옆에 와서 물었다.

“뭘 그렇게 보고 있어?”
“여기 점수 말이야. 내용을 바꾸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
“그래? 나도 진즉에 그런 생각을 하던 참이었는데. 역시 우리는 통하는 데가 있다니까.”

은채가 지우개로 칠판에 쓰인 글자를 지우기 시작했다. 그걸 보고 미나가 펄쩍 뛰었다.

“그렇다고 진짜 지우면 어떻게 해.”

은채가 어깨를 으쓱했다.

“잘못 된 건 바로 잡아야 하지 않겠어? 뭐가 좋을까?”

그 때 미나의 머리에 점심시간 은채가 자기를 도와준 일이 떠올랐다.

“친구가 힘들 때 도와주기. 어때?”
“좋은데?”

은채가 맞장구치며‘친구가 힘들 때 도와주기라고 점수판에 적었다.

“주변 깨끗이 하기. 그리고 친구들 웃기기.”

은채의 말에 미나가 쿡쿡 웃었다.

“발표 열심히 하기.”
“발표? 뭐, 좋아, 좋아. 잃어버린 물건 찾아주기?”
“멋진데.”

점수판을 다 채우고 미나와 은채는 교실을 나와 1층으로 내려왔다. 은채가 갑자기 생각난 듯 말했다.

“나 실내화가방 교실에 두고 왔다. 너 먼저 나가 있어.”

은채는 성큼성큼 계단을 두 칸씩 뛰어올라갔다. 미나는 현관에 나와 운동화를 갈아 신었다. 일어서는데 따가운 한낮의 햇살이 쨍하고 미나의 눈에 와 부딪혔다. 미나는 자기도 모르게 눈을 꼭 감았다.

 생각하는동화 3화

조금 뒤 눈을 떠보니 운동장에 무리지어 집으로 가는 아이들이 보였다. 재잘대며 걸어가는 아이들 사이에 덩치 큰 아이 하나가 눈에 띄었다. 정민이였다. 미나는 반가운 마음에 정민이에게 달려갔다. 아침의 일은 이미 까맣게 잊었다.

“정민아!”

정민이가 웃으며 뒤돌아봤다.

“미나야. 너 이제 괜찮아?”
“응. 괜찮아.”
“아까 체육시간에 네가 있었으면 우리 팀 더 잘 했을 텐데, 아쉽다. 그치?”

그 말에 미나가 정민이의 어깨를 탁 쳤다.

“1등이 아니면 어때.”
“맞아. 1등이 아니어도 괜찮지.”

나란히 걸어가는 아이들 뒤로 뽀얀 흙먼지가 방실방실 피어올랐다.

김지혜(동화작가) 1977년생, 제13회 대산대학문학상 동화부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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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6-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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