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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예술의 풍경

식민지 조선의 애수가 서린 목포극장과 동춘서커스

근대 예술의 풍경 제 11호 : 식민지 조선의 애수가 서린 목포극장과 동춘서커스근대 예술의 풍경 제 11호 : 식민지 조선의 애수가 서린 목포극장과 동춘서커스
목포극장과 동춘서커스

근대사회 형성과 더불어 등장한 극장은 영화라는 시각적 볼거리 제공을 넘어 관객의 신체 감각을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변화시켰다. 극장을 둘러싼 공간은 지역민의 일상생활 경험을 드러내면서 특정한 의미를 형성하였다. 나아가 극장의 장소성은 해당 지역의 사회적 상황에 따라 달리 나타났는데, 그러한 일례를 1920년대 목포극장과 극장문화와 연관된 동춘서커스에서 찾아볼 수 있다.

1897년 개항 이래 면화 교역 중심 도시로 성장한 목포의 극장 역사는 일본인 이주자와 함께 시작되었다. 청일전쟁 이후 증가한 일본인을 따라 가부키(歌舞伎, かぶき) 등을 흥행하는 소규모 가설극장 목포좌(木浦座)가 개관된 것이다. 극장이 근대도시 형성의 전제 조건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1908년 개관한 상반좌(常盤座)는 상반정(常盤町)이라는 행정 지명 생성의 모태가 되었다. 한일병합 이후 일본인은 물론 조선인의 숫자도 늘어났지만, 1920년대 초반까지 목포의 조선인 극장은 부재하였다. 따라서 일본인을 대상으로 세워진 상반좌가 소인극(素人劇)과 토월회(土月會)의 신극(新劇) 등을 상연하면서 조선인을 불러들였다. 지역 극장은 일찍부터 일본인과 조선인 모두를 아우르며 영업한 것이다.

조선인 극장의 역사는 1926년 11월 8일 개관한 목포극장에서 시작되었다.

지역 유지(有志)로 일컬어지는 약재상 류관오(柳官五)에 의해 설립된 목포극장은 건물 평수와 관객 수용 측면에서 일본인 소유의 극장 평화관의 그것을 절대적으로 앞질렀다. 1920년대 목포는 식민지 경제 수탈과 이에 대항하는 민족주의 갈등이 건물 건립으로 가시화되던 시기였다. 즉, 식민지 토지 수탈 기관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이 1920년 6월 문을 열었고,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실질적 지배를 받으며 성장한 조선식산은행 목포지점 사무소는 1924년 12월 공사를 마쳤다. 무엇보다도 목포극장 개관 한 달 앞선 1926년 10월 1일 조선 통치 총본산 조선총독부 청사(廳舍) 준공식은 조선인에게 의미심장한 일이었다. 이와 같이, 제국의 절대 권력이 가시화되는 상황에서 문을 연 목포극장은 건물 자체만으로도 조선인에게 심리적 보상을 제공하였다. 목포극장 건립은 조선인 사회의 역량과 입지를 보여주는 지표였기 때문이다

목하곡예단 소개기사, 1922년 6월 17일자 동아일보

일제강점기 목포의 도시 공간 측면에서 보아도, 목포극장의 장소적 성격은 주목되었다. 목포극장은 목포부 (木浦府) 청사 건물이 세워진 유달산 기슭을 따라 목포역으로 향하는 죽동에서 문을 열었다. 죽동은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된 비격자형 골목들이 연달아 이어진 조선인 과밀 지역으로, 목포역 인근에 바둑판 형태의 도로를 따라 형성된 일본인 거주지의 경계에 위치하였다. 따라서 일본인 지역과 인접하면서 낙후성이 두드러진 죽동에 등장한 목포극장은 식민 질서에 대한 문화적 저항으로 비춰지기에 충분하였다.

게다가 목포극장은 지역 조선인을 대변할 언론 부재로 인하여 조선인의 의견을 형성하고 결집하는 공론장(公論場)으로 기능하였다. 목포극장은 조선인에 대한 일제의 미두검사(米豆檢査) 차별을 성토하고, 노동야학 후원금 마련과 전기료 인하 문제를 토론하였으며, 나아가 배일(排日)과 공산주의(共産主義)를 선전하는 정치적 장소가 되었다.

(좌) 목하곡예단 소개기사, 1922년 6월 17일자 동아일보

하지만 목포극장이 조선인과 일본인 거주지 접점(接點)에 위치한 것처럼, 극장 프로그램은 조선인과 일본인의 경계를 넘나들었다. 1920년대 후반 목포극장의 주요 프로그램은 ‘활동사진(活動寫眞)’으로 불린 영화를 비롯하여 일본 고유 연극을 상연하는 시바이(しばい, 芝居)와 로오교쿠(ロオギョク, 浪曲) 그리고 곡예 등으로 구성되었다. 관객은 영화보다 공연예술을 선호하였는데, 공연예술 작품 상연 횟수가 영화의 그것보다 적었지만, 입장객 숫자는 영화를 훨씬 넘어서고 있었다. 식민지 조선인 결집의 상징적 공간 목포극장은 실제로 일본인 중심의 오락장이었고 나아가 조선인과 일본인 종족(ethnic) 간 혼종(混種)의 공간이었다.

목포 지역 식민지 근대 문화 향유에서 드러난 종족 간 경계의 월경(越境)과 경계의 무화(無化) 현상은 극장보다 서커스(circus)에서 두드러졌다.
곡마단(曲馬團)이라는 명칭으로 널리 알려진 서커스는 1920년대 경성과 원산 등 대도시에서 개최되면서 성황을 누렸다. 곡마단 국적도 이탈리아 · 러시아 · 중국 그리고 일본에 두루 걸쳐 있었으며, 단체 평균 60~90여 명에 이르는 공연자들의 기예(技藝)는 세간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조선에 서커스가 도래한 것은 1890년 궁중의 초대를 받은 아리타양행회(有田洋行�, 이후 아리타서커스)이다. 그리고 최초의 조선인 서커스 단체는 동춘서커스이다. 일본 서커스 단원으로 활동한 조선인 박동춘이 1925년 조선인 30여 명으로 단체를 결성하여, 1927년 목포 호남동(당시 호남정)에서 첫 선을 보였다. 동춘서커스의 결성 시기에 대해서 논자에 따라 의견이 분분한데, 그것은 일본인 서커스가 조선에서 공연을 반복하면서 현지인을 고용한 사실에서 기인한다. 식민지 조선의 서커스 역사는 종족과 문화의 경계를 넘어 시작되었다.

제주 동춘서커스

서커스는 종족과 국적은 물론 성별과 연령 그리고 계층의 경계를 넘어선 대중오락이었으며, 무엇보다도 언어라는 장벽을 갖지 않아 누구에게나 열려있었다.
줄타기와 공중곡예 그리고 조련된 동물 기예를 선보이는 서커스는 식민지 조선에 있어 낯설지 않았다. 서커스 단체가 펼치는 공연 종목 가운데 일부가 근대사회 이전부터 행해진 유랑연희(流浪演戱)에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커스 공연은 근대 극장 등장 및 도시화와 친밀한 연관성을 갖는다는 점에서 유랑연희와 달랐다. 극장은 밀폐된 건물의 일면(一面)으로 시선을 고정시키도록 시계(視界)를 형성하여, 서커스와 같은 사방(四方)이 열린 놀이에 적합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장 공간은 자연 환경의 영향에서 벗어나 동물의 움직임을 통제하는 서커스에 최적의 장소였다. 서커스는 ‘외부 세계의 내부 공간화’를 실현한 서구 아케이드(arcade)에 비견되는 도시적 현상이었다.

1920년대 “소녀가 말을 타고 재조넘는… 공중비행(空中飛行) 맹수놀님”으로 신문에 소개된 바와 같이, 서커스는 자연에 대한 통제와 강인한 신체를 강조하며 목포 지역에 특별한 의미로 다가왔다. 목포극장 개관에 앞서 지역 조선인은 암태도(岩泰島) 소작쟁의 승리와 노동자 동맹 파업 등을 통해 ‘힘의 논리’를 체득(體得)하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목포극장 개관과 발맞춰 열린 목포항 개항 30주년 기념 박람회(博覽會) - 전남물산공진회(全南物産共進會)와 조선면업공진회(朝鮮綿業共進會) - 개최를 통해, 지역민은 근대 시각문화의 스펙터클(spectacle)을 충격적으로 경험하였다. 힘(力)의 담론이 지배하던 시대, 볼거리 가득한 ‘활동하는 신체’를 내세운 서커스는 ‘지덕체(知德體) 조화’를 강조하며 근대 신체 발달과 훈련에 관심이 있던 청년회에게도 매력적인 존재였다. 중앙기독교청년회 체육부는 1928년에 벌써 ‘제12회 써커스대회’를 개최하였기 때문이다. 1920년대 중반 목포 지역에서 유일한 학생기독청년회 활동을 벌인 영흥중학교의 압도적인 체육 활동 역시 동춘서커스 창단에 우호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서커스에 대한 조선인 관객의 해석은 양가적이었다.

서커스는 인간 신체의 물리적 한계를 넘어서 스릴(thrill)과 흥분을 강조하는 ‘대단한’ 놀이였지만, 한편으로 인간 신체에 대한 학대였기에 흥분을 넘어선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무엇보다도 서커스는 식민 질서 아래 조선인의 망국(亡國)과 이산(離散)의 감정과 복잡하게 얽혀있었다. 조선인 곡예사를 둘러싼 당시의 수사(修辭)는 ‘미약한 존재로서 조선’이었으며, ‘고향’과 ‘고국’ 및 ‘동양 최고’ 그리고 ‘애석’과 ‘애수’와 같은 표현이 서커스를 뒤따라 다녔다.
서커스는 언어라는 매개를 거치지 않아서 일본인뿐만 아니라 중국인 등을 포함한 재목(在木) 외국인에게도 호소력을 발휘하였다.
특히, 동춘서커스가 첫 선을 보인 호남동을 포함한 목포역 일대는 지게벌이 등 일일 노동으로 연명하는 조선인 ‘빈민굴’ 지역이었다. 생계를 이유로 타지에서 몰려든 조선인 빈민과 하류층 일본인 이주자의 삶은 ‘이산’과 ‘유랑’을 표상하는 서커스 공연에 쉽게 동화될 수 있었다.

1925년 현재 식민지 조선 전체 도시 가운데 8위를 차지한 목포의 인구 규모 역시 서커스 흥행의 전제로 작용하였다.

동춘서커스가 공연을 시작한 호남동은 목포극장이 자리한 죽동과 그리 멀지 않았다. 조선인과 일본인의 혼거(混居) 지역 죽동은 1926년 박람회 개최를 계기로 요리점과 거리 문화의 상징인 카페(café)가 발달한 곳이었다. 시기적으로 더욱 거슬러 올라가 살펴보면, 목포 최초의 일본식 요리점 ‘동운’이 죽동에서 문을 열었으며, 이후 ‘동운’ 건물은 도정(搗精) 공장을 거쳐 지역 최초 극장 목포좌로 변신하였다. 요컨대, ‘보기(目)’와 ‘움직이기(活)’를 근대적 방식으로 전개한 목포극장 개관과 동춘서커스 결성은 식민지 근대 감각의 혼종성(hybridity)과 지역성(locality)을 보여주었다.

위경혜_순천향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학술연구교수, 1965년생저서 『호남의 극장문화사』 『광주의 극장 문화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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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6-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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