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라와 함께 라디오 드라마가 송출되다
헨릭 입센의 작품 「인형의 집」이 <매일신보>에 번역되어 실린 것은 1921년 1월 25일이었다. 연재 마지막에는 나혜석이 작사한 노래가 실렸다. 「인형의 가」였다. 「인형의 집」의 주인공 노라는 봉건적 질서 속에서 억압당하는 여성들의 상징이자 그녀의 해방이 곧 여성의 해방을 의미했다. 나혜석만 노라에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중국의 사상가 루쉰은 1923년 베이징여자고등사범학교에서 ‘집 나간 노라는 어떻게 되었나’를 주제로 연설을 했다. 그는 여학생들에게 집을 나가려거든 먼저 경제적 자립을 하라고 말했다. 그렇지 않으면 타락하거나 다시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바야흐로 1920년대 동아시아에서는 ‘노라 신드롬’이 일었다고 말할 수 있다.
기막힌 우연이었는지도 모른다. 1927년 5월 23일 ‘라디오드라마연구회’에서는 입센 서거 100주년 행사를 기획했다. 「인형의 집」을 라디오 드라마로 각색한 것이었다. 이는 공식적으로 한국 최초의 라디오 드라마로 평가받는다. 물론 경성방송국(JODK) 개국 이전에도 라디오 드라마는 존재했다. ‘조선극우회’에서 제작한 라디오 드라마 <새벽종>이 있었다. 그러나 이는 경성방송국 개국 이전의 시험방송으로 송출된 라디오 드라마였다. 경성방송국이 개국하면서 라디오는 세간의 주목을 한 몸에 받았다. 라디오는 최첨단 미디어였으며, 라디오 방송은 “무선전화”로 호명되기도 했다. 라디오에는 다양한 수식어가 붙었다. “근대 문명의 새로운 신”이자 “현대 과학 문명의 극치”이며, “시대의 총아”이자 “문화적 이기”임과 동시에 “귀신의 장난”이었다. 라디오는 세계의 시공간을 순식간에 허물었다. 또한 라디오는 전 세계적인 네트워크를 형성하면서 “세계의 움직임! 지구가 돌아가는 소리”와 “상인의 사기! 부르주아의 배불리는 소리! 노동자의 노호(怒呼)하는, 아우성치는 소리”를 각 가정의 응접실과 길거리로 전파했다. 이러한 최첨단 미디어가 당시로서는 가히 혁명적이었던 「인형의 집」을 라디오 드라마로 송출한 것은 우연이 아니라 어쩌면 필연이었을지도 모른다.
소리 드라마와 사운드 스케이프(soundscape)
라디오 드라마는 오디오 드라마이며 ‘소리 드라마’이다. 라디오 드라마는 그리 낯선 양식의 문화는 아니었다. 라디오를 통해 드라마를 청취하는 것은 분명 새로운 문화적 형식이었다. 그러나 낭독된 이야기, 극화된 이야기 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오랜 문화적 전통을 이어받은 결과였다. 조선시대부터 전기수의 낭독문화, 즉 이야기 공연이 있었다. 무성영화가 전래된 이후에는 변사의 목소리 공연이 존재했었다. 라디오 드라마 역시 이런 전통과 결합된 형태로 볼 수 있다. 라디오 드라마의 핵심은 언어, 대화, 음악이었다. 이는 전시대의 전통 공연이나 무성영화 시대의 변사 공연과도 그 맥을 같이 하는 요소였다.
1920년대 라디오 드라마는 대부분 단막극 중심이었다. 1928년 8월에 방송된 광무대(光武臺)의 창극 <춘향전>과 같은 5회에 걸친 연속극도 있었다. 1930년대 들어 라디오 드라마는 전성시대를 맞이했다. 성인들을 위한 라디오 드라마뿐만 아니라 1935년에는 어린이 대상 라디오 드라마도 송출되었다. 이처럼 라디오 드라마가 대중들의 사람을 받자 조선일보, 동아일보, 매일신보에는 ‘라디오프로그램’ 란이 등장하였다. ‘라디오프로그램’란은 그 날 방송될 라디오 드라마의 줄거리를 소개하는 꼭지였다. 그만큼 라디오 드라마의 대중적 관심을 반증하는 신문 편집이었던 셈이다. 잠시 조선일보에서 선전한 라디오 드라마 줄거리를 살펴보겠는데, 흡사「인형의 집」을 떠올리게 한다.
주인공 이은희와 박영희는 결혼 7년차 부부이다. 박영희는 평범한 회사원이었고, 이은희는 인기 절정의 배우였다. 남편은 아내의 공연을 보면서 매우 흡족했다. 그러나 아내의 인기가 올라갈수록 부부의 갈등은 심해져 이혼까지 생각하기도 했다. 남편은 아내의 인기에 시기를 느껴 아내를 사회적으로 매장시키려는 계획을 세운다. 남편은 신문사에 아내에 대한 중상모략의 글을 투고하고 이를 빌미로 아내에게 무대에서 떠날 것을 강요한다. 그러나 사건의 전모를 알게 된 아내는 오히려 남편을 버리고 집을 나간다.
- ‘오늘 밤 방송, 금붕어’, <조선일보>, 1933.10.29. 내용 요약
라디오 드라마는 번역극과 창작극이 뒤섞여 있었다. <부활>, <베니스의 상인>, <인형의 집>, <춘향 전>, <우정(유아나)>, <춘희>, <카츄샤>, <산 사람들> 등이 라디오를 통해 송출되었다. 라디오 드라마는 유성기 음반극과도 일정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유성기 음반극이 라디오 드라마로 송출된 경우도 있었다. 라디오 드라마는 대부분 생방송으로 진행되었다. 당시에는 생방송으로 나간 라디오 드라마를 녹음해 두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때 방송된 드라마의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기는 어렵다. 이에 비해 유성기 음반극은 현재까지 녹음된 레코드판 형태로 남아 있어 음반극에 출현했던 배우들의 육성을 들을 수 있다. 라디오 드라마의 형식을 빌려 경성방송국의 전파를 탄 유성기 음반극은 <베니스의 상인>, <부활>, <춘희>, <인형의 집> 등이었다. 라디오 드라마든 유성기 음반극이든 간에 엄밀히 말하면 모두 다 ‘무대연극의 방송화’라 말할 수 있다.
라디오를 통해 송출되는 모든 극을 ‘라디오 극’이라 불렀다. 그 하위에 라디오 드라마, 방송 무대극, 라디오 풍경, 영화극이 존재했다. 라디오 드라마는 라디오로 방송하기 위해서 각색된 드라마이며, 방송무대극은 기존의 연극을 라디오로 송출하는 것이고, 라디오 풍경은 희곡적 요소가 별로 없는 소품이며, 영화극은 기존의 흥행 영화를 희곡화하여 방송하는 것을 의미했다.
라디오 드라마가 유행하자 이에 대한 비판과 반성도 등장했다. 요즘 라디오 드라마의 재료가 “너무나 지식적인 근대극”이라 “극히 소수의 교양 있는 사람들”만 즐기게 되었으며, 그래서 최근 송출되고 있는 라디오 드라마는 “사람들의 평가를 종합하면 완전히 실패에 가까웠다”라는 비판이 있었다. 그렇다고 대중의 기호와 시청률에 목말라 “넌센스”와 “에로, 그로”가 들어가는 “저급취미”의 작품이 송출되어서는 안 된다는 경계의 말도 덩달아 나왔다. “얼굴은 보이지 않고 다만 목소리만으로” 활약하는 ‘얼굴 없는 예술가’가 공연하는 라디오 드라마는 ‘보이지 않는 연극’과 ‘보이지 않는 영화’였다. 청취자들은 라디오 드라마 연기자들의 목소리를 통해 자신들이 경험하지 못한 세계를 향한 열망을 불태우면서 저마다의 색채를 지닌 세계의 풍경을 그려냈을 것이다.
“제8의 예술”이자 영화와 더불어 가장 새롭고 현대적인 예술 형식인 라디오 드라마가 등장한 지도 90여 년이 되었다. 스마트폰으로 영화를 촬영하고 송출하는 요즘 ‘라디오 드라마’는 역사적 유물에 가까운 말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여전히 라디오 드라마는 전파를 타고 전국 곳곳으로 송출된다. 시각적 미디어와 예술에 우리의 감각이 압도된 요즘이라고 해서 라디오 드라마가 주는 울림이 결코 헛된 것은 아닐 것이다. 눈을 감고 라디오 드라마 연기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다보면 무뎌진 우리의 감각과 상상력이 전파의 네트워크처럼 무한히 확장되는 경험을 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