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예술의 풍경

소설가의 꿈을 접은 음악가 홍난파의 고뇌

근대 예술의 풍경 2015.11.05 제 09호 소설가의 꿈을 접은 음악가 혼난파의 고뇌근대 예술의 풍경 2015.11.05 제 09호 소설가의 꿈을 접은 음악가 혼난파의 고뇌

1924년 2월 5일이나 6일쯤으로 짐작되는 날,

젊은 문인 서넛이 모인 사랑방에서는 설 세배상이 금세 술상이 되고 윷 노름판이 벌어질 참이었다. 그때 소문난 주당이자 깐죽거리기로 일급인 시인이 옆자리에 앉은 친구에게 괜한 트집을 부렸다. 시인 왈, 음악이나 하려면 제대로 할 것이지 주제넘게 소설이 다 무슨 짓이냐, 동서고금 통틀어 두 가지 예술에 한꺼번에 대성한 천재가 있더냐 하는 소리였다. 요컨대 한 우물이나 제대로 파라는 말씀이렷다. 술김에 시비를 건 쪽은 공연히 핏대를 올렸고, 얼결에 한 방 얻어맞고 휘청한 쪽도 사내자식 체면인지라 고분고분 물러서긴 싫었다. 일본 유학 시절부터 술친구였던 두 사람 모두 스물예닐곱의 청춘이었으므로…

왜 없니? 누구? 바그너도 모르니? 시인이요 음악가인 바그너 말이다. 장하다! 그래, 네가 그런 불출세의 대천재란 말이지? 여기에는 나로서도 유구무언일밖에.

그날 밤 씩씩거리며 잠을 이루지 못한 음악가 겸 소설가는 새벽녘 일찌거니 이부자리를 박차고 나와 막 출판사에 넘기려던 창작집 원고 한 뭉치를 아궁이에 처넣었다. 그러고는 마지막 한 장이 재가 될 때까지 아궁이를 노려보았다. 그날부터 음악가 겸 소설가는 그냥 음악가만 되기로 마음먹었고, 금세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로 이름을 날렸다. 소설가를 때려치운 음악가는 은근하게라도 시인을 고맙게 여겼을까?

자기도 모르는 결에 문학청년 하나를 구원의 길로 이끈 시인은 이태 전에 「논개」를 발표한 수주 변영로다. 그리고 변영로와 마주칠 때마다 쓴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던 바이올리니스트 소설가는 난파 홍영후, 바로 「봉선화」의 작곡가인 홍난파다. 술고래의 말마따나 문청은 그길로 문학을 작파했 으니 홍난파가 소설가였던 시절은 1919년부터 1924년까지 꼬박 다섯 해로 막을 내렸다.

삼광 창간호 독립기념관 소장

문학,음악,미술을 아우르는 동인지《삼광》

삼일 운동 전야인 1919년 2월에 문학, 음악, 미술 세 가지를 아우르겠노라며 홍난파가 야심만만하게 이름 붙여 펴낸 동인지가 《삼광》이다. 《삼광》은 최초의 근대문학 동인지로 쳐주는 김동인의 《창조》보다 고작 아흐레 뒤져 창간되었다.

둘 다 도쿄의 하숙방을 본거지로 삼은 것도 마찬가지다. 그래도 《창조》는 문학 동인지요《삼광》은 예술 동인지이니 아무래도 《삼광》이 한 수 위다. 《삼광》의 면면을 볼작시면 미술은 언감생심이었으나 음악이야 홍난파가 도맡으면 될 터였다. 문학은 시인 황석우, 소설가 염상섭, 극작가 유지영, 번역가 홍난파가 한데 모였으니 시, 소설, 희곡, 수필, 비평, 번역까지 어느 것 하나 빠뜨리지 않았다.

바로 그 《삼광》 창간호에 홍난파가 번역해 내놓은 것이 도스토예프스키의「가난한 사람들」이다. 비록 《삼광》은 3호로 그쳤지만 홍난파의 번역은 1923년 6월에 단행본으로 출판되 었다. 어쨌거나 도스토예프스키의 등단작「가난한 사람들」이 곧 홍난파의 등단작 이기도 한 셈이다. 그뿐인가? 홍난파의 번역은 한국에서 처음으로 번역된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이자 식민지 시기를 통틀어 유일무이한 도스토예프스키 번역이기도 하다.

홍난파, 문학에 뛰어들다

홍난파가 본격적으로 문학에 뛰어든 것은 1921년 무렵의 일이다. 사실 그전에도 홍난파는 내로라하는 음악가이자 일본 유학생계에서 배출된 최고의 스타 저술가였다. 열여덟 살 때인 1916년부터 문학을 배신한 1924년까지만 해도 홍난파는 무려 열다섯 권의 창가집과 음악 논저를 출판했으니 말이다. 그사이에 ‘재동경 조선 유학생 악우회’를 꾸려 《삼광》을 창간하면서 홍난파는 문학청년의 꿈에 조금씩 다가갔다. 그리고 1921년부터 분서 사건이 일어난 1924년 사이에 놀랍게도 스무 권의 책을 더 펴냈다.

홍난파는 그중 몇 권의 앞머리나 광고란에 자신의 저술 목록을 잔뜩 늘어놓았다. 스물다섯의 나이에 서른 권이 넘는 저술 목록을 가진 작가가 있었던가? 자기 책에다가 이처럼 당당하고 멋지게 자기 저술 목록을 광고할 수 있는 작가가 또 있었던가? 게다가 음악, 창작, 번역을 보기 좋게 분류해서 차려 놓을 수 있는 작가가 과연 있었던가?

세련된 고급 장정의 창작집 향일초

먼저 소설가로서 홍난파. 홍난파는 신문 연재소설 작가이기도 해서 나중에 단행본으로 펴낸 소설이 두 권이다. 홍난파는 창작이라고 우겼지만 실제로는 일본소설을 한국식으로 번안했다. 세련된 고급 장정의 창작집「향일초」는 근대문학의 역사상 두 번째로 상재된 단편소설집이니 홍난파는 이번에도 꼭 한 발 늦었다. 막상「향일초」의 실상이 라는 것이 문학청년의 습작 수준에 머물렀다거나 별 볼 일 없었다 하더라도 말이다.

그렇게 해서 장편, 단편의 홍난파 소설이 모두 여덟 권이나 된다. 하지만 그중에서 실제로 출판된 것은 신문 연재소설을 손봐서 펴낸 두 권과「향일초」뿐이다. 나머지 다섯 권은 기실 출판되지 않았거나 또는 출판되지 못했다. 어떻게 된 노릇일까?

홍난파는 문학청년의 길을 버리고 결연히 음악가의 길로 매진하겠노라 다짐했고 실제로도 그렇게 했다. 출판사에 막 넘기려던 원고까지 불태우면서 말이다. 그런데 한 뭉치는 분명히 이튿날 새벽에 불태웠지만 나머지 네 뭉치를 몽땅 태웠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아닌 게 아니라 네 뭉치 가운데 적어도 두 뭉치는 지금도 고이 남아 있으니 문학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꿈이든 미련이든 홍난파에게 문학은 우스운 일이 아니었다.

홍난파는 자기 소설을 직접 각색해서 전국 순회공연에 나서기도 했다. 무대는 홍난파의 바이올린과 윤심덕의 독창으로 열렸고, 연극은 김우진이 연출했다. 훗날 김우진과 윤심덕은 현해탄에서 머뭇거리지 않고 몸을 던지고 말았으니 홍난파에게도 예술이란 목숨을 걸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건 그렇다 치고 이번에는 번역가로서 홍난파. 홍난파의 번역 목록은 한결 화려하다. 모두 열두 권이나 되는 번역서를 볼라치면 도스토예프스키 말고도 투르게네프, 시엔키에비치, 빅토르 위고, 뮈세, 주더만, 에밀 졸라……. 19세기 중후반 꼭 육십 년의 유럽 문학에 집중된 번역서 목록은 가히 당대 최고의 세계문학 컬렉션이라 할 만하다. 작가 수준도 그러하거니와 작품을 고른 안목도 손색이 없다.

그뿐이 아니다. 실제로 출판되지 못했지만 번역 단편집 한 권과 희곡집 한 권도 마무리 단계까지 육박한 참이었다. 그중 한 권의 원고 역시 지금까지 남아 있으니 홍난파를 가리켜 식민지 시기 최고의 세계문학 번역가라 일컬어도 결코 허튼소리가 아니다.

불과 다섯 해 만에 쌓아 올린 목록이 이러할진대 변영로가 비아냥거리지만 않았어도, 홍난파의 객기만 아니었어도 바그너 뺨치는 음악가 겸 소설가가 탄생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세계문학이라는 것의 파노라마를 보여 준 홍난파는 적어도 삼일 운동 직후에 출현한 최초이자 최고의 전문 번역가임이 틀림없다. 홍난파에 맞먹을 만한 번역가는 그전에도 존재한 적이 없고 그 뒤로도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홍난파가 도쿄의 하숙방에서 도스토예프스키를 번역하는 모습이야말로 한국에서 처음으로 번역가가 탄생하는 진풍경으로 기억되어야 마땅하다.

번역가로서의 비극적인 운명

그렇다고 해서 홍난파가 곧바로 절필이라도 한 것은 아니다. 홍난파는 음악가의 길을 걸으면서도 다시 음악 전문 잡지를 발행했고 줄곧 글을 썼으며 또한 책을 펴냈다. 최초의 음악 산문집 「음악 만필」을 선보인 것도 홍난파다. 분서는 분서였지만 절필은 결코 아니었던 셈이다.

사정이 그러하다면 홍난파의 분서를 곧이곧대로 변영로의 술주정 탓으로 돌려서는 안 된다. 음악에 대한 홍난파의 열정으로만 바라보기에도 미심쩍다. 어쨌거나 홍난파는 원고 전부를 불태운 것이 아닐뿐더러 나머지 몇 뭉치의 원고를 두고두고 소중히 간직했다가 우리에게 물려주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홍난파는 대체 왜 번역가로 먹고사는 일을 그만두었을까? 홍난파는 어째서 세계문학을 꿈꾸는 번역가의 길을 저버렸을까? 우리는 식민지 한국에서 갓 탄생한 전문 번역가의 때 이른 좌절, 나아가 번역이라는 것의 비극적인 운명을 묻고 있는 셈이다.

박진영_연세대학교 비교사회문화연구소 전문연구원.저서 『장한몽』 『번안소설어 사전』 『신문관 번역소설 전집』 『번역과 번안의 시대』 『책의 탄생과 이야기의 운명』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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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5-12-04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