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예술의 풍경

잡지의 얼굴을 그린 화가들

근대 예술의 풍경 2015.11.05 제 09호 잡지의 얼굴을 그린 화가들 안석주와 이주홍
잡지는 얼굴을 가진다. 그것이 표지의 이미지이다.
우리가 얼굴로 사람을 구분하듯이 잡지는 표지의 이미지를 얼굴삼아 자신을 구축한다. 표지와 내부 편집을 포함한 잡지라는 매체의 형식은 문자를 인쇄한 한 덩어리의 종이다발을 개성적 주체로 표상해내어 대중에게 효과적으로 각인시키기 위해서 필요한 일종의 자기 연출이다. 이 자기분장의 핵심에 있는 것이 표지 이미지인 것이다.
풍요로운 매체의 시대인 오늘
풍요로운 매체의 시대인 오늘날 블로그, 페북, 트윗에서 모든 이들은 개인 잡지의 편집자들이다. 사람들은 자기 연출의 매체회로 속에서 이미지와 정보를 끊임없이 생산하고 소비한다. 그러나 걷는 것이 유일한 이동수단이던 시기에 먼 곳에서 드물게 오는 손님이 귀했듯이, 근대기의 잡지들은 발행자와 독자 모두에게 지식 소통의 매체로서 귀한 것이었다. 특히나 일제강점기의 지식인에게 문화적 결핍의 자의식과 발전의 열망에 휩싸여 제작하는 잡지 발행이란, 엄혹한 재정난과 검열 속에서 치러지는 전투와도 같았다. 독자에게 잡지는 최신의 정보와 지식을 받아보는 희귀한 통로였으며, 거기에 실린 이미지들은 ‘미술’로서 독자들을 자극할 수 있었다. 근대기 잡지를 중심에 둔 지식인과 독자들의 상호소통은 뜨거웠다.
독자에게 제시되는 상상계적 동일시의 대상이미지 표지이미지’
무엇보다도 근대의 잡지는 독자를 특정한 주체로 훈육하기 위한 기획을 담고 있었다. 일정한 주체 만들기의 기획 하에 제작되는 표지 이미지는 독자에게 제시되는 상상계적 동일시의 대상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동일시가 효과적으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이미지가 독자들에게 납득될 만한 수위를 가지면서도 동시에 잡지 발행자의 기획을 집약해야 했다. 그것은 한 번에 성공하기는 힘들었다. 때로 독자들은 발행자의 기획에 못 미치거나 그것을 뛰어넘었으며, 무엇보다도 시대는 끊임없이 변해갔기 때문이다.
표지 이미지의 변천사
그런 이유로 표지 이미지는 잡지 발행자들의 기획과 독자들의 욕망 사이를 오가며 매번 달라져야 했다. 예를 들어 근대기 여성계몽을 주도했던 개벽사 발행의 《부인》과 《신여성》의 표지 이미지는 이상적 주체의 기획과 현실적 독자의 가능성을 가늠하며 변모해갔던 양상을 잘 보여준다. 《부인》의 표지에 놓인 쪽진 머리의 ‘구여성’은 곧 여학생 교복의 《신여성》 이미지로 옮겨갔다. 이후에도 모던걸과 정숙한 조선여성을 오갔던 《신여성》의 표지에서 가장 안정적으로 반복되었던 초기 이미지는 바로 석영(夕影) 안석주(安碩柱, 1901-1950)가 그린 아름다운 여학생 이미지였다(사진 1). 대표적인 것이 《신여성》 1924년 11월호의 표지화이다. 우아하게 틀어 올린 검은 머리, 흰 저고리와 검은 치마는 여학생의 복장기호를 드러내며, 금욕적인 마른 나무를 배경으로 먼 곳을 응시하는 눈길은 무언가를 사고하는 성찰의 능력과 근대적 자아의 내면성을 갖춘 여성을 제시한다. 부모, 아이, 남성으로부터 독립된 개인으로 만들어주는 이미지의 격자 안에서 여성은 희고 아름답게 빛나고 있다. 이 가공의 이미지가 당대 여성들에게 얼마만한 동일시의 효과를 발생시켰을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이미지를 비롯하여 안석주가 그린 여성이미지는 《신여성》의 표지를 오랫동안 지켰다.
《신소년》《신여성》
안석주의 활약
이 그림의 화가 안석주는 신문과 잡지의 삽화, 표지화를 다채롭게 생산했을 뿐만 아니라, 소설, 에세이, 시나리오 등의 문학과 시사만화 및 영화제작자로서도 활동했던 근대기의 재주꾼, 다재다능한 팔방미인이었다. 그는 도쿄의 혼고(本鄕)양화학교를 1년 남짓 다니면서 서양화를 배워 귀국했다. 소위 1호 서양화가이자 해방 이후 화단에서까지 영향력을 미쳤던 고희동(高羲東)이나 일본 제전 특선의 영예에 빛나는 김관호(金觀鎬)처럼 서양화가의 최고 학력인 ‘동미(東京美術學校)’를 나오거나 전람회를 통해 화려하게 데뷔하지는 못했지만, 안석주는 “마치 소설이나 희곡 같은 것이 토키영화에게 자리를 내주듯이” 회화예술도 “대중화”해 나갈 시대에 대한 감각을 소유했으며 “민중”을 좌우하는 대중매체의 권력을 일찌감치 깨닫고 있었던 인물이었다. 안석주는 잡지와 신문을 비롯한 대중매체의 문화 콘텐츠를 제작하는 인물로서 평생을 살았지만, 그 자신이 잡지의 콘텐츠로서 소비되는 대상이기도 했다. 《삼천리》 등이 흔히 기획하는 “장안호걸”, “장안의 신사숙녀” 류의 명사 기사에 빠지지 않고 단골로 등장했다. 카페 비너스의 여주인이며 당대 사교계의 마담인 복혜숙(卜蕙淑)이 그를 심훈과 더불어 “입심 좋고 놀기 좋아하고 옷맵시 얌전하고 술 잘 먹고 아무튼 모던 청년신사들”이라고 논평한 것처럼, 세련된 감각에 더해서 매체를 자유롭게 타고 흐르는 재주가 안석주에게는 있었다. 안석주는 결국 가장 첨단의 매체인 영화에 투신하여 <춘풍(春風)>(1935), <심청>(1938) 등을 감독하여 성공을 거뒀다.
930년대 초반 잡지의 표지에서는 가장 혁신적이고 다채로운 이미지를 목격할 수 있다. 특히 사회주의 계열의 소년 잡지의 표지는 그야말로 뜨겁게 불타오르는 ‘프로소년’의 이미지를 내세워 독자들을 계몽했다. 사회주의는 주의해야할 불온사상이 아니라 이제 막 폭넓게 소화되기 시작한 지식과 이념의 첨단 트렌드였다. 《신소년》과 《별나라》와 같은 소년잡지는 다양한 사회주의의 기초 지식과 비판적인 프로문학을 게재했으며, 그 궁극적 목적은 각성된 프롤레타리아로 독자들을 호명하고 훈육하는 것이었다.
《신소년》의 1930년 6월호의 표지에는 곡괭이를 들고 땅을 파는 ‘노동’의 역동적 장면이 그려져 있다(사진 3). 색면을 과감하게 분할한 감각은 모던하고 소년의 움직임은 힘차다.
아동문학가 향파(向破) 이주홍
이 인상적인 표지 이미지를 그린 화가는 아동문학가로 잘 알려진 향파(向破) 이주홍(李周洪, 1906-1987)이다. 안석주가 일본의 미술학교 유학을 한 엘리트로서 심훈과 비교되는 명사였다면, 향파 이주홍은 일본에서 영어학교를 다녔다고는 하지만 자수성가한 무명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이주홍은 소년잡지의 독자로 시작하여 글이 실리면서 등단하고, 편집진의 격려로 잡지 제작에 참여하고 표지화를 그리게 된 독학의 미술가이자 문학가였다. 이주홍은 어릴 적 잡지 표지화를 모델로 삼아 그림 공부를 했다고 회고했다. 그가 표지화를 그린 잡지는 소년잡지로부터 1930년대 후반의 《사해F공론(四海公論)》, 《비판(批判)》을 거쳐 1940년대 전반의 《동양지광(東洋之光)》까지 다양하며, 《풍림(風林)》을 편집 발행하기도 했다. 표지화의 디자인 감각은 작품으로 그리는 회화와는 조금 다른 차원에 있다. 이주홍의 표지화는 고희동, 구본웅(具本雄)이나 이종우(李鍾禹) 등 유학파 서양화가들이 명성에 미치지 못하는 수준으로 그렸던 것과 비교해 오히려 참신하고 세련되었다. 이주홍은 책이나 잡지의 그림이 의외로 “돈이 되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소년잡지를 통해서 성장하고 활동했던 이주홍이라는 인물의 예에서 보듯 근대기 잡지는 편집진과 독자 사이에 또는 지방의 독자 상호간에 소통의 미디어로서 강한 영향력을 가졌다.
18세 당시 이주홍 사진’
노동소년을 내세운 역동적인 표지 이미지에 대한 독자들은 반응은 어떠했을까? “힘 있는 표지”이며 “용감을 느끼게 한다”는 화답이 독자 편지로 소개되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편집진의 선택에 의한 소개이므로 한 번 걸러진 반응이기는 하다. 그러나 1930년대 초반 신문에 보도된 공산소년단 사건의 예가 말해주듯, 특히 북부지방의 소년들에게 사회주의 사상과 그 유토피아적 현재로서 소련의 모습은 강력한 매력을 가지고 파급되었던 새로운 지식이었다. 이렇게 30년대의 소년잡지가 보급한 사상적 토대가 해방 이후의 사회주의 국가 건설 운동을 추동시켰고, 소년들이 반복해서 바라보았던 주체의 이미지는 성인이 된 후의 자기 이미지로 작동할 수 있었다.
근대기 지식인들은 잡지를 통해서 여성의 교육과 계몽을 꿈꾸거나 사회주의적 주체를 육성하려 했다. 안석주가 그린 지적인 여학생과 이주홍이 그린 역동적 노동소년의 이미지는 계몽의 기획과 거대서사로 특징지어지는 근대가 만들어낸 주체의 이미지였다. 현재는 산산이 깨지고 실패한 기획으로서의 사회주의의 흉물스러움, 그리고 갇혀버린 자본주의 폐쇄회로 속의 숨 쉴 수 없는 답답함과 지리멸렬함이 남아있다. 지금 과연 어떤 주체의 이미지가 필요한 것일까. 오로지 얼굴을 지우는 것만이 남은 일일지도 모른다.
서유리_충남대학교 강사. 논문 『한국 근대의 잡지 표지 이미지 연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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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5-11-10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