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연재소설

《거기까지》숨 - 3

<마당을 나온 암탉 />의 황선미 작가의 새로운 청소년 소설 : <거기까지> 숨 - 3<마당을 나온 암탉 />의 황선미 작가의 새로운 청소년 소설 : <거기까지> 숨 - 3

엄마는 메모지만 남기고 출근한 뒤였다.

잠은 집에서 자라.

식탁에 차려진 밥상을 보자 픽 웃음이 나왔다. 휴대폰을 충전하며 밥을 먹는데 내가 휴대폰 신세랑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밥이나 먹으러 들어오는 집. 집밥. 식어버린 국은 데우면 되고 밥은 전기밥솥에 있고 솜씨가 별로여도 어쨌든 먹으면 기운이 난다. 완전식품을 찾아다니는 해리한테도 이게 필요한 거다. 아무리 맛있어도 틈새 김밥이나 시장 해장국이 그걸 채워주지 못한다. 근본적인 문제가 있는 것이다. 나는 이렇게라도 해결하는데 해리는 그럴 수 있는 존재를 영원히 잃었다.

샤워하고 문자를 확인했다. 해리가 보낸 거였다.

화욜 5시 홍대입구역 4번 출구

내 생각 따위가 얘한테는 조금도 중요하지 않은가 보다. 묻지도 않고 이런 문자를 보내는 걸 보면 그래도 된다고 믿게끔 내가 처신을 잘못했나 보다. 어쩌면 저번에 말한 두 가지 부탁 중 다른 하나인지 모르겠다. 첫 번째 부탁은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인정한다. 그런 자리에 같이 가달라고 누구에게 부탁하겠나. 그렇다면 이번에도 꼭 나라야 하는 일일까. 그럴 것 같다. 해리는 그 나이 여자애들과 달리 성숙한 데가 있다.

기하는 답이 없었다.

“안기하. 너는 뭐냐?”

문자를 확인이나 했을까. 그새 휴대폰을 또 바꿨나. 워낙 상식 이상의 인물이라 짐작되는 게 없다. 병원에서 본 걔 엄마가 떠올랐다. 늙고 마르고 궁색해 보였던 아줌마. 그게 우연히 내가 알게 된 기하의 현실이었다.

도진을 무시하고 깔아뭉개고 싶었던 것도 결국 질투심이었을 거다. 나는 기하에게 아무 관심이 없었다. 그냥 싫고 밥맛이고 재수 없는 녀석이었지. 걔라고 내가 좋았을까. 나를 쳐다보던 눈빛을 생각하면 나와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런데 그때는 왜 나를 찾아왔을까. 머리가 그 지경이면 응급실로 가야 된다는 걸 모르지 않았을 텐데. 해리 때문이었나. 난생처음 좋아하게 된 여자가 내 얘기를 꺼내서 꼭지가 돌았나. 아무튼 사정을 알고 나니 나만큼이나 불쌍하다. 진짜 도둑놈이었고. 그것도 보통 도둑인가. 분명히 나쁜 짓을 한 놈인데 감히 엉기지도 못할 수준이라고 생각하니 존경스럽다.

욕하는 병을 가진 윤에다 인터넷을 뒤져서라도 똑똑한 척 구는 도진까지. 그리고 뭐 하나 무사히 넘어가지 못하는 나. 어쩌다 이런 애들끼리 틈새에서 만났을까. 윤 말고는 도진도 기하도 친구라고 생각한 적 없지만 어쨌든 우리는 어울렸고 내 주변에 또래라고는 걔들뿐이다. 아직도 잘 모르겠다. 좋아하지 않아도 친구가 될 수 있는지.

문자를 한 번 더 보낼까 하다 그만두었다. 오든지 말든지 걔가 알아서 할 일이고 나는 내 문제만으로도 머리가 아프다.

화실을 청소하고 그림에 집중했다. 두 시부터 개인교습이 있기 때문에 나는 되도록 그 전에 내 시간을 가졌다. 그동안 조용하게 집중하는 버릇이 생겨서 이 시간에 나는 선생이 주문한 것들을 그린다.

잘해야 손바닥 크기인 이것으로 선생이 무슨 평가를 하는지 모르겠으나 나는 그리는 자체가 좋아서 계속하고 선생은 고개를 갸웃하거나 끄덕이거나 할 뿐이었다. 며칠 전에는 안개가 자욱한 숲 속에 물이 흐르는 그림과 알몸 바비 인형을 주면서 두 가지를 연결해보라는 숙제를 냈다. 자연과 인공물. 평면과 입체. 프린트 이미지와 인형. 도대체 둘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몰라서 옆으로 치워두고 익숙한 그림 그리기에 몰두했다. 선생이 힌트라고 알려준 게 「카드로 만든 집」을 보라는 거였다. 나를 어지럽게 만드는 것들로부터 해방되면 가장 먼저 봐야 될 영화다.

해리에게서 사진 하나가 왔다. 길게 이어진 꽃들과 날개 달린 요정이 매우 정교하게 그려진 거였다. 어디서 본 적도 없고 해리가 그린 것 같지도 않은데 이런 걸 왜 보냈는지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내가 이럴 줄 예상이라도 한 듯 해리가 또 문자를 보냈다. 타투. 나는 찡그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두 가지 의미를 깨닫기도 전에 전화가 왔다.

그였다.

“저녁 때 병원으로 와라. 기다리마.”

그게 다였다. 시종일관 어이없고 이기적인 사람이다. 자기가 오라면 당연히 올 거라는 자신감이 도대체 왜 생겼을까. 내가 자기 마음대로 해도 되는 어린애로 보이시나. 기다리마. 그 말이 아주 거슬린다. 다른 것도 다 정떨어지지만 그 말이 열 배 아니 백배쯤 더 끔찍하다. 높은 자리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말투. 점잖은 어른인 척 구는 목소리. 내 아버지라도 되는 양 명령하는 그 말이 아주 싫다. 아주 귀를 씻어내고 싶을 정도다.

검사 결과가 나왔을 거라는 짐작은 됐다. 나한테는 그까짓 결과 중요하지 않다. 일치든 불일치든 달라질 게 없으니까. 순진하게도 내가 바란 건 그의 고통이었다. 내 존재가 뻔뻔한 그에게 충격이 되기를 바랐고 최소한 양심의 가책이라도 느꼈으면 했다. 그러나 그는 어떤 타격도 입지 않았고 되레 내가 숨이 막힌다. 그가 이렇게 내 숨통을 쥐게 될 줄은 몰랐다. 내 몸뚱이 어디에 자기 권리라도 있는 것처럼 당연하게 명령하고 있지 않은가. 기다리마.

속이 답답해서 밖으로 나왔다.

베네치아로 가기 전에 DVD방에 가서 영화라도 볼까 싶어 편의점에 앉아 검색을 하는데 누가 맞은편 의자로 와서 턱 앉았다. 기하였다. 내 몫의 음료수까지 들고 나온 걸 보면 진작부터 여기 있었던 모양이다.

“생각보다 일찍 나왔네.”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뜻이다. 죄짓고 잡혔다는 애치고는 너무 멀쩡했다. 나는 잠자코 음료수 뚜껑을 따서 마시기만 했다. 여기까지 온 걸 보면 내 문자를 보기는 했나 보다.

“법이 뭐 그래. 학생이라고 막 봐주고.”
“그래야 반성하고 국가를 위해 헌신하지. 나 같은 인재가 감방에서 썩으면 엄청난 국가적 손실이야.”
“아주 웃기고 자빠졌다. 경찰 아저씨 앞에서도 그렇게 말할 수 있냐?”
“경찰 아니고 검찰. 내가 꾸며낸 말 아냐.”
“그럼, 검찰에서 그랬다고?”
“응. 검사님이.”

기하가 한숨을 쉬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얼굴빛이 좋지 않았다. 그동안 겪은 일이 얼마나 괴로웠는지 몰라도 충분히 힘들어 보인다. 다시는 그런 일 하지 않겠다는 서약서와 반성문을 쓰고 풀려났단다. 기소유예. 용서받을 수 있었던 이유가 그동안 그렇게 번 돈을 고스란히 갖고 있었단 사실과 장래가 아까운 미성년자 신분이란다. 갑자기 등이 시큰해지며 땀이 쭉 흘렀다. 나한테 준 돈이 그렇게 번 거였다. 만약 그걸 십 원이라도 내가 썼더라면.

“돈을 왜 그냥 갖고 있었어?”

기하는 음료수만 마셨다. 그러더니 캔을 꽉 쥐어 쭈그렸다. 검찰에서 용서할 만한 이유가 충분히 있었다고 해도 기하는 달라지지 않았다.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대학 등록금 하려고. 엄마도 아프고.”

우리는 잠자코 앉아서 다른 곳을 쳐다보았다. 돈을 다 돌려줬으면 앞으로 기하는 어떻게 될까. 이런 애가 제대로 공부하면 분명히 인재가 될 텐데. 계속 가난하면 또 삐딱해질 거고. 여러 번 어울렸어도 정이 안 가고 도진보다 더 싫은 놈이었지만 참 안됐다. 나만큼이나 불쌍하다.

“내가 돈 많이 벌면 줄게. 등록금, 그까짓 거.”

기하가 킬킬거렸다. 나도 웃었다. 기하가 나한테 찌그러진 깡통을 던졌다. 그래서 나도 깡통을 찌그려 갚아주었다. 우리는 또 웃었고 이내 침묵했다.

“욕쟁이한테 잘 다녀오라고 해. 욕도 영어로 하고, 유명해져서 오라고.”

기하가 의자를 드르륵 밀어내며 일어났다. 나는 기하를 물끄러미 보다 물었다. 전부터 궁금하던 거였다.

“너, 저번에 왜 하필 나한테 왔냐? 머리 다쳤을 때.”

기하가 나를 힐끗 보았다. 그리고 별생각 없다는 듯 툭 말했다.

“친구잖아, 우리.”

기하가 황단보도를 건너고 사람들 속에 섞여 사라지는 걸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쩐지 우리가 더 만날 일이 없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이렇게 우리가 끝났다고. 친구였든 무시하는 사이였든. 만약 우리가 혹시라도 어디선가 만난다면, 그때도 쟤가 공부하고 싶어 하면 나는 아까 했던 말을 지키고 싶다. 친구라고 말해준 보답으로. 꼭 그래서라기보다, 나는 똑똑한 애가 좋다. 그런데 나는 뭘 해서 돈을 버나.

기하 핑계가 아니라도 베네치아에 가야 했다. 펑키 머리가 부르지 않았어도 나한테는 그가 떠나기 전에 해결해야 될 숙제가 있었다. 그는 주방에서 나를 보자마자 앞치마를 벗었다. 그리고 코트를 걸치고 먼저 나갔다. 내가 머뭇거리자 그가 또 명령했다.

“따라와.”

그가 앞서고 나는 서너 발짝 뒤에서 따라갔다. 그는 실내 포장마차로 들어갔고 이번에도 나한테는 묻지도 않고 잔치국수를 시켰다. 그거 안 먹을 거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꾹 삼켜버렸다. 여태 주방에 있었던 사람이 국수가 나오자마자 두세 젓가락에 후르릅 들이키고 젓가락을 놓는다. 나는 이번에도 국수가 다 식어 불어터지도록 손도 대지 않았다.

나는 기회를 보고 있었다. 언제 입을 떼는 게 좋을지. 아무에게도 꺼내지 못하고 가슴에 묻어온 진실이다. 내 죄를 고백하는 자리. 그가 어떤 반응을 보여도 감당해야 되고 설사 나를 죽이려 해도 도망치지 않을 것이다.

“윤한테 들었지? 나도 간다는 거.”

나는 고개만 끄덕였다. 그는 한숨을 쉬었다. 표정이 어두운 게 그다지 내키는 일이 아닌 모양이었다. 틱 장애를 가진 윤에게 유학보다 치료가 필요하다는 걸 나도 아는데 보호자로 따라가야 되는 입장이니 한숨이 나올 만도 하다.

<거기까지 /> 숨 - 3

“로키 산이 멀지 않은 데라고 하더라. 그래서 간다고 했지. 로키 산. 후우! 너, 「록키」라는 영화 본 적 있냐?”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러는 나를 펑키 머리가 빤히 보았다. 문득 그 얼굴이 무섭게 느껴졌다. 영화 얘기 하다 갑자기 바뀐 얼굴이라 나는 긴장해서 침을 덜컥 삼켰다.

“윤이 먼저 떠나고, 나는 좀 있다 갈 거야.”
“……”
“네놈 데리고.”

나는 그를 멍하니 보았다. 모든 게 정지됐고 피가 차갑게 식는 듯했다. 네놈 데리고, 소리가 나를 무섭게 옥죄었다. 드디어 닥쳤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어쭙잖게 고백이라는 걸 하기도 전에 그가 먼저 나를 해결하려고 한다.

저절로 고개가 수그러들었고 나는 초조하게 허벅지에 손바닥만 문질렀다. 너무 겁을 먹은 탓인지 이상하게도 진땀이 나지 않았다. 해리의 그 무표정하던 얼굴이 떠올랐다. 해리와 나는 지나치게 닮았다. 오누이처럼.

“복서가 되고 싶은 적이 있었지. 그날도 친구들이랑 영화 보고 복싱장에 갈 생각이었어. 영빈이, 그날 말야.”
“아, 저기…… 제가요. 영빈이 잘못이 아니라.”
“그래. 영빈이 그 착한 게 무슨 잘못이야.”
“아, 형. 제가 그런 거예요.”

/ 작가소개 /

황선미 작가 사진

황선미(1963~)

소설가

<소설>
『나쁜 어린이 표』 , 『마당을 나온 암탉』 , 『뒤뜰에 골칫거리가 산다』, 『들키고 싶은 비밀』 , 『푸른 개 장발』 , 『과수원을 점령하라』 , 『주문에 걸린 마을』, 『어느 날 구두에게 생긴 일』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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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6-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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