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앉아라.”
나도 모르게 고개가 삐딱해졌다. 그 한마디에 모든 게 다 들어 있었다. 그가 내 존재를 안다. 그 생각이 드는 순간 가슴 밑바닥이 뭉클하더니 아프게 꼬였다. 비위 상하는 말투에 처음부터 반말. 샤워실에서 물을 받으며 아, 아 소리를 내던 그가 떠올랐다. 나는 그가 눈짓으로 가리킨 의자를 무시하고 그를 보기만 했다. 온몸에서 또 찐득하게 진땀이 삐져나오기 시작했다. 그를 똑바로 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내가 먼저 시선을 피하지 않기로 작정하고 들어온 참이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이렇게 보니까 또 다른 사람 같다. 피트니스 클럽의 남자. 진료하던 의사. 그냥 사십 대 남자. 도무지 한 사람으로 연결이 안 된다.
“검사 결과 봤다. 네 입장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겠지.”
부르르 떨렸다. 살짝 어지럼증도 일었다. 아무래도 달팽이관 문제는 언제고 해결해야 될 모양이다. 중요한 순간에 꼴사납게 주저앉지 않으려면.
“제법 머리를 썼다만, 틀렸어. 모근이 없는 머리카락으로는 안 돼.”
그가 침착하게 말했다.
모근. 그 말이 거슬리고 생소하게 들렸다. 그러나 곧 머리카락 끝에 붙은 피지 같은 걸 생각해냈다. 내 몸은 더 떨렸고 머릿속에서 수만 개의 바늘이 곤두서는 바람에 그의 시선을 피하고 말았다. 증거랍시고 들이민 게 아무 소용이 없었다는 거다. 드라마 같은 데서는 머리카락만 있으면 다 되던데. 두 가지 경우만 생각했지 이런 변수가 있을 줄이야.
“널 의심하진 않겠다. 나보다 먼저 집사람이 널 알아봤으니까.”
알아봤다, 소리에 소름이 돋았다. 착각인지 몰라도 그의 모습을 내게서 봤다는 소리로 들렸다. 그런데 최송은이 알아봤으니 의심하지 않겠단다. 그때 스치듯 한 번 보고? 아니면 나 모르게 어디서 훔쳐보기라도 하셨나. 역시 이 집에서는 치과 원장님이 절대적이다. 어쨌거나 이것도 예상 밖. 결국 내 예상은 다 빗나갔다. 저들은 이런 문제로 부부싸움조차 안 하는 모양이다. 결과가 일치라면 당연히 충돌하고, 불일치라도 불화가 생길 거라고 믿었는데. 저런 사람들이 사는 세상은 다른가 보다.
“제대로, 다시 해보자. 머리카락 몇 개만 줘봐.”
그는 여전히 침착했다. 완전히 역공이다. 그가 나를 또 빤히 보았다. 뭐가 저렇게 당당할까. 끝까지 말을 놓는 것도 속 뒤집어지는데 눈도 꿈쩍이지 않는 저 태도. 엄마는 저런 사람 어디를 좋아했을까. 열일곱 살 인생을 송두리째 바치면서.
“중요한 문제잖아. 정확히 해야지.”
그가 일어나 창밖을 보았다. 그렇게 세게 나오면 겁이라도 먹을 줄 아셨나. 기왕 시작했으니 나도 확인을 해야겠다. 머리카락을 잡아 뜯어서 그의 책상에 탁 놓았다. 그리고 뒤도 안 돌아보고 거기를 나왔다.
기죽지 않으려고 용을 썼지만 병원을 나올 때부터 휘청거렸다. 어설프게 그를 잡으려다 머리털 뽑아주고 되레 덜미를 잡힌 기분이다. 드라마든 인터넷이든 함부로 믿을 게 아니다. 선생 말이 맞는 거 같다. 한 번은 제대로 배워야 이런 꼴을 더 안 당하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하필 저 인간 앞에서 바닥을 들킬 게 뭐람.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었다. 화나고 자존심 상하는 것 이상으로 나를 혼란에 빠트리는 감정 때문에 슬프다. 이 감정이 뭔지 모르겠는데 손에 머리에 가슴에 진땀이 흥건할 정도로 자꾸만 울고 싶어졌다. 하지만 울 수가 없다. 그래서 힘들었다. 하필이면 펑키 머리가 생각나서 더 힘들었다.
집으로 가고 싶지 않았다. 엄마를 보면 우리가 얼마나 한심한지 아주 명백하게 확인하고 말겠지. 상소리가 입에 붙었고, 돈 벌어서 보란 듯이 사는 게 인생의 목표라지만 임대 아파트도 못 벗어나고, 다른 사람의 미래를 설계해주는 전문가라고 큰소리치면서 정작 자기 인생은 어떻게 못하는 사람이 바로 엄마다. 허구한 날 문제나 일으키고 머리에 든 것도 없고 길거리에서 구르던 나. 그 엄마의 그 아들. 이 열등한 조합에 비해 그들은 얼마나 넉넉하고 이성적이고 안전한가. 생각지도 못했던 열일곱 살짜리가 아들일지도 모른다며 증거를 들이대도 눈 하나 꿈쩍이지 않는다. 아무런 지장도 받지 않는다.
병실에 도진은 혼자 있었다. 모처럼 목욕을 시켜놓고 엄마가 옷 갈아입으러 집에 갔단다. 아버지는 편의점을 지켜야 해서 올 수 없고. 덕분에 나는 보호자용 침대에 누울 수 있었다.
“무. 인생은 이미 결정돼 있을까, 살다가 결정되는 걸까.”
도진의 매가리 없는 목소리가 메마르게 들렸다. 자다가 깨서도 저런 소리를 지껄일 수 있는 애. 태어날 때부터 저렇지는 않았을 텐데 어쩌다 저 모양이 됐을까. 머리에 문자랑 물음표 같은 것만 잔뜩 들었는지 한 번 들여다보고 싶다.
“그냥 자라. 나도 좀 자다 갈 테니까.”
“무. 인생을 선택할 수 있다면,”
“아, 쫌! 시끄러. 그냥 좀 자자고.”
“잠이 안 와. 온종일 자니까.”
“너, 자꾸 그러면 휴대폰에서 확 퇴출이다.”
베개로 얼굴을 덮어버렸다. 베개에 머리 냄새, 화장품 냄새, 약 냄새 같은 것들이 배어 있어서 구역질이 올라왔다. 옆으로 치우고 눈을 감았다. 신경질은 냈지만 도진의 이번 질문은 귓등으로 흘려버리지 못했다. 그와 엄마와 나 때문에 퉁퉁 불어버린 속 어딘가에 그 말이 걸렸다. 인생이라는 게 이미 결정돼 있는 게 아니라 살다가 결정되는 거면 좋겠다. 내 인생을 누가 쥐고 있느냐의 문제니까. 내 인생이면 내가 쥐고 있어야 맞는 거지. 그래야 나 같은 놈도 반성문 쓰고 다시 뭐든 해보지.
어렴풋이 잠이 들었던 것 같다. 내가 먼저 깼는지 도진이 말을 시킨 게 먼저였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잠이 확 깼다.
“기하가 잡혔어.”
나는 그만 일어나 벽에 등을 기댔다. 잡혔다. 걔를 보면 늘 뭔가 찜찜했는데 진짜로 구린 데가 있었다는 거다. 도진이 누운 자세를 겨우 바꾸고 숨을 몰아쉬었다. 아직도 혼자 움직이는 게 힘들어 보인다.
“내가 그렇게 경고했는데도.”
“경고?”
나는 도진을 물끄러미 보았다. 얘들은 내가 짐작도 못하는 걸 공유하고 있었나 보다. 똑똑한 것부터 부정한 어떤 것까지. 그리고 친구라는 것도.
“그때 그, 반전 광고?”
생각나는 게 그것뿐이라 넘겨짚었는데 도진이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체크하듯. 이것도 내 상식을 넘어서는 일이다. 내가 짐작한 거라고는 고작 옥상에서 뛰어내리게 한 것에 대한 소심한 복수였는데. 세상도 사람도 참 복잡하고 어렵다는 걸 또다시 깨달았다. 세상에는 나처럼 단순하게 사는 사람들만 있는 게 아니었다. 아까 그의 태도를 보면서 느낀 벽이 여기에도 있으니.
“걔가 무슨 짓을 했는데?”
“주가 조작.”
나도 모르게 입이 벌어졌다. 이건 또 무슨 헛소리. 말이 되나. 그런 건 어른들 일 아닌가? 열일곱 살 미성년자가 무슨 그런 짓을. 하긴, 기하가 지나가는 말처럼 그런 소리를 하기는 했다. 내가 건성으로 흘려들었을 뿐이다.
“진짜로 그런 걸 했다고?”
“나도 잘 몰라. 증권사 메신저로 조작된 정보 보내고 막 그랬나 봐. 증권사 직원이 이용한 피라미 중 하나였대. 기하 머리 좋잖아.”
“후아……”
머릿속에서 박하사탕이 퍼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손가락을 머리카락 속에 박아 넣고 한참 동안 눈만 끔뻑거렸다. 기하가 공부 잘한다는 말도 사실은 별로 믿지 않았고 주가 조작 소리는 뻥이라고 아예 무시했다. 내가 아는 그 기하가 정말 그런 애였나.
“어른들이 나빠. 학생한테 그런 거 시키고도 뻔뻔하게. 몇 번 그만두려고 했다가 린치 당했대. 그러다 결국.”
“린치? 혹시 저번에 다친 거, 그래서였어?”
도진이 나를 보았다. 머리를 다쳐서 기하가 나를 찾아온 걸 도진은 모르고 있었다. 그럼 그런 일 처음은 아니라는 거다. 그런 걸 해리하고만 연결하려고 했으니.
“그래서, 지금 경찰서에 있는 거야?”
“그건 아닌가 봐. 학생이라.”
“머리 좋고 공부도 잘한다는 놈이 왜 그랬대?”
그때 도진 엄마가 들어왔다. 나는 벌떡 일어나 인사를 했고 우리는 더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다. 도진 엄마는 자기 대신 아들 옆에 있어준 게 고마워서 내 등을 쓰다듬고 손도 잡아주었다. 게다가 뭐라도 좀 먹고 가라며 도시락을 꺼내는 바람에 나는 어정쩡하게 나올 수밖에 없었다.
도진에게서 문자가 왔다.
저번에 왔다 그냥 갔어. 좀 만나봐
거리는 춥고 한산했다. 일용직 노동자들이 피로한 기색으로 종종걸음치고 청소부들이 입김을 하얗게 뱉으며 간밤의 찌꺼기들을 치우고 있었다. 세상이 무너져라 타락하는 밤도 저런 경계를 넘어 다시 살아내야 할 아침으로 이어진다는 게 새삼스레 느껴졌다. 나는 오들오들 떨면서 화실로 갔다. 거기도 춥기는 마찬가지라 믹스커피 세 봉지를 타서 무슨 보약처럼 먹었다. 음식 냄새가 고이지 않게 하라는 당부 때문에 여기서는 컵라면도 못 먹는다. 편의점에라도 들렀다 올 걸, 후회가 됐지만 그냥 소파에 웅크렸다.
잠들기 전에 기하 문자를 찾아보았다. 한참 뒤로 가서야 걔 문자가 있었다. 이제부터 이 번호야. 그것 말고는 그동안 우리 사이에 연락이 없었다. 배터리 충전하라는 메시지가 떠서 간단한 문자만 남겼다.
오늘 5시 베네치아
도진이 뭐라고 했든 내가 걔를 특별히 볼 이유는 없었다. 그래도 부른 건 핑계가 필요해서였다. 베네치아를 장소로 잡은 것도 그랬다. 펑키 머리 때문이었다. 어색하지만 그렇게라도 그를 한 번 보고 싶었다. 어쩌면 이게 마지막 기회일지 모른다. 영빈. 덮어지지도 않고 잊을 수도 없는 문제. 그는 곧 영빈이고 나는 그를 만나야 한다. 다행히 그가 먼저 나를 불렀고 이것마저 놓치면 평생 후회하게 될 것 같다.
문자 알림 소리가 났다. 그리고 잠잠. 나는 꼼짝하지 않았다. 겨우 데운 온기를 놓치기 싫고 어차피 배터리가 나가서 확인도 못할 거다. 보나마나 기하겠지. 그렇게 나도 잠에 빠졌다.
/ 작가소개 /
황선미(1963~)
소설가
<소설>
『나쁜 어린이 표』 , 『마당을 나온 암탉』 , 『뒤뜰에 골칫거리가 산다』, 『들키고 싶은 비밀』 , 『푸른 개 장발』 , 『과수원을 점령하라』 , 『주문에 걸린 마을』, 『어느 날 구두에게 생긴 일』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