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연재소설

《거기까지》숨 - 1

<마당을 나온 암탉 />의 황선미 작가의 새로운 청소년 소설 : <거기까지> 숨 - 1<마당을 나온 암탉 />의 황선미 작가의 새로운 청소년 소설 : <거기까지> 숨 - 1

“졸업장이랑 증서가 같은 줄 알아? 졸업장은 그런 종이 쪼가리랑 비교가 안 되는 뭐가 있단 말이다. 평생 그따구로 살 거 아니잖아. 사회생활도 해야 되고 친구도 있어야 되고.”

“그러니까 가지 마. 거기 친구 없어.”

“사내자식이 친구 없으면 숨이 막히는 거야.”

“숨 안 막혀. 딴 데서 찾으면 돼.”

학교에 애걸하지 말라고 다시 한 번 주의를 주고 나왔다.

날마다 똑같은 말씨름에 질려버렸다. 엄마는 엄마가 되기로 작정한 걸 잔소리로 확인시키려는 모양이다. 내가 진심으로 반성하는 태도를 보이면 학교가 달라질 줄 아는 모양이나 천만의 말씀이다. 경찰서에 내야 될 확인서 문제가 잠잠해진 것 때문에 희망을 접지 못하고 있지만 엄마가 아무리 속을 끓여도 달라질 건 없다.

나라고 패배자로 남는 게 속 쓰리지 않을까. 그러나 결국 무사히 지내지 못했고 똑같은 상황을 반복하고 말았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다. 나보다 더한 애도 있다. 도진. 등이 헐 정도로 누워만 있는 애. 도진이 퇴원하면 같은 학원에 다녀볼까 생각 중이다. 많이 나아졌어도 자기 발로 걷자면 아직도 한 달 이상 있어야 되고 그 뒤로도 물리치료를 꾸준히 받아야 한단다. 힘줄까지 다쳤다나. 아무튼 녀석은 거기까지 갔던 걸 뼈저리게 후회하고 있다. 문자를 몇 번 받아줬더니 내가 자기랑 잘 통한다고 착각하는지 윤이랑 아주 비슷해졌다.

나는 학교 대신 화실에 충성했다. 나한테는 그림이 미래고 학교고 숨 쉴 구멍이고 종교였다. 그것만 할 수 있다면 다른 건 아무래도 좋았다. 그런데 선생은 생각이 달랐다. 결국 언제든 한 번은 공부를 제대로 해야 된다고. 비바람은 그칠 때를 기다려야 하고 폭풍을 피해가는 것도 방법이라고. 내 사정을 어느 정도 알고 나서 해준 이야기다. 그래서 검정고시를 진지하게 생각해보는 중이다.

예상 밖으로 25일이 조용히 지나갔다. 사과 확인서 때문이 아니라도 경찰서에서 무슨 연락이든 올 줄 알았다. 고소인이 뭘 요구했다든지, 잘 마무리됐으니 앞으로 조심하라든지. 나는 그날까지 신경이 곤두서서 뭘 제대로 먹지 못했고 막판에는 걱정 때문에 잠도 못 잤다. 최악의 경우 더 큰 벌도 예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무 연락도 없이 너무 조용하게 지나간 것이다. 이러다 갑자기 생각지도 못한 연락이 올지 모른다는 불안감은 있지만 일단 25일이 지나고 나서부터는 배짱이 조금씩 생기고 있다.

최송은에게 배달된 자료가 이 고요함의 원인인지 아직은 알 수 없다. 만약 그렇다면 이번에는 내가 나비의 날갯짓이 된 셈이다. 예상대로라면 검사 결과가 적어도 두 가지 효과를 낼 거라고 믿었다. 일치할 경우와 불일치할 경우 둘 다 정도에 차이만 있을 뿐 타격을 줄 거라고. 실제로 지난번 방송에 그는 패널 자리에 나오지 않았다.

화실 문 앞에 윤이 있었다.

“우아! 씨바존나새끼……”

<거기까지 /> 숨 - 1

느닷없이 욕을 퍼부으면서도 내 목을 끌어안는 윤. 나도 윤의 큰 덩치를 덥석 안았고 비로소 진짜 친구가 됐다는 확신을 가졌다. 그동안 나만큼이나 얼굴이 못쓰게 됐다. 윤의 엄마 아버지 눈에는 자식이 이렇게 망가지는 게 안 보이나 보다. 휴대폰 없어서 답답하겠다고 하니까 자기가 거절했다고 큰소리다. 그깟 것으로 협박당할 만큼 어린애 아니라고. 문자에 매달려 사는 놈이 보기보다 결단력이 있다. 하기는. 언젠가 집을 나간 적도 있었다니.

“설마 너, 탈출해 온 거 아니지?”

장난으로 한 소리에 고개를 끄덕인다. 베네치아에 간다고 하고 여기로 샜단다. 용감한 게 기특해서 믹스커피 세 개를 털어 진하게 타주었다. 그걸 후후 불어서 코코아처럼 마시며 윤이 웃었다.

며칠 뒤 출국한다고, 미국서 몰래 도망쳐오면 숨겨달란다. 자기 목표는 저번에 탈출했던 지방의 기능 고등학교라나. 백번을 말해도 부모님은 기왕 할 거면 명성 있는 요리 학교 정도는 다녀야 된다고 고집이라 이번에는 져주기로 했다는데, 그 이유가 펑키 머리였다. 요리 공부가 목표인 펑키 머리를 보호자처럼 붙여 보내며 둘 다 공부시키기로 했다는 것. 윤은 아주 엄청난 부모님을 뒀다. 이 소리를 기하가 들었다면. 진짜 걔는 요즘 어떻게 지내는지 모르겠다. 소식통 윤도 휴대폰이 없으니.

“세, 셰프 형이 좀 오래.”

윤은 출국한다는 것도 알리고 펑키 머리 말도 전하려고 온 것이었다. 내색은 안 했지만 그나마 어렵게 마음을 준 친구가 떠난다니 서운했다. 한편으로는 부자에다 부모를 다 가진 윤이 부럽기도 했다. 불현듯 윤과 펑키 머리 사이에 끼고 싶기도 했고. 어떤 목표가 없어도 막연히 이런 기분이 드는데 기하처럼 똑똑한 애 입장에서는 부러움을 넘어 속이 비틀릴 만도 하겠다.

떠나는 윤에게 선물로 전사 그림 하나를 주었다. 사인을 해달라고 해서 어설프게 이름을 휘갈겨주었다. 윤도 웃으며 받았고 나도 장난스럽게 등짝을 두들겨 보냈지만 윤이 복도에서 사라지자 도무지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곧 떠난다고 했다. 붙여 보낸다던데 그게 펑키 머리도 같이 떠난다는 말일까. 기분이 아주 더러웠다. 윤은 친구고 펑키 머리가 내 형도 아닌데 기분이 왜 이럴까. 질투가 난다.

머리를 털고 다시 그림에 집중했다. 마음대로 안 된다. 화집을 봐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수업 시간이 다 돼서 애들이 모여들었고, 나는 거리로 나왔다.

베네치아에 가면 아직 윤이 있을까. 윤을 또 보고 싶지는 않았다. 걔가 싫은 건 아니다. 펑키 머리가 오라고 했다. 오라고 했으니 가볼까. 내키지가 않는다. 찌질한 기분을 또 맛봐야 할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가 나를 얕잡아 본 적은 없었다. 나를 팼고, 카페에서 기다리게 하고 코코아를 사주었다. 비난하지도 않았다. 영빈의 복수 같은 것도 안 했다. 그런데도 나는 알아서 기가 죽었다. 내가 사고치는 걸 막으려고 팼다는 걸 알고 나니까 더 움츠러든다. 예상 밖의 사람이다. 여태까지 나한테는 그런 사람이 없었다. 단 한 번도.

어쩌다 보니 해리의 고시텔까지 왔다. 저 낡은 건물 한 칸으로 새벽에 들어가 잠만 자고 나오는 애. 기타 두 개랑 옷 몇 가지가 전부인 애. 창문도 없는 저 방에서, 겨우 몸 하나 정도인 침대에서 담뱃불 자국을 끌어안고 얼마나 많이 울었을까. 시장으로 분식집으로 완전식품을 찾아다니며 혼자서 살아남아 혼자서 노래하고 혼자서 어른이 된 애. 이제는 가족을 구걸하지 않게 된 애. 내 첫사랑.

갑자기 해리가 보고 싶어졌다. 해리가 노래하는 걸 들어보고 싶다. 그 기특하고 당당하고 특이한 무대를 잘 봐주고 싶다. 아직도 고사리무늬로 얼굴을 다 가렸을까. 이제는 그러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다. 그래야 될 만큼 잘못한 거 없다고. 숨지 말라고.

걷다가 뛰었다. 갑자기 할 일이 생긴 것처럼 굴었으나 본격적인 무대가 시작되려면 아직 멀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블랙콜로 갈 때 이미 알았다. 정작 가고 싶은 곳으로부터 도망치느라 해리 핑계를 댔다는 것을. 지루한 노래가 흐르고 대학생들이 모여서 떠드는 걸 견디자니 고역이었다. 가슴이 답답하고 진땀으로 손바닥이 끈적해졌다. 엉뚱한 곳으로 잘못 온 후유증을 그렇게 확인했다. 펑키 머리. 어쩌다 그가 내 속에 들어와 버렸을까. 영빈만 아니었다면. 그랬다면 마음 놓고 좋아했을 것 같다.

해리 때문에 그나마 눌러앉아 있었다. 무대 화장을 한 채로 해리가 나한테 오자 주변이 조용해지며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여기저기서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나까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보는 게 나는 불편해죽겠는데 해리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오래 못 있어. 무대 준비 덜 됐거든.”

“그럼 들어가 봐.”

“끝날 때까지 있을 거니?”

나는 고개를 저었다. 삐친 건지 웃는 건지 해리 입꼬리가 살짝 움직였다. 그러더니 일어나는 척하며 내 쪽으로 몸을 숙이고 말했다.

“나한테 올 줄 알았어.”

수수께끼 같은 소리만 남기고 해리는 가버렸다. 나는 찡그리며 머리를 긁었다. 저한테 올 줄 알았다니. 역시 여기로 오는 게 아니었다. 뮤. 나랑 가족 할래? 갑자기 그 말까지 떠올랐다. 설마, 같이 살자는 소리는 아니겠지.

더 있기가 싫어서 나와버렸다. 박수 쳐주고 용기를 주고 싶던 마음이 싹 없어졌다. 곧장 문자가 진동했다.

내기했거든. 해리랑 소연이랑. 열흘 안에 뮤가 나한테 온다, 안 온다. 그런데 생각보다 빨리 왔어. 소연이가 이긴 거야. 그래서 결심했어.

봐도 봐도 뭔 소리인지 모르겠다. 도진이랑 기하가 영어로 떠들 때는 내가 무식해서 그랬다 쳐도, 이건 딴 나라 말도 아니고 어려운 말도 없는데 도무지 감을 못 잡겠다. 소연이는 또 누구야. 더스티에 다른 여자 뮤지션은 없던데 누구랑 내 얘기를 했담.

전화가 왔다. 모르는 번호다. 그런데 처음이 아니었다. 클럽에 있는 동안 두 번이나 왔는데 시끄러워서 듣지를 못했다. 혹시 확인서 때문일까. 그런 일을 경찰이 개인 전화로 연락하기도 하나. 무시할까 하다가 혹시 뒤탈이 생길까 봐 받았다.

“여보세요?”

“김무?”

전화를 먼저 해놓고도 저쪽 반응이 늦어서 그만 끊을 뻔했다. 그렇다고 대답해줬건만 또 감감. 순간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다.

“장동혁이다. 알지?”

“……”

“여기 병원인데, 기다리마.”

그러고는 끊었다. 통보나 다름없었다. 나는 휴대폰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이없는 그를 보듯.
기다리마

이건 생각지도 못한 말투다. 이런 식의 말은 도대체 언제 써먹는 걸까. 설마, 내 아버지 노릇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지금이 몇 시인데, 내가 어디 있는 줄 알고 자기 병원으로 오라 마라. 혹시 내 예상이 모두 빗나갔나. 고소인이 사과를 기다리다 못해 화가 치밀어서 이러시나. 어떤 놈인지 낯짝이라도 보고 아예 처넣으려고?

11시가 다 되어간다. 나는 길 건너편 벽에 기대서 그의 병원을 쳐다보기만 했다. 치과도 다른 병원도 다 컴컴한데 가정의학과만 희미하게 불이 켜져 있었다. 기어이 사과받으려고 저러는 거라면 내 혐의에는 괘씸죄라는 게 더 붙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예상이 맞는 거다. 생물학적 친부.

심호흡을 크게 한 번 하고 길을 건너갔다. 병원은 텅 비었고 그의 진료실에만 불이 켜져 있었다. 그는 양복 차림이었고 진료실로 들어서는 나를 아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마치 내가 그런 식으로 들어올 것을 알기라도 한 것처럼 당황하지 않았고 아는 척도 안 했다. 샤워실은 기억 못해도 지난번 자기 환자였다는 건 알았을 텐데.

“앉아라.”

/ 작가소개 /

황선미 작가 사진

황선미(1963~)

소설가

<소설>
『나쁜 어린이 표』 , 『마당을 나온 암탉』 , 『뒤뜰에 골칫거리가 산다』, 『들키고 싶은 비밀』 , 『푸른 개 장발』 , 『과수원을 점령하라』 , 『주문에 걸린 마을』, 『어느 날 구두에게 생긴 일』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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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6-04-22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