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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담는 카메라

파크 라이프

파크라이프
포토그래퍼 ‘소담’이 사진으로 남기는, 소설 ‘파크 라이프’ 감상기.
By sodam
겨우 문 하나 지났을 뿐인데
흙냄새와 풀내음이 콧구멍을 간지른다.
순간적으로 감았던 눈을 치뜨면
근경, 중경, 원경을 이루는 대분수, 녹음이 울창한
나무들, 데이코쿠 호텔이
갑자기 본래의 원근감을 무너뜨리며 반전하여
한꺼번에 시계로 돌진해 들어온다.
무엇 때문인지, 눈물이 솟아오를 때도 있다.
10월 1일, 목요일

출퇴근길에 늘 건너보며 지나다니기만 했던 곳

심호흡 한번 하고
한 발 내디뎌보면

겨우 문 하나 지났을 뿐인데
새로운 세상이 펼쳐진다.
저쪽 편은 분주함의 세계,
이쪽 편은 느긋함의 세계

새로운 세계인 공원에서는, 이곳만의 규칙이 있다.
ABOUT PHOTO
잠시 도시로부터, 일상으로부터 떠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문
#공원 #도시 #휴식
#공원 #벤치 #휴식
왜 모두들 공원으로 올까요.
왜 모두들 공원으로 올까요.
마음이 놓여서겠지.
그렇잖아. 공원에서는 아무것도 안 해도 누구도 책망하지 않아.
오히려 권유나 연설처럼 뭔가를 하려 들면 쫓겨나지.
10월 2일, 금요일

이를테면, 공원엔 가급적 혼자 오기
그리곤 가급적 아무것도 하지 않기
떠들지도 말고, 뭔가에 바쁘게 몰두하지도 말고
오히려 뭔가를 열심히 하려 하면 그것이 눈에 띄는 곳

바로 그 점 때문에 나는 공원을 좋아했는데
바로 그 점 때문에 그는 공원에 있으면 좀이 쑤신다고 했다.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하면 뭔가 하고 싶어서 안달이 나는
사람이었으니까

공원에서 혼자 몇 시간이고 보낼 수 있는 사람과 그럴 수 없는 사람
별로 대단할 것도 없는 차이라고 생각했는데
그와 내가 그만큼 벌어져 이만큼 멀어진 건 아마도-.

그러니까, 그래서인지도 몰라,
말 한 마디 섞지 않고 늘 적당히 떨어져 앉아도
이 공원의 사람들이 왠지 정답게 느껴지는 건

말하자면
공원이라는 틈새 속에 숨은
공범들 간의 은밀한 우정 같은 것
ABOUT PHOTO
말하자면 ‘공원의 맛’을 알아버린 동지들- 그들과의 조용하고
평화로운 시간
끝까지 가봐야 알 수
있는 걸지도 몰라
“잠깐 저것 좀 봐요. 왠지 좀 으스스하지 않아요?”
나는 유리창에 손가락을 갖다 대고
등뒤에 서있는, 처음 보는 여자에게 미소를 건네고
말았다.
주변에 있던 승객들이 일제히 날 쳐다보았다.
“정말 그렇네. 으스스해”하고
그 생전 처음 보는 여자가 아무렇지 않게 내 물음에
대답을 했다.
마치 10년지기 친구와 이야기하는 말투였다.
10월 3일 토요일

정신을 빼놓고서 바보 같은 실수를 저지른 날
평소 같으면 하지 않았을 일을 뭐에 홀린 듯 해버린 날
그래서 자기 전까지 이불 속 발차기를 하며 후회한 날이
있어

하지만
그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순간의 이상함 때문에
절대 하지 않았을
영영 닿지 않았을
아마 알 수 없었을
어떤 새로운 세계가 열리기도 하는 거야

우연과 운명의 글자가 묘하게 닮은 것처럼
그게 실수였는지 실수가 아니었는지는
끝까지 가봐야 알 수 있는 걸지도 몰라
ABOUT PHOTO
충동적으로 하이힐에서 내려와 맨발로 풀 위를 걸었던
그 날의 생경한 감각
#공원 #하이힐 #일탈
#여자 #강아지 #엉뚱함 #상상
오늘 밤에 전화나 한번 해볼까. 생각하며 사진을 찰칵.
아까 스쳐 지나간 스타벅스 컵의 잔상으로 인해
내 눈에는 학창 시절 혼자 뉴욕으로 배낭여행을 가서
생전 처음 들어간 스타벅스 매장 안 광경이 펼쳐지고
코끝에 커피 원두를 가는 향기로운 냄새와 시너먼 향이 감돌았다.
10월 4일, 일요일

꼬리를 흔들며 지나가는 강아지의 모습을 보다가
엉뚱하게도 친구 녀석의 얼굴이 떠올랐다.

자습인지 방과후 활동인지를 땡땡이치고
공원 에서 빈둥거리던 어느 날의 오후.
녀석이 흥얼거리듯 무심하게 내뱉었던 말.

난 공원에서 개를 보는 게 참 좋아.
귀여운 개를 보고 활짝 웃으면서 아이고 예쁘다, 귀엽다 해도
아무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잖아. 오히려 흐뭇하게 같이 웃지.
근데 길에서 예쁜 여자를 보고 아이고 예쁘다 하면서 활짝 웃어봐,
그럼 당장 미친놈 소리를 들을걸.

하,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무슨 소리긴, 그렇다는 거지.
마음껏 예쁘다- 할 수 있어서 좋다고. 아이고 예쁘다!

이렇게 문득 산책길에서 만난 옛 친구의 기억.
그 녀석, 잘 지내고 있나.
요즘도 아이고 예쁘다, 하며 잘 지내는지
오늘 밤에 전화나 한번 해볼까. 생각하며 사진을 찰칵.
ABOUT PHOTO
예쁜 여자가 예쁜 강아지를 데리고 오면 어떻게 될까 엉뚱한 상상을 해보기도 하고
더 멀리 가고 싶어서
잠시 쉬어가는 것처럼
늘상 서로 붙어 있으면 집사람이 숨막혀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난 침실로 들어와서 책을 읽는다고.

함께 있고 싶지 않은 게 아니야.
함께 있고 싶으니까 이 방에서 저 방으로 옮겨다니고
있는 거지.
10월 5일, 월요일

서로를 더 잘 사랑하기 위해서
지켜야하는 거리가 있다는 걸
그때의 난 이해하지 못했지

어쩌면 공원에서의 시간도 그런 거야,
더 멀리 가고 싶어서 잠시 쉬어가는 것처럼
더 잘 말하고 싶어서 잠시 침묵을 지키는 것처럼
ABOUT PHOTO
둘이 함께라는 자연스러운 풍경을 만들기 위해 놓아야
하는 거리, 붙잡아야 하는 끈
#포토에세이 #공원 #커플
#공원 #할머니 #손자
처음으로 생각했었던 그 때
오래 전 그 날
두꺼운 플라스틱제 합판에 ‘눈을 뜨고 한 발을 들고
서시오’라 쓰여 있고 그 밑에는 연령별 평균치를
나타내는 꺾은선 그래프가 그려져 있었다.
20대엔 100초 가까이 버틸 수 있는데
70대에 가서는 겨우 15초 라네요
이렇게 줄어든 것만큼 다른 뭐가 늘어나면 좋겠지만
말이오.
10월 6일, 화요일

공원에는 말하자면,
우리의 과거와 현재, 미래가 모두 전시되어 있는 것
같다고

어린 손자의 손을 잡고 나와서
흐뭇해하는 할머니의 눈빛을 볼 때면
어쩐지 이상한 기분이 든다고
인생의 시작과 끝이 동시에 존재하는 모습이 괜히
서글프다고
내가 말했을 때

하지만 저 둘 중에 누가 더 시작과 가까울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라고 네가 그렇게 말했던 그 때

뭔지는 잘 몰라도 조금은 안심이 됐던
조금은 덜, 겁내게 된 그 때
나의 미래에 네가 있어주면 좋겠다고
처음으로 생각했었던 그 때
오래 전 그 날
ABOUT PHOTO
한 장의 사진에 담을 수 있는 세월의 길이는 얼만큼 일까
안녕, 낯선 사람
당신도 나와 닮았군요
아무것도 숨기고 있는 건 없다니까
어쩌면, 자신에게는 숨길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필사적으로 숨기고 있는 건 아닐까
10월 7일, 수요일

공원에 혼자 앉아
입술은 앙다물고
시선은 내리깔고
나에게 신경 쓰지 마세요
나는 지금 바빠요
라고 온몸으로 말하고 있는
그런 사람들을 보면
다가가 인사를 하고 싶어져

안녕, 낯선 사람
당신도 나와 닮았군요

그래서 혹시 그 사람이 웃기라도 한다면
분명 자기자신조차 몰랐던
아주 근사한 미소를 지을 텐데
ABOUT PHOTO
혼자 시간을 보내는 사람의 단단한 의젓함, 하지만 가끔은
모르는 척 다가가 깨뜨리고 싶을 때가 있다
#공원 #휴식 #혼자만의시간
#공원 #여행 #모험
망설이지 말고
일단 한번 가볼까
요즘은 우다가와 부부댁의 널찍한 부엌에서 요리를 자주
만든다.
미즈호 씨가 써놓은 듯한 손 글씨 레시피를 순서대로 따라
만드는데,
그 메모에는 요리 이름은 없고 단지
1 양파는 잘게 썰고, 생강은 다진다
2 볼에 다진 닭고기와 미소를 넣고 끈적끈적 끈기가 생길
때 까지 뒤적이며 완전히 섞는다 는 식으로
만드는 방법만 쓰여 있어서
내가 뭘 만드는지 실제로 마지막까지 완성해보지 않으면 알
수가 없었다.
10월 8일, 목요일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늘 돌던 코스에서 살짝 옆으로 샜다
낯선 길이라도 씩씩하게 헤매다 보니
새로운 경치를 발견하고
뜻밖의 지름길을 발견하고
결국 내가 출발했던 곳으로 다시 되돌아온다

공원 안내도 앞에 서서 궤적을 그려보니
마치 처음부터 의도했던 것 같은 근사한 산책코스

그러니까, 겁내지 말고
망설이지 말고
일단 한번 가볼까
ABOUT PHOTO
아무리 막막해도 뒤를 돌아보면 언제나 지나간 곳은
길이 되어 있다
#수줍게 #마음 #오늘 #커피
당신도, 그런가요?
난 말이야, 이 공원에서 이상하게 신경이 쓰이는 사람이 두 명있어.
그 중 한 사람이 바로 그쪽이야.
이런 말 하면 실례인 줄 아는데,
아무리 보고 있어도 왜 그런지 싫증이 나지 않아.
10월 9일, 금요일

우연이 세 번 겹치면 필연이래요…
같은 상투적인 말을
잠시 연습해 봤다가도

그냥,
당신이 참
매일 같은 자리 같은 시간에
우연히 마주치는
당신이 참
궁금해요
알고 싶어요
당신도, 그런가요?
ABOUT PHOTO
수줍게 건네고픈 마음을 살짝 담아서, 오늘은 그 사람의 것까지 두 잔의 커피
내일도 공원에서 만나요
왠지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주위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저기요!’하고 그녀를 불러 세웠다.

‘저기, 내일도 공원에 꼭 오세요!’
10월 10일, 토요일

도시와는 다른 속도로
잠시 멈추거나 앉아서 쉬었기에
비로소 발견할 수 있게 된 것들

이를 테면
잊고 있었던 그 친구의 얼굴 같은
기억 저편에 묻었던 그와의 순간들 같은
미처 보지 못할 뻔 했던 그 사람의 앉은 자리 같은

공원의 나무가 진짜 숲이 아니어도
공원의 호수가 진짜 바다가 아니어도
공원의 바위가 진짜 산이 아니어도
그러면, 좀 어때

회색 빛 도시의 시간을 그럭저럭 견딜 수 있게 해주는
아주 사소한 주문,

내일도 공원에서 만나요
ABOUT PHOTO
도시와 공원, 일상과 휴식, 나와, 우리
#공원 #풍경 #도시 #휴식
파크라이프 저자 / 요시다슈이치
바쁘고 분주한 도시에서 그나마 휴식이 허락된 곳, 이라고 한다면 역시 공원이겠지요. 다소 인공적으로 배치된 나무와 벤치들 사이에서 비슷한 복장의 샐러리맨들이 삼삼오오 모여 쉬는 모습이 때론 조금 기묘하긴 해도 그것이 ‘21세기적인 여유’의 모습이 아닌가 싶어요.
‘파크 라이프’에는 특별한 이야기가 없습니다. 도쿄의 히비야 공원이라는 공간을 중심으로 한 샐러리맨 남자의 이런저런 일상, 뒤죽박죽인 생각들을 나열하고 있을 뿐이지요. 공원에 가면 우리도 흔히 그러는 것처럼요.
파편적이고 피상적인 도시 생활을 가볍게 스케치 하는 척 하면서도, 낯선 이에게 ‘내일도 공원으로 와주세요’라고 외치게 되는 기적 같은 순간을 별 일 아니라는 듯이슬쩍 보여주는 귀여운 구석도 있는 소설입니다.
이 책을 덮는 순간, 견딜 수 없이 공원에 가고 싶어지실 거에요. By sodam
사진
프로젝트 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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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5-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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