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영화의 전후사정

동주, 한국인이 가장 사랑한 시인 윤동주

그 영화의 전후사정 -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 윤동주
그 영화의 전후사정 -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 윤동주

시간의 한 부분을 떼어 내 보여주는 영화는 시간의 기록인 역사 속에서 소재를 찾곤 합니다. “그 영화의 전후사정”에서는 영화의 소재가 되는 주요 사건의 원인과 그 후의 이야기를 통해 역사를 전후 맥락으로 이해하고 역사를 균형 잡힌 시선으로 바라보게 도와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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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속으로

  • 영화[동주]
  • 영화 [동주]는 이름, 언어, 사랑, 꿈, 모든 것이 허락되지 않았던 일제강점기의 시인 윤동주의 삶을 다룬 작품입니다.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으로 불리는 윤동주가 세상을 떠난 지 71년이 지났지만, 그를 다룬 영화가 만들어진 것은 이번이 처음인데요. 무심한 흑백 화면으로 펼쳐지는 삶 위에 때때로 읊어지는 그의 시 덕분에, 영화적 각색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윤동주를 만나게 됩니다.

# 프롤로그. 취조

  • 취조를 받고 있는 동주
  • 일본 형사에게 취조를 받고 있는 동주
  • “히라누마 도쥬, 송몽규는 언제부터 알고 지냈지?”

영화 [동주]의 시작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일본 형무소에서 형사에게 취조를 받고 있는 윤동주. 두 사람의 처지는 다르지만 건조하고 낮은 목소리, 무표정한 얼굴은 같습니다. 형사는 함께 끌려온 송몽규의 독립운동 전력을 열거하며 윤동주를 공범으로 몰아갑니다. 강압적인 심문. 윤동주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대답을 반복하지만, 형사는 그가 쓴 시들을 내던지며 다시 윤동주를 사상범으로 추궁합니다. 영화는 심문을 받는 윤동주의 모습에서 과거의 윤동주로 거슬러 가며 본격적으로 전개됩니다.

# [동주] 줄거리

  • 취조를 받고 있는 동주
  • 독립운동 중 수감된 몽규를 찾아간 동주

[동주]에는 또 다른 주인공이 있습니다. 바로 윤동주의 친구이자 외사촌형제인 송몽규입니다. 평생 가장 가까운 벗이자 라이벌이었던 인물이죠. 송몽규는 1917년 9월 28일 생, 윤동주는 12월 30일 생. 같은 집에서 석 달 차이로 태어나 자의 반, 타의 반 생애를 함께했습니다. 송몽규 덕분에 영화 속 윤동주는 보다 인간적인 모습을 드러내는데요. 명동촌 시절, 생각지도 않았던 신춘문예에 덜컥 당선된 송몽규를 보며 남몰래 괴로워하는 장면이 인상적입니다. 시인을 꿈꾸는 청년 윤동주에게, 뛰어난 재능을 가졌으면서도 시대를 바꾸기 위해 문학을 이용하고 거침없이 행동하는 청년 송몽규는 도저히 넘을 수 없는 존재죠. 창씨개명을 강요하는 혼란스러운 나라를 떠나 두 사람은 함께 일본 유학길에 올랐지만, 이후 송몽규가 더욱 적극적으로 독립 운동에 매진하게 되면서 오직 시로써 시대의 비극을 아파하던 동주와의 갈등은 점점 깊어집니다. 하지만 송몽규의 대사처럼, 그 둘의 행동에는 모두 각자의 “이유와 목적”이 있습니다.

# 에필로그. 마지막 취조, 그리고 죽음

  • 수감된 독방의 작은 창문으로 별을 보는 동주
  • 수감된 독방의 작은 창문으로 별을 보는 동주
  • “이 시대에 태어나 시인이 하고 싶었던 내가 너무 부끄러워서… 그래서, 나는 못하겠습니다.”

영화에는 동주를 사랑한, 혹은 동주의 시를 사랑한 두 여인이 등장합니다. 연희전문학교 시절 윤동주의 첫사랑 이여진, 일본 유학시절 윤동주에게 영국에서 시집을 낼 것을 주선하는 후키다 쿠미인데요. 가상의 인물이지만 ‘언어를 빼앗긴 시인’의 시작(詩作) 욕망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장치입니다. 영화는 동주가 후키다 쿠미에게 시집의 제목을 적어주고 그 자리에서 체포되는 안타까운 장면에서, 곧바로 마지막 취조 장면으로 교차됩니다. 동주는 결국 형사가 원하는 대로 ‘범죄’를 인정하는 서류에 서명을 하고, 매일 정체불명의 주사를 맞으며 죽음을 맞습니다.

서시

前後事情

윤동주의 유해는 북간도 용정 동산의 중앙장로교회 묘지에 안장되었습니다. 오랫동안 우리가 찾아갈 수 없던 곳에 외롭게 남겨져 있었던 것이죠. 하지만 대신 그의 시가 많은 이들에게 읽혀지고, 사랑받았습니다. 윤동주의 시는 해방 후 1948년 1월, 연희전문 시절 절친한 벗이었던 강처중이 출간했는데요. 화려한 미사여구 대신 일상을 담백하게 써내려간 시를 통해, 윤동주는 한 치 앞의 미래가 보이지 않았던 칠흑 같은 시대에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봤습니다. 일제강점기에는 윤동주, 송몽규 뿐 아니라 수많은 청춘들이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떤 태도로 살아갈지에 대해’ 고민했습니다. 새로운 세상,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에 펜과 칼이 그들의 희망이 되었던 것입니다. 윤동주에게는 늘 함께 하면서도 항상 자신보다 뛰어난, 시대에 정면으로 맞서는 송몽규에 대한 열패감, 질투심과 열등감이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서정이 허락되지 않은 시대에 총을 들고 저항하지 않는, 시인이 되고 싶었던 윤동주는 정말로 ‘부끄러운’ 사람일까요. 시대를 살아내는 자세는 각자의 선택에 따른 것입니다. ‘옳고 그른’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을 보여주는 윤동주와 송몽규의 삶이 또 다른 역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묵직한 고민거리를 던져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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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시작되면 지난 역사도 함께 시작된다

윤동주의 소년시절
  • 윤동주의 소년시절
  • 암울한 시대 민족교육의 거점인 명동촌에서 태어나다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습니다. 우리 민족이 역사상 가장 깊고 아픈 상처를 입은 일제강점기가 시작된 것입니다. 그들만의 독특한 식민지정책을 추구한 일본제국주의. 바로 극단적인 사회, 경제적 수탈과 함께 실시된 민족 말살정책인데요. 윤동주는 이 ‘말살되어야 할’ 민족으로, 1917년 12월 30일 중국 길림성 화룡현 명동촌에서 태어났습니다. 1919년 3.1운동 이후 대한국민회 조직과 봉오동, 청산리 등지의 치열한 독립전쟁에서 명동학교 출신들이 보여준 활약상에서 알 수 있듯 명동촌은 수많은 민족 지사를 배출한 북간도 민족교육의 거점이었습니다. 윤동주의 아명은 ‘해처럼 빛나라’는 뜻으로 아버지가 지어준 해환(海煥)이었는데요. 윤동주의 아우인 일주에게는 달환(達煥), 그 밑의 동생에게는 별환이라는 아명이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자식들 이름에 ‘해’ ‘달’ ‘별’을 차례로 붙여주었던 것이죠. 내일이 없는 시대에도 시인이고 싶었던 윤동주의 서정은, 이렇게 어린 시절부터 숙명적으로 새겨졌는지도 모릅니다.

    • 윤동주와 후배 정병욱
    • 연희전문학교 시절, 윤동주와 아끼던 후배 정병욱

    한국어말살정책과 시인의 고뇌

    1930년대, 일제는 한국어를 말살시키는 것을 민족말살의 모체로 보고 일상 생활에서의 한국어 사용을 금지했습니다. 1938년 2월 광명중학을 졸업한 윤동주는 의과 진학을 권하는 아버지의 만류를 뿌리치고 연희전문 문과에 입학했는데요. 당시 일제는 한국어로 간행되는 신문과 잡지에 탄압을 가했고, 끝내 1940년에는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 모든 한국어 신문이, 1941년에는 [문장], [인문평론] 등 모든 한국어 잡지들이 폐간됐습니다. 엄혹한 시대를 바라보는 젊은 시인의 고뇌와 번민은 깊어가고, 윤동주는 한 때 절필을 선언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졸업반이 되는 1941년, 그는 이 모든 무거운 것들을 승화시킬 것을 결심한 듯 다시 시를 쓰기 시작합니다.

    • 윤동주의 달을쏘다
    • 신문에 개제된 윤동주의 시 ‘달을 쏘다’

    창씨개명, ‘히라누마 도쥬’로 살아야 했던 윤동주

    같은 시기, 한국인의 성명을 없애고 일본식 이름을 짓도록 하는 ‘창씨개명’이 강행됐습니다. 이에 응하지 않은 한국인은 학교 취학, 직장 채용 금지는 물론 경찰관주재소로 호출해 무기한 구류됐습니다. 한국인의 성명을 가지고 삶을 영위해 나가는 것이 불가능해진 것입니다. 윤동주는 갈등 끝에 ‘일본의 이름을 가지고, 일본의 대학에서’ 본격적으로 문학을 공부해 볼 것을 결심합니다. 1942년 3월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릿쿄대학 문학부 영문과에 입학했다가, 한 학기만인 그 해 10월 쿄토의 도지샤대 영문과로 전입학 했는데요. 도지샤대학은 윤동주가 가장 좋아한 시인 정지용이 다녔던 학교로, 전시체제하에서도 비교적 자유로운 학풍을 가지고 있어 비교적 안정적인 유학생활을 보장해 주었던 곳입니다. 하지만 1943년 7월, 방학을 맞아 고향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던 중 윤동주는 송몽규와 함께 갑작스럽게 일본 특고경찰에 체포됩니다. 조선인 유학생을 독립과 민족문화의 수호를 선동했다는 죄목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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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는 끝나고 역사는 계속된다

    • 윤동주의 판결문
    • 윤동주의 판결문

    친구 송몽규와 함께 항일독립투쟁에 가담하다

    1940년대에 들어서면서 패전 위기에 처한 일제. 그들은 전쟁지속을 위해 한국의 인력과 물자 징발에 총력을 기울이는 한편, 국민의용대를 편성해 비협조적인 한국인에 대해 가혹한 탄압과 대규모 검거를 단행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민족운동이 정지된 것처럼 보이던 이 시기에도 청년학생은 무수한 지하 서클들을 결성해 항일독립투쟁을 전개했습니다. 윤동주와 송몽규도 그들과 같은 길을 택했던 것으로 보이는데요. 두 사람은 1944년 3월과 4월, 쿄토지방재판소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각각 징역 2년의 형을 선고 받고, 후쿠오카형무소로 이감됐습니다.

    • 현재 중국 연길 용정에 있는 윤동주의 묘
    • 현재 중국 연길 용정에 있는 윤동주의 묘

    정체불명의 주사와 윤동주의 죽음

    윤동주는 그로부터 1년 뒤인 1945년 2월 16일 원인 불명의 사인으로 29세의 생을 마감했습니다. 윤동주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아버지 윤영석과 당숙 윤영춘이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송몽규를 면회했을 때, 송몽규는 피골이 상접한 모습으로 “감옥에서 정체불명의 주사를 놓아 이 모양이 되었다”는 증언을 했다고 합니다. 송몽규 또한 20일 남짓 지난 3월 7일 윤동주의 뒤를 따라 옥중 순국했는데요. 지금까지도 윤동주와 송몽규의 죽음이 일본의 ‘생체실험’ 때문일 것이라는 의혹이 사라지지 않고 있습니다. 1933년 만주 하얼빈에 설치되었던 관동군 산하 세균전 부대, 일명 731부대에서 자행된 인류 역사상 전례가 없었던 참혹한 생체실험이 그 실체를 드러내면서 구체적인 정황이 추측되고 있는데요. 통나무라는 뜻의 ‘마루타’라 이름 붙인 희생자는 최소 3,000여 명으로 추정되며, 2005년 [731문제 국제 연구센터]에서 공개한 증거 문서에 따르면 마루타 희생자 중 조선인으로 밝혀진 이들은 모두 항일운동가였습니다.

    김서경 작가 (KBS 『남북의 창』, 『역사저널, 그날』 등)
    일러스트
    장홍탁
    스틸컷제공
    메가박스㈜플러스엠, 윤동주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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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2016-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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