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영화의 전후사정

사도, 왕의 콤플렉스가 낳은 비극

그 영화의 전후사정 - 왕의 콤플렉스가 낳은 비극, 사도
그 영화의 전후사정 - 왕의 콤플렉스가 낳은 비극, 사도

시간의 한 부분을 떼어 내 보여주는 영화는 시간의 기록인 역사 속에서 소재를 찾곤 합니다. [그 영화의 전후사정] 에서는 영화의 소재가 되는 주요 사건의 원인과 그 후의 이야기를 통해 역사를 전후 맥락으로 이해하고 역사를 균형 잡힌 시선으로 바라보게 도와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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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익 감독의 [사도]는 조선왕조 제21대 왕인 영조와 그의 아들 사도세자의 비극적인 이야기를 다룬 영화입니다. 왕이 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인 사건인 ‘임오화변’은 여러 차례 다양한 매체를 통해 만들어졌습니다. 2015년 영화로 찾아온 [사도]는 탄탄한 연출력과 훌륭한 배우들의 연기력으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 역사적 사건을 재현합니다. 철저한 고증을 통해 가장 생생한 모습의 사건 정황과 인물들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영화 [사도]의 시작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영화는 요란한 무속 음악과 함께 시작됩니다

  • 마치 무덤에서 깨어난 듯이 관 뚜껑을 열고 일어선 사도세자는 칼을 들고 수하들을 거느린 채 영조의 침전을 향합니다. 하지만 어떤 영문인지 침전 바로 앞에서 행동을 멈춘 사도세자. 이 같은 사도의 돌발 행동에 혜경궁 홍씨는 세손의 안전을 위해 사도세자의 어머니인 영빈 이씨를 찾아가 눈물로 호소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경희궁 침전 안, 융복으로 갈아입는 영조 뒤에 엎드려 흐느끼는 영빈은 말합니다.

# 프롤로그. 영빈 이씨의 고변

  • 어젯밤에 있었던 일을 세자의 어미인 제가 아뢰는 것은 오로지 전하의 목숨을 지키기 위함이옵니다. (...) 하오나 세자가 그리한 것은 마음의 병 때문이니,
    처분은 하시되 은혜를 베푸시고, 세손만은 보존하게 하소서.”

영빈은 아들의 잘못에 대한 형벌을 왕에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누군가에 의해 멈춰져야만 했던 이 비극은 결국 영빈 이씨의 고변을 통해 구체화 되어 ‘아들의 기이한 죽음’이라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 [사도] 줄거리

영조는 자신을 죽이려 한 아들인 사도세자에게 칼을 던져주며 말합니다. “자결하라.” 이에 억울함을 느낀 사도세자는 자결을 시도하지만 사도세자의 죽음으로 자신들의 위치가 달라질 불안함을 느낀 노론과 소론에 의해 저지되고 맙니다. 자결을 명령한 영조는 임금의 대리청정까지 한 위치에 있던 사도세자를 죄인으로 만들 수 없었습니다. 참수 외에 다른 방법을 쓰기 위해 영조는 떨리는 목소리로 ‘뒤주’ 를 가져오라는 명을 내립니다. 햇빛이 뜨거운 한 여름에 뒤주에 갇혀 사도세자는 먹지도 마시지도 못합니다. 작은 뒤주 속에서 사도세자가 버틸 수 있는 시간은 8일 뿐이었습니다. 뒤주에 갇혀 온 몸이 굳어졌고 외롭게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영조가 41세에 얻은 늦둥이였던 사도세자는 누구보다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싶었고, 노력했습니다. 사도세자가 바란 건 임금도 아니고 권력도 아닌 아버지의 따뜻한 눈길과 말 한마디였습니다. 하지만 완벽한 왕이었던 영조에게 사도는 왕위를 잇기에 너무나 부족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아버지일 수밖에 없었던 영조는 자식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생각할 사(思), 슬퍼할 도(悼), 사도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긴 세월이 흐른 후, 영조는 손자인 정조의 요청으로 사도세자의 기록을 지워주며 마음의 무게를 덜고 슬피 웁니다. 영조가 세상을 떠난 뒤 즉위한 정조는 혜경궁 홍씨의 회갑잔치를 화성 행궁의 봉수당에서 열고, 어머니 앞에서 아버지를 기리는 한바탕의 춤을 춥니다.

# 에필로그. 정조의 회상

  • “허공으로 날아간 저 화살이 얼마나 떳떳하냐.”

정조는 감회에 젖어 아버지의 말을 회상합니다. 마치 왕위 따위는 관심 없다는 듯한 사도세자의 대사를 뒤이어 영조·정조 시대의 화려한 의궤들이 펼쳐지며 그 위로 엔딩 크레딧이 만인소처럼 흘러갑니다. 영화는 이렇게 끝이 납니다.

前後事情

아버지와 아들의 갈등과 파국을 그린 영화 <사도>. 비천한 출신으로서의 콤플렉스, 선왕을 독살하고 즉위했다는 의혹, 언제든 왕의 자리에서 쫓겨날 수 있는 불안감 속에서 왕위에 오른 영조와 아버지보다 더한 정신질환을 앓았던 아들. 결국 사도세자의 비극적인 죽음으로 절정에 달한 이 비극은 슬픈 기억을 안고 살던 손자 정조에 이르러 마무리 됩니다. 3대에 걸친 비극의 사슬을 정조의 손으로 끊은 것입니다. 정조가 조선사에 뛰어난 왕으로 기록될 수 있었던 이유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아버지를 죽인 할아버지와 할아버지를 죽이려 한 아버지라는 불명예를 극복하지 않고는 제대로 된 왕의 권위를 세울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영조와 사도세자 모두 가지지 못한 권위를 정조 때에 와서 가지게 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영화는 과거에 대한 청산과 정리를 통해서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정체성을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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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시작되면 지난 역사도 함께 시작된다

  • “ 천해요? 그럼 천한 저를 임금으로 만든 분이 대비시니 이 참에 제자리도 가두십시오! ”

영조는 콤플렉스를 지니고 왕이 되었다

영화 속 영조(송강호)는 인원황후(김해숙)이 내원 문소원(박소담)에게 천한다는 말을 하자 발끈해버립니다. 내원에게 눈독을 들이고 있던 마음이 들켜서 일 수도 있지만 진짜 이유는 영조의 정통성과 관련이 있습니다. 영조(1724-1776)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버지이자 사도세자의 할아버지인 숙종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숙종은 본인의 치적보다도 왕후와 후궁들의 싸움으로 더 유명합니다. 인현왕후와 장희빈이라는 두 여자의 대결이 바로 그것입니다. 두 여인의 그림자에 가려져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 싸움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영조의 어머니인 숙빈 최씨입니다. 대결의 틈바구니 속에서 살아남아 세자까지 낳은 최숙빈의 출신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궁중 노예인 무수리 출신이라는 것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중전도 아닌 후궁, 그것도 천한 무수리 출신의 어머니에게서 난 왕자. 그것이 영조의 평생을 쫓아다닌 꼬리표였습니다.

  • “ 경종대왕을 독살한 당신이 어찌 왕이란 말이오! ”

힘겹게 왕이 되다

영화에서 나주벽서 역모사건 관련하여 죄인들이 영조(송강호)에게 저주를 퍼붓는 장면이 나옵니다. 죄인들은 역모를 일으킨 이인좌가 반란을 일으킨 이유를 영조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영조는 출생뿐만 아니라 왕위에 오르는 과정도 험난했습니다. 숙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것은 장희빈의 아들이었던 경종이었습니다. 원래부터 몸이 약했던 경종은 즉위 4년 만에 죽고 맙니다. 그런데 이 경종의 죽음을 둘러싸고 독살설이 퍼지게 된 것입니다. 연잉군(훗날 영조)이 한의학적으로 경종의 상태와 맞지 않는 특정 음식을(게장과 생감, 인삼과 부자 등) 올렸다는 기록 등은 정황상으로 독살설의 중심에 영조가 있었으리라는 추측을 가능하게 합니다. 이후 의혹의 눈초리 속에서 즉위할 수밖에 없었던 영조는 집권 초기 백성의 신망을 잃었고, 이를 빌미로 전국적으로 역모사건들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비천한 출신 성분에 경종의 독살설까지, 영조는 위태로운 상태로 왕위를 이어가게 됩니다.

  • “ 밖에서 입은 옷은 반드시 갈아입고, 불길한 말을 들으면 양치 후 귀를 씻고, 부정을 태운 후 방에 든다. 좋은 일에는 만안문으로 흉한 일에는 경화문으로 드시니라 ”

괴팍한 아버지와 삐뚤어지는 아들로 만나다 (1735)

영화 속 영조의 총관후궁인 영빈 이씨는 혜경궁 홍씨에게 영조의 예민함을 설명합니다. 왕위를 지켜내야 하는 압박감은 영조의 성격을 괴팍하고 철두철미하게 만들어갑니다. 아니 어쩌면 원래 그런 그의 성격이 그를 가장 긴 재위 기간의 왕으로 만든 건지도 모릅니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기이한 징크스들은 그런 영조의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41세에 얻은 늦둥이 세자에 대한 기대감은 삐뚤어진 방식으로 표현되곤 했습니다. 그로 인해 유달리 활달한 정도였던 사도세자의 정신 상태는 갈수록 괴팍해져 갑니다. 삐뚤어진 아버지에 의해 삐뚤어진 아들, 두 사람의 대립은 영빈 이씨와 혜경궁 홍씨를 비롯한 궁궐 사람들을 모두 혼란 속으로 몰아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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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끝나고 역사는 계속된다

  • 내가 니 애비의 기록을 지워주는 것은 너와 이 나라의 미래를 위함이다.누구든 니 애비를 왕으로 추승하겠다는 제안은 이 나라 종사의 역적이다. 이것이 너와 나의 의리다. ”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한을 풀다 (1775)

사도세자가 죽고 14년 후 차일암 계곡물에서 사도세자의 기록이 담긴 승정원일기의 해당 장들을 흐르는 계곡물에 담그는 장면이 나옵니다. 종이에 흘러가는 먹물을 세손(소지섭)은 지켜보고 영조(송강호)는 한줄기의 눈물을 흘립니다. 영조는 사도세자의 죽음 이후 정조를 일찍 죽은 큰 아들 효장 세자의 계통으로 편입시켜 왕위를 잇게 합니다. 명분상 사도세자의 아들이 왕위를 이을 수 는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1775년에 영조에 의해 대리청정을 시작하게 되는 정조는 이때 아버지사도세자의 기록을 [승정원 일기]에서 삭제해 주기를 청합니다. 그 기록을 남겨놓을 명분이 없었던 영조는 정조의 청을 들어주게 됩니다. 이로 인해 ‘임오화변’에 대한 공식적인 기록은 남아있지 않고, 오늘 날까지 민간기록에서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사도세자의 명예를 회복하다 (1776, 1793)

대리청정을 시작한 다음 해 영조가 죽자 정조는 25세로 즉위합니다. 그러자마자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원을 현재의 화성 화산으로 옮겨 현륭원이라 이름 짓고 훗날에는 융릉으로 격을 높입니다(1776). 능원의 입지를 결정할 때부터 정조 자신이 최고의 길지를 추천 받아 신하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도성과의 거리마저 무시하면서까지 정성을 들입니다. 능원의 석물 조성에도 각별히 공을 들여 당대 최고의 장인을 뽑고, 직접 재료들까지 살폈다고 합니다. 이후 스스로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자처하며 과거에 대한 청산을 시작합니다. 그 시작은 ‘금등지사’로 비롯됩니다. 금등지사(金�之詞)는 억울함이나 비밀스런 일을 후세에 밝혀 진실을 알게 하려는 문서를 말하는데, 정조는 왕위에 오른 17년 되던 해에 불현듯 금등지사의 내용을 공개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금등지사를 영조가 도승지 채제공을 시켜 사도세자의 신위 아래에 숨겨놓았다는 것입니다. 이는 영조가 세자를 죽인 것을 후회했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사도세자는 영조의 잘못된 판단으로 죽음을 맞은 비운의 세자로 명예를 회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비로소 정조는 아버지에게 장헌세자라는 이름을 올리고 역적이라는 아버지의 누명을 벗기게 됩니다.

올댓스토리(황성식)
일러스트
장홍탁
스틸컷제공
쇼박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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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6-04-05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