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 be or not to, That is question. 그 딜레마 상황을 패러디하는 과제였어.”
“우아! 씨바.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이 뭐냐는 문제는 봤어도, 시 전문을 패러디해라? 그래. 존나 잘났다. 너야 뭐, 검색의 달인인데 뭐가 문제야?”
“그 선생님은 철저해서 안 통해. 나도 밤새워서 혼자 해냈어. 내가 찾은 딜레마 상황은 결혼을 할 것이냐, 말 것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크하하! 너도 그딴 거 고민해?”
웃기는 하지만 기하의 말이 상당히 비틀려 있었다. 깔아뭉개야 속 시원할 도진이 어쩐지 자기보다 나은 상황에 있다고 느낀 듯하다. 그러는 중에도 윤은 계속 끅끅거렸다.
“만점 가까이 받았어. 나만 앞에서 낭독까지 시키더라고. 떨려서 더듬거리기는 했지만, 원래 동양인 깔보는 선생님이라 친구들까지 인정해줬어.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리포트 뒤에 코멘트가 있는 거야. Terrific! If it is yours.”
나는 도진을 쳐다보았다. 이 자식 유학 갔다 온 거 맞나 보다.
“크학! 그래서 선생 찾아가 항의했다고? 네가? 너 원래 그런 놈이잖아. 솔직히 하나라도 뭐 안 뒤져봤겠어? 나라면 ‘Terrific! If it indeed is yours’로 써줬을 거다. 짜샤. 겨우 그딴 걸로 차별 어쩌구 하냐?”
이번에는 기하를 쳐다보았다. 얘들이 지금 도대체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지. 말은 말인데 전혀 들리지가 않는다. 속이 뒤틀렸다. 윤까지 더럽게 계속 끅끅거리고 있다.
“이제 그만들 하지.”
그 말을 하는데도 짜증이 났다. 안 그래도 별로인 내가 더 하찮게 느껴지고. 얘들이 뭔 소리를 씨불이는지 몰라도 진짜 차별은 이런 데서 오는 거다. 머리 좋은 놈들에 대한 찌질이의 열등감. 내 말이 들리지도 않는지 둘은 얼굴이 뻘개져서 계속 떠들어댔다.
“야, 지식인. 진짜 네 문제가 뭔지 알아? 지금 어떤 상황인지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거야. 아이비리그? 하버드? 작작해라. 너네 지금 반지하 사는 거 모르는 줄 알어?”
기하가 이죽거리는 소리에 도진 얼굴이 창백해졌다. 큰 슈퍼마켓 집 아들이라더니. 그러자 떠올랐다. 그때 보낸 문자. 이 현실이 어쩌구, 꿈이라는 걸 증명할 수 없느냐, 뭐 이런 거였다.
“얄팍한 남의 정보나 뒤지는 주제에. 넌 그 입을 닥쳐야 돼. 그런 기회가 만약 나한테 왔으면 절대로 너처럼 낭비하지 않아. 세상이 그지 같으니까 너 같은 자식한테 그런 기회가 막 가지. 아까운 줄도 모르는 놈한테.”
“그래서 안기하는, 지라시 같은 거 만들면서 남의 인생 훔치나요?”
도진의 목소리가 한 단계 낮아졌고 기하의 눈이 무섭게 변했다. 도진의 안경 너머에 저런 눈이 숨어 있었던 거다. 급기야 윤이 욕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덩달아 먹었던 것들이 꾸역꾸역 넘어왔다. 도저히 봐줄 수가 없었다.
“그만들 닥치라고!”
그러자 도진과 기하가 거의 동시에 받아쳤다.
“너나 닥쳐!”
“알지도 못하는 게!”
나는 그대로 탁자로 올라가 기하 면상을 걷어찼다. 도진의 가슴팍을 내질러서 도진이 의자랑 같이 벌렁 넘어갔다. 성질 같아서는 실컷 분풀이하고 싶지만 고작 한 방에 기하 코피가 터져버렸다.
“너희들, 다시는 연락하지 마라.”
피가 터진 기하 얼굴에 돈을 던져주고 윤을 끌고 나왔다. 별로 먹은 것도 없는데 토악질이 올라와 우리는 노래방 간판 옆에 볼썽사나운 증거를 남기고 거기를 떠났다.
그새 연락이 갔는지 베네치아 앞에 갔더니 펑키 머리가 나와 있었다. 나를 노려보는 눈초리가 예사롭지 않았다. 그는 윤을 들여보내고 나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돌아서는 내 어깨를 우악스럽게 잡아 돌렸다. 결코 호의적인 눈이 아니었다. 그 눈에는 나를 잡아먹으려는 무서운 게 들어 있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그를 악착같이 뜯어냈다. 그러나 곧 멱살을 붙들렸다.
그의 관자놀이가 움찔했다.
“아, 뭔데? 나한테 왜 이러는데!”
나보다 겨우 머리 하나 큰 정도인데 힘이 대단했다. 몸보다 더 큰 힘이 나올 때는 이유가 있다. 길거리 싸움에서도 독이 오른 애가 항상 이겼다. 반항하면도 나는 몹시 불안했다. 이 사람이 나를 안다는 생각만 들었다. 누굴까. 설마 아니겠지. 얼핏 그런 느낌이 들었지만 착각이라고 머리를 털었다. 내가 너무 예민해진 탓이라고. 그런데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 그때도 이렇게 무섭게 나를 노려봤었다. 영빈의 사촌 형.
힘이 쭉 빠졌다. 고개도 들지 못했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죽은 토끼를 던져버리듯 펑키 머리가 나를 놓고 돌아섰다. 나는 주저앉아서 그의 발뒤꿈치가 사라지는 걸 멀거니 보았다. 그만 내가 죽어야 될 시간이 왔나 보다. 모든 게 한꺼번에 터질 때는 그러라는 뜻이겠지.
너무 어지러워서 껍데기처럼 흔들리고 발소리도 느끼지 못하며 걷고 걸었다. 티브이에서 웃던 그의 말소리가 속에서 끊임없이 웅웅거렸다. 딸들도 아내도 제 인생의 꽃입니다. 꽃밭에서 삽니다. 꽃. 그의 꽃은 그런 건가. 내 눈에는 무대의 해리가 꽃처럼 보였다. 슬프고 또 슬프고 아프고 또 아픈 꽃. 화실의 샘은 내 그림이 꽃 같다고 했다. 내 악몽이 꽃으로 변해 3만 원이 됐다.
왜 하필 집으로 왔는지.
문이 열리지 않았다. 몇 번을 눌러도 경고음만 요란하게 울렸다. 엄마가 비밀번호를 바꾼 것이다. 웃음이 나왔다. 문 앞에 주저앉아서 얼마나 시간을 보냈는지. 샤워를 좀 하고 싶었다. 지금 죽는 건 상관없는데 그전에 좀 씻고 싶었다. 내가 너무 더럽고 냄새나고 너무 불쌍하고 초라해서 좀 씻어줘야 할 것 같았다.
비밀번호 찍어
문자를 보내도 답이 없었다. 그냥 가야겠다 싶었다. 이렇게 떠나는 거 내키지 않지만 여기까지다. 엄마랑 내 사이. 딱 여기까지. 그런데 일어날 힘이 없었다. 어지럼증이 기어이 나를 주저앉혔다.
거의 한 시간이 다 돼서야 문자가 왔다.
그걸 왜 알려줘
속 깊은 데서 한숨이 나왔다. 한숨 끝이 떨리는 게 울음이 묻어나오는 듯했다. 그리고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는 엄마와 눈이 마주쳤다. 여전히 차가운 그 표정이 꿈틀 일그러졌다. 딱 그 표정으로 엄마는 나를 쏘아보았고, 나는 달리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쳐다보았다.
“들어가 밥 먹자.”
딱 한마디. 며칠 만에 보는 자식한테 그게 다였다. 겨우 그 소리에 간신히 버티고 있던 내 껍데기가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쌀쌀맞기 이를 데 없는 김난희는 비밀번호를 누르며 투덜거렸다. 이렇게라도 해야 네놈이 연락을 하지.
씻는 건 고사하고 죽은 듯이 잠에 빠졌다. 어쩌자고 우유 한 잔을 받아 마셨는데, 엄마가 거기다 수면제라도 넣은 것 같다. 기억이 흐릿해질 때 간절하게 기도했다. 이제 나 좀 그만 눈뜨게 해주세요.
여지없이 눈이 떠졌다. 살을 가르며 눈뜨는 것처럼 여지없이 또 아프다. 아직 아닌가 보다. 내가 끝날 시간이. 겪어야 할 게 더 남았으니 또 이렇게 눈이 떠졌겠지. 어이없이 배도 고프고. 한밤중이었다. 물이라도 마셔야 할 것 같아서 나가는데 주방에 불이 훤했다. 엄마는 취해서 식탁에 엎드린 채 혼자서 주정인지 잠꼬대인지를 웅얼거리는 중이었다.
“다 죽었어, 씨이. 누구는 뭐…… 처음부터, 윽. 이런 줄 알아, 으음…… 나도 한창땐 괜찮았어. 이쁘고…… 꿈도 있고…… 아, 씨이. 이게 아닌데. 이거 아냐…… 아니지. 푸우……”
물을 마시며 널브러진 엄마를 물끄러미 보았다. 화장하고 잘 꾸미면 노처녀 정도는 돼 보이더니 저렇게 퍼지니까 훨씬 더 늙은 거 같다. 식탁 한쪽에는 나 때문에 차렸는지 밥상이 그대로 말라 있었다. 나는 엄마를 부축해 방까지 데려갔다. 정신이 돌아왔는지 엄마가 양손으로 내 볼을 감싸고 또 한바탕 욕을 퍼부었다. 덜 취했는지 아예 깼는지 아주 말짱해 보였다.
“검정고시? 웃기시네. 나라고 안 해본 줄 아냐, 으윽…… 인생 만만한 거 아니다. 나는 화가 나. 나 때문에…… 내 인생인데…… 내 인생을, 푸우! 그때, 너무 쉽게 포기한 거야.”
그러더니 철썩 내 뺨을 쳤다. 느닷없는 봉변을 안기고 그대로 쓰러져 코를 고는데 꼭 쇼하는 것처럼 어이가 없었다. 그나저나 검정고시라니. 나한테는 전화 한 통 안 하면서 그새 내 뒷조사를 하고 다니셨나. 검정고시 소리가 나온다는 건 내가 편의점에서 일하는 것도 알아냈다는 건데.
“아, 알바……”
새벽 한 시가 넘었다. 또 협탁에 손을 대는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는 좀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콜택시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몹시 떨었다. 이가 딱딱 부딪힐 만큼 추운 건 속이 빈 탓이기도 했다. 콜택시까지 불러 타고 갔건만 편의점 사장은 손을 저었다. 내가 늦게 가서가 아니었다.
“네 엄마 무섭더라. 노동청에 고발하겠다니. 오갈 데 없는 거 받아준 게 그렇게 큰 죄냐?”
나는 허리를 굽혀 사과하고 편의점을 나왔다. 새벽 두 시가 돼 가는데 갈 곳이 없었다. 집으로 가자니 비밀번호를 모르고, 취해서 잠든 엄마가 열어줄 것 같지도 않다. 추운 거리를 오들오들 떨면서 한참 걸었다. 길거리는 취한 사람들과 미친 듯이 달리는 차들뿐. 블랙콜이 아직 열려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해리의 말이 생각났다. 나랑 가족 할래?
불 꺼진 틈새 분식집 앞에서 걸음이 멎었다. 여기를 들락거리던 게 아득한 옛날 같다. 건너편 병원도 불이 꺼져 깊이 잠든 것처럼 보였다. 텔레비전에서 웃던 그 얼굴이 떠올랐다. 제 인생의 꽃이죠. 그 열일곱 살짜리한테는 양심의 가책도 없이. 그때는 엄마도 엄마 인생의 꽃이었을 거다.
생각해보니 겨우 내 나이였다. 열일곱에 그를 만나 열여덟에 미혼모가 됐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나는 도대체 모르겠는데 꿈도 있었단다. 겁도 없이 애를 선택하고 학교를 잃었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깨진 보도블록을 주워들었다. 주먹만 한 그것을 힘껏 쥐었다가 죽을힘을 다해 던졌다. 오기가 단단히 실린 덩어리를 튕겨내느라 내 몸은 활시위가 되어 겁 없이 도로 가운데까지 끌려갔다.
파악!
유리 깨지는 소리가 아주 이상했다. 당장 요란하게 경보기가 울렸고 나는 골목으로 숨어들었다. 그리고 화실 소파에서 단잠에 빠졌다.
/ 작가소개 /
황선미(1963~)
소설가
<소설>
『나쁜 어린이 표』 , 『마당을 나온 암탉』 , 『뒤뜰에 골칫거리가 산다』, 『들키고 싶은 비밀』 , 『푸른 개 장발』 , 『과수원을 점령하라』 , 『주문에 걸린 마을』, 『어느 날 구두에게 생긴 일』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