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출근한 뒤라 느긋하게 샤워하고 옷 갈아입고 충전기와 여분 배터리도 챙겼다. 협탁에서 돈을 꺼낼 때는 쪽지라도 남길까 잠시 생각했지만 이 정도는 엄마도 겪어야 될 것 같아서 그만두었다. 그걸로 기하 돈부터 일단 채워 넣었다.
역시나. 맨 먼저 들어온 문자는 윤에게서 온 것. 잡다한 문자 속에서 눈에 띈 게 ‘일요일 12시 베네치아’였다. 갈까 말까. 펑키 머리가 좀 거슬리는데 기하가 올지 몰라서 가봐야 될 것 같다. 돈을 돌려줘야 한다. 어차피 고등학교는 무사히 졸업하기 어려워졌지만 나를 더 나빠지게 할지도 모르는 이것은 찜찜해서 안 되겠다. 그런 데서 생일잔치하는 고등학생이라니. 아무리 부모덕이 좋아도 그렇지 막내 심부름꾼 주제에. 상상만 하던 그림이 실제로 어떨지 궁금하기는 하다.
부재중 전화가 몇 통. 저장된 이름이 별로 없는 걸 보면 중요하지 않은 것들이다. 지독한 엄마. 엄마로 저장해놓은 ‘M’은 전혀 없었다. 해리 번호가 한 번 찍혀 있었다, 잠시 거기에 눈이 멎었지만 문자도 없이 그것뿐이라 한숨을 쉬며 넘겨버렸다. 더스티 문자도 하나 있었다. 장난으로 내게 그런 문자를 보냈다고 했다. 유치한 어린애들 정도로 생각하고 놀려먹고 싶었나 보다. 어린것들이 어떻게 노는지 한 번 구경하자는 식으로.
화실 근처 편의점에서 라면을 먹으며 유리문에 붙은 걸 유심히 보았다. 새벽까지 일할 점원을 구한다는 메모지. 나이 때문에 편의점 알바는 해본 적이 없었다. 밤에 일하고 낮에 화실에 있으면 하루가 해결될 것 같은데 그렇게 되면 진짜로 학교도 집도 포기하는 거다. 그걸 지키려고 얼마나 마음을 다잡아 먹었는지 모른다.
늘 선택의 여지가 거의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나를 힘들게 하는 시설에서 도망치는 것, 나를 건드리는 길거리 애들한테서 도망치고 얻어터지지 않으려고 싸우는 것, 밤을 버티기에 떡볶이가 나을지 튀김이 나을지 고르는 것, 어떤 애가 어울려 다니기 편할지 고르는 정도.
고민은 했지만 편의점에서 일하기로 한 것은 잘한 선택이었다. 주인이 관자놀이 흉터 때문에 의심의 눈초리로 나를 살피고 있다는 것도 알고 일 시키기에는 너무 어리다고 생각한 줄도 알지만 어쨌든 일자리를 얻었고 잠자리도 해결했다. 검정고시 학원 다닌다고 거짓말은 좀 했지만 생구라는 아니다. 학교로 못 돌아가면 마는 거지. 필요하다면.
화실에 매일 나가는 조건으로 화실 청소를 맡기로 했다. 선생이 나를 잘 봐준 덕분이었다. 잠은 소파에서 자고 화집도 실컷 보고 뜨거운 물도 끓일 수 있으니 더 바랄 게 없었다. 그러면서 나는 내가 그리고 싶은 것들을 그려나갔다. 내가 끼적대던 것들을 누군가 봐준다는 게 좋아서 남의 그림 베끼던 건 잠시 접어두었다.
“이거, 누구한테 좀 보여줘도 되나?”
선생이 고사리 그림을 욕심내서 선물로 주었다. 선생이 그걸 어떻게 했는지 물어보지 않았다. 대신 손바닥 크기의 그림 값으로 3만 원을 받았다. 그거 받을 때의 떨림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그 정도 돈은 이미 여러 번 벌어보았지만 전단지 돌리고 햄버거 가게에서 번 돈과 왜 그렇게 다르게 느껴지던지. 그중에 가장 깨끗한 돈 하나를 지갑 맨 안쪽에 잘 꽂았다. 선물 같은 건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베네치아로 오는 길에 모자, 장갑 같은 걸 파는 가판에서 재미있는 마스크를 발견했다. 빙긋 웃는 모양. 난처할 때마다 마스크를 써야 하는 윤에게 어울릴 것 같았다. 누구에게 선물하려고 뭔가를 사기는 난생처음이라 기분이 아주 묘했다. 기분 좋다는 말로는 표현이 다 안 되는. 가슴 한쪽이 막 간지럽기도 하고 괜히 웃음도 실실 나왔다.
유치한 내 감정은 베네치아에 도착하자마자 이내 싸늘하게 식었다. 윤이 어떤 애들과 어울리는지 보려고 납시었는지 걔 엄마 아버지가 떡하니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 옆에는 도진과 기하가 전에 없이 모범생 같은 자세로 앉아 있고. 나도 모르게 관자놀이 상처가 안 보이게 고개를 좀 돌렸다.
“아, 네가 그림 그린다는 김무? 잘생겼네.”
회계사라는 윤의 아버지가 먼저 말을 걸었다. 또 욕이 튀어나오려고 했는지 윤이 입을 막고 고개만 끄덕였다. 걔 엄마는 입꼬리만 올렸고 마침 다가온 남자와 앞치마를 두른 뚱뚱한 남자에게 말을 건넸다. 나한테 아무 관심도 없는 저 남자가 진짜 셰프였다.
“제부가 알아서 챙겨줘요. 다들 먹성 좋을 때니까 부족하지 않게요.”
“걱정 마시고, 애들끼리 놀게 처형이 비켜줘요.”
나는 주인처럼 보이는 남자와 윤의 엄마를 슬쩍 보았다. 제부니 처형이니 하는 촌수가 어떻게 이어지는지는 몰라도 이들이 친척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그러면 그렇지. 이 정도쯤 되니까 윤 같은 애가 주방에 들어갈 수 있었겠지. 하여간 욕하는 것 말고는 부족할 게 없는 애다. 길거리표 마스크 따위 괜히 샀다. 이런 애한테 가당키나 한가.
윤의 부모가 점잖게 일어났고 걔 엄마는 자리에서 떠나기 전에 우리를 한 번 더 보면서 자기 아들의 양어깨를 사랑스럽게 쓰다듬었다. 너희들과는 다른 애란다, 하는 것 같은 표정이랄까. 윤의 입에서 여지없이 욕 다발이 터지는 바람에 이내 찡그려졌지만. 늘 그랬듯 기하가 우스워죽겠다는 듯 킬킬거리며 손가락질을 했다.
탁자가 모자랄 정도로 음식이 나왔다. 모든 메뉴가 다 나온 모양인데 나는 지난번 고약한 경험 때문에 속이 메스꺼워서 별로 내키지가 않았다. 그새 다 나았는지 얼굴이 말짱해진 기하는 정신없이 집어 먹었고 도진은 예의라도 차리는지 얌전을 떨었지만 여지없이 입술이 금방 너저분해졌다.
“속이 안 좋아?”
언제부터 보고 있었는지 펑키 머리가 탄산음료를 가져다주며 물었다. 윤이 벌떡 일어나더니 나 대신 굽신 인사를 했다. 이런 걸 가져다줄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다. 내 생각에도 이건 주방에 있을 사람이 굳이 할 일이 아니었다. 나는 입안에서 싱싱하게 터지는 탄산을 한 모금 삼키며 주방으로 가는 펑키 머리를 빤히 보았다. 나한테 왜 이러는 걸까.
정신없이 먹는 동안 우리는 누가 봐도 친구였다. 욕쟁이라고 놀리면서도 기하는 요리책을, 도진은 시집을 선물로 준비했다. 어쩌면 내 생각이 틀렸는지 모르겠다. 이런 식으로도 친구가 될 수 있는데. 내 선물을 애들은 비웃었고 윤은 애처럼 좋아했다. 참 어색하고 낯간지러웠지만 이렇게라도 내게 친구가 있다는 걸 확인한 순간이었다. 착각이라고 해도 그 순간은 나한테 진짜였다.
어린애도 아니고 부모가 만들어준 자리에 계속 있을 수는 없었다. 우리는 거기서 오래 있지 않았다. 잘 지키라는 명령이라도 받았는지 우리가 일어서자 직원들이 다 쳐다보았다. 윤이 욕을 반이나 섞으면서 안심시켰다. 멀리 안 간다고. 옆에 있는 노래방 간다고.
너무 일찍 문을 열었는지 아줌마가 카운터에 앉아 졸다가 우리를 맞았다. 티브이에서도 노래방에 안 어울리는 건강 프로그램이 저 혼자 떠들고 있었다. 하지만 내 시선은 패널 중 하나에 꽂혀 아줌마가 애들을 방으로 데려가는데도 움직이지 못했다. 오늘은 둘이 나란히 앉아 있다. 그와 최송은. 명패도 폼 나게 가정의학과 전문의, 치과 전문의.
“네, 그렇군요. 그 정도면 따님들 자랑하셔도 됩니다. 그렇게 반듯하고 똑똑하고 예쁘게 키우기가 어디 쉬운가요. 이 모든 게 아내 되시는 치과 원장님 덕분이라는 건 아시죠? 경제력도 좋고 자녀 교육도 완벽하신 분을 아내로 두신 거예요. 평생 업고 다니셔야 될 것 같은데요.”
아나운서의 넉살에 모두가 웃음. 그는 머리를 긁적이는 시늉을 하며 크게 웃었고 최송은은 입을 가리고 웃었다. 특별히 더 주목받는 날인지 둘만 부부 동반이고 자리도 맨 가운데다.
“이쯤에서 원장님의 한마디를 좀 듣고 싶은데요. 원장님에게 최송은 원장님은 어떤 존재일까요?”
그가 또 카메라를 향해 웃었다. 겸연쩍어 하지만 피트니스 클럽의 그를 생각하면 계산된 연출이었다. 잘 매만져 자연스럽게 보이는 머리 모양이나 눈 밑의 잡티를 가린 화장처럼.
“꽃이죠. 딸들도 아내도 제 인생의 꽃입니다. 집에만 가면 제가 아주 꽃밭에서 삽니다. 하하하!”
주먹이 쥐어졌다. 당장 나가버리고 싶었으나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음악 소리가 흘러나오는 방으로 들어갔다. 엄마가 텔레비전에 화장품 병을 집어 던졌었다. 그때도 저런 소리를 지껄였나. 내가 이런 심정인데 엄마는 오죽했을까.
대낮부터 생일 어쩌구 한 것부터가 잘못이었다. 강냉이에 콜라도 우습고 노래도 심드렁하고 우리가 죽고 못 사는 친구도 아니고. 도진과 기하가 도대체 뭐 때문에 열을 올리게 됐는지 모르겠다. 화장실에 다녀와 보니 윤은 긴장해서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한 손으로는 머리를 감싸고 있었다.
도진은 안경이 코까지 내려온 줄도 모르고 양손을 들고 열심히 떠드는데 매가리 없는 말투라 감 잡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인종, 여성/남성, 우성/열성, 계급. 이런 게 어떻게 극복되지?”
“웃기고 자빠졌다! 차별이 극복되지 않으면 노력이라는 걸 왜 하냐? 그럴 가치가 없잖아. 그러니까 네가 실패자인 거야. 짜샤.”
“차별에 희생되면 실패자인 거야? 어떤 근거에서 그래?”
대강 짐작이 됐다. 도진이 또 같잖은 말장난을 시작했을 테고 기하가 밸이 꼴려서 이기죽거리는 거고. 짜증이 확 치밀어서 나는 탁자에 다리를 걸치고 소파에 기대버렸다. 아무래도 여기서 나가는 게 좋겠다. 예의상 집어 먹은 스파게티 몇 가닥이 살아서 기어 나오려고 한다. 방금 전 티브이에서 나온 소리만으로도 충분히 속이 뒤집어진 참이다. 윤을 슬쩍 보니까 욕을 참느라고 여간 고역스러운 게 아닌 모양이었다. 옆에서 친구가 그러거나 말거나 둘은 신경도 안 썼다.
/ 작가소개 /
황선미(1963~)
소설가
<소설>
『나쁜 어린이 표』 , 『마당을 나온 암탉』 , 『뒤뜰에 골칫거리가 산다』, 『들키고 싶은 비밀』 , 『푸른 개 장발』 , 『과수원을 점령하라』 , 『주문에 걸린 마을』, 『어느 날 구두에게 생긴 일』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