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연재소설

《거기까지》꽃 - 2

 

<마당을 나온 암탉 />의 황선미 작가의 새로운 청소년 소설 : <거기까지> 꽃 -2<마당을 나온 암탉 />의 황선미 작가의 새로운 청소년 소설 : <거기까지> 꽃 -2

“있잖아, 뮤. 나랑 가족 할래?”

머리가 묵직해졌다. 가슴이 온몸이 뜨겁게 무겁게 내려앉았다. 왜 그런 말을 나한테 했는지 물을 필요도 없었다. 우리에게 없는 것. 가져본 적 없어서 너무 힘들었고 끔찍했고 열등의식에 사로잡혀야만 했던 것. 그때는 어렸지만 이제는 구걸하지 않을 만큼 컸다. 나는 아니지만 해리는 그런가 보다.

“처음엔 아는 척 안 하려고 했어. 알잖아, 우린…… 아, 그게. 우박 쏟아진 날, 틈새 들어오던 거 기억해. 굉장히 힘들어 보였거든. 사실은 걔, 안기하 맞지? 걔가 이름 불러서 너인 줄 알았지만. 특이하잖아, 네 이름.”
“그랬구나.”
“초대권 줬어, 내가. 근데 넌 안 오더라.”

나는 피식 웃었다. 그래서 기하가 열 받았던 거다. 초대권은 자기한테 주고 내 얘기만 했을 테니까. 그렇다고 저 혼자 술 먹고 머리까지 그 지경이 됐을까.

“나, 너라면 그럴 수 있을 것 같아.”

그러니까 내가 불쌍해 보여서 가족이 돼주고 싶다는 거다. 우박 쏟아진 날. 그날이면 내가 더 불쌍해 보이기도 했겠다. 틈새에 처음 간 날. 그의 존재를 알고 병원까지 찾아낸 날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때나 지금이나 내 꼬락서니는 형편없다. 더 나빠졌든지. 나보다 더 가엾다고 여긴 해리가 되레 나더러 불쌍하단다.

“그래서 나 불렀니? 무슨 게임도 아니고, 남의 핸드폰으로.”
“그건 오빠들이 장난친 거고.”
“장난?”
“걔들은 나 잘 몰라. 그러니까 놀리지. 말려도 소용없었어. 장난은 걔들이 먼저 쳤지만, 난 장난 아냐.”

더 있으면 안 될 것 같다. 내가 아무리 형편없어도 얘한테 이런 소리나 들을 건 아니다. 어린 해리에 비해 상황이 나아진 것 같아서 다행이고 무대에도 섰으니 성공한 거 아닌가. 뭘 모르는 오빠들이 나와 해리를 싸잡아 시시덕거리는 안주로 삼는 것도 봐주기 어려울 거고 솔직히 더 있어봤자 좋은 얘기 나올 것도 없다.

어색했지만 잘 지내라는 뜻으로 빙긋 웃으며 다시 한 번 손을 들었다. 그리고 돌아섰는데, 해리의 격한 목소리가 뒤통수를 때렸다.

“넌 똑같구나! 그때도 그렇게 가버렸지!”

갈고리 같은 그 말이 심장에 덜컥 걸렸다. 언제 어떤 일을 두고서 하는 말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물어보고 싶지 않았다. 해리가 나 때문에 오래 참았던 묵은 감정이 있다는 건 짐작하겠는데 그걸 이제 알아서 뭐할까. 우리가 알았던 일 년은 내 인생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저주받은 시간이었다.
나는 뒤도 안 돌아보고 걸었다.

“부탁할 거 있단 말야!”

울음 섞인 목소리가 끝까지 따라왔다. 나는 뛰기 시작했다. 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다시는 이쪽으로 오지도 않을 거다. 이제 그만 묻혔으면, 괜찮아질 거야, 다 지나간 일이잖아 했던 것들이 결국 고스란히 고개를 쳐들고 말았다. 해리 때문이다. 해리가 모든 뚜껑을 다 열어버렸다. 해리 뒤에는 징그러운 그 늙은이가 있고 거기에는 또 영빈이가 있고 엄마가 있고 사면동 악동들이 있고 철로 밑의 검은 물이 있고 비명소리…… 너무나 아픈 뺨, 손, 몸, 가슴.

어쩌자고 해리를 만났을까.

이게 운명이라면 더럽게 꼬인 이따위가 내 인생이라면 나 진짜 구제불능이다. 아닌 건 아닌 거다. 부정에 부정이 거듭됐을 땐 결과가 빤한 거였는데 뭘 증명하자고 태어났을까. 내게 의도 따위가 있었을 리 없다. 애초부터 지금까지 내 머리는 비었고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쓰레기다. 그런데 어떻게 다 감당하라고 이렇게 뒤흔들까. 도대체 왜 누가.

혹시 새벽 기차로 도망치자고 한 것 때문이라면 순전히 해리의 착각이다. 나는 그러자고 약속한 적 없다. 엄마가 온 날이고, 당연히 엄마를 따라가서 살게 될 줄 알았다. 어떤 남자한테 시집가려고 나를 마지막으로 보러 온 줄 알았으면 같이 도망쳤을까. 그러나 그때 내 머리에는 해리가 없었다.

온몸이 진땀으로 휘감겼다. 숨 막히게 속이 답답했다. 나는 뛰고 또 뛰었다. 이렇게 죽어라 힘들게만 할 거면 심장 따위 차라리 찢어져버렸으면. 얼마나 더 살아야 이 더러운 것들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누가 날 쥐고 있는 걸까. 죽이지 않고 날마다 눈뜨게 할 때는 새로운 날을 좀 살아보라고 할 때도 되지 않았나. 공사장 펜스를 넘어가서야 나는 주저앉아 악을 썼다. 제발 내 속의 끔찍한 기억들일랑 토해져라.

<거기까지 /> 꽃 -2

처음으로 엄마랑 한방에서 자게 된 날이었다. 엄마는 마지막으로 내게 은혜를 베풀고 마음의 짐을 벗고 싶었던 것 같은데 순진하게도 나는 전에 없던 그 일로 엄마와 내가 비로소 가족이 됐다고 믿어버렸다. 그래서 해리를 찾아갔다가 늙은이가 던진 곡괭이에 손을 찍히고도 울지 못했다. 피를 겁나게 흘리고 독이 올라서 손이 무섭게 부어올랐어도 차마 말하지 못했다. 엄마가 나 같은 말썽꾸러기를 싫어하면 안 되니까. 실망하고 혼자 가버릴까 봐. 그런데 자고 났더니 혼자서만 가방을 챙겼다. 고등학교까지 보내주는 시설이 있으니 거기로 날 보내면 더 이상 돈 들지 않을 거라고 친척을 안심시키면서. 나는 망치를 들었고 엄마를 진짜로 죽이고 싶었다. 하지만 고작 열한 살짜리였다. 전날 다친 손 때문에 온몸이 열에 들떠서 미친 듯이 떨렸다. 그런 내 뺨을 엄마가 사정없이 후려갈겼다.

나는 아직도 그때 일을 또렷하게 기억하지 못한다. 나는 너무 어려서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분노를 감당하지 못해 내 몸뚱이를 피가 나도록 할퀴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또 맞았고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악다구니를 해댔다. 그러다 뛰쳐나왔고 영빈이가 따라왔다. 사면동 촌구석 악동들이 심심할 때마다 건드리던 덜떨어진 애. 악동들은 내가 영빈 대신 자기들과 어울리기를 바랐다. 영빈이는 나를 따라오지 말았어야 했다. 내가 좀 놀아줬다고 나 같은 애를 좋아하면 안 되는 거였다. 나는 차라리 악동이 되고 싶었고 사면동 악동들에게 영빈이를 바쳐서 걔들처럼 될 수 있다면 기꺼이 그럴 수 있는 악마 새끼였다.

엄마가 나를 따라온 건 내가 무슨 짓이든 저지를 것 같아서였을 거다. 나는 엄마를 돌아보았고 그 순간 철로 밑으로 떨어졌다. 발을 헛디딘 것 같기도 하고 일부러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영빈이 같이 떨어진 건 실수처럼 보이지만 꼭 그렇다고 할 수 없다. 이 부분에서 나는 엄연한 범죄자다.

나의 면죄부는 얼굴에 깊게 난 상처였다. 이미 전날에 생긴 손의 상처까지 나를 피해자로 만들어줬고 내가 늘 영빈의 친구처럼 굴었던 게 걔 부모까지 속일 수 있는 증거가 됐다. 영빈의 사촌 형이 미심쩍은 눈초리로 끝까지 나를 노려보았지만 엄마의 연기력 덕분에 잘 넘어갔다. 아무도 내 탓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영빈은 죽었고, 나는 안전해졌다.

화실 문이 잠겨 있었다.

벽에 기대앉아서 아주 오랫동안 눈을 감고 있었다. 긴장이 가라앉고 온몸에서 빠져나온 눈물이 옷을 다 적셨고 머릿속이 텅 비었다. 그리고 어젯밤 꿈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살아서 꿈틀거리던 고사리. 그 속의 무표정한 얼굴. 덩굴이 감싸는 고치 속 태아. 생각나는 것들을 스케치북에 하나하나 그려냈다. 참 이상하다. 머릿속에 있을 때는 혼란스럽던 게 눈앞에 나타나니 다르게 보인다. 악몽이 변신한 것처럼. 불확실한 이미지를 눈앞으로 끄집어내 확인하는 데 빠져서 나는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몰랐다. 배가 고픈 줄도 피곤한 줄도 몰랐다.

“그거 멋진데!”

화실 선생이 스케치북을 확 잡아 빼는 바람에 정신이 들었다. 대학원에 다니며 짬짬이 일을 도와주는 선생. 선생보다는 누나라고 부르고 싶은 사람이다. 한 번도 그런 말을 해보지 못해서 앞으로도 안 되겠지만 내 마음에는 그렇게 자리 잡은 사람. 그래서 함부로 스케치북을 빼앗아도 놀리는 표정으로 쳐다봐도 화가 안 난다.

“여기에 색깔 입힐 거니? 아니면 흑백?”
“그냥 해본 거예요. 그림도 아닌데 뭘……”
“아냐. 디테일하게 완성해봐. 특히 여자 표정이 뭐랄까. 흠!”
“이런 것도 그림이 돼요?”
“이봐요, 고딩. 도안이 어디서 나오게?”
“도안?”
“내 눈에는 이게 하나의 꽃처럼 보여. 차갑고 도시적인. 잘해봐.”

선생이 내 어깨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러나 곧 냄새난다는 표정으로 손을 저으며 물러났다. 눈도 흘기고. 창피해서 얼굴이 빨개졌다. 냄새가 나서 미안하다. 따뜻한 손인데.

학교 가는 길에 자료를 가지러 들른 거라며 선생은 곧 화실을 나갔다. 아직은 화실 문 열 시간도 아니고 내가 오는 날도 아니라서 나도 나가야 했지만 선생이 봐줬다. 여기서 작업하고 싶으면 그냥 하라고. 열쇠까지 주면서. 선생은 열쇠를 잠시 맡겼을 뿐이지만 나는 몸이 떨릴 만큼 감동을 받았다. 여기 온 지 한 달밖에 안 된 나를 믿는다는 뜻이었다. 덕분에 나는 그 도안인가 뭔가처럼 보인다는 이걸 잘해보고 싶어졌다.

다른 선생이 올 때까지 나는 그림에 집중했다. 잠깐 소파에 구겨져 자기도 하고 물 끓여서 믹스커피도 마셨다. 배터리가 방전돼서 쓸모없게 된 전화기를 몇 번쯤 들여다보았지만 아쉬울 건 없었다. 필요하긴 해도.

/ 작가소개 /

황선미 작가 사진

황선미(1963~)

소설가

<소설>
『나쁜 어린이 표』 , 『마당을 나온 암탉』 , 『뒤뜰에 골칫거리가 산다』, 『들키고 싶은 비밀』 , 『푸른 개 장발』 , 『과수원을 점령하라』 , 『주문에 걸린 마을』, 『어느 날 구두에게 생긴 일』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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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6-03-04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