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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선미 연재소설 '거기까지'

《거기까지》꽃 - 1

 

<마당을 나온 암탉 />의 황선미 작가의 새로운 청소년 소설 : <거기까지> 꽃 -1<마당을 나온 암탉 />의 황선미 작가의 새로운 청소년 소설 : <거기까지> 꽃 -1

6년이 긴 시간인가. 짧은가. 1년은 어떨까. 짧은 시간. 긴 시간. 무엇을 기억하기에 시간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가 보다. 해리와 친구로 지낸 게 1년쯤, 만나지 않은 지 6년. 그런데 목소리만 듣고도 알아봤을 만큼 해리는 내 속 어딘가에 새겨진 애였다. 그걸 이제 알았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언제라도 덧날 수 있는 딱지 아래 오래된 상처라는 사실. 열한 살짜리 과거로 묻히지도 않고 그저 악몽도 아닌 내 한쪽이었다는 사실.

나는 해리 부모가 가수였다는 걸 거의 믿지 않았던 것 같다. 해리 때문이 아니라 내가 애초부터 뭘 믿기 어려운 애로 생겨 먹은 탓이었다. 해리가 그런 늙은이한테 맡겨졌다는 사실이 그걸 믿지 못하게 만들기도 했다. 시작부터 부정적이었던 나와 달리 부모가 있는 애였다. 밤무대 가수였다지만 돈도 벌었을 거다. 아무리 교통사고로 갑자기 부모가 죽었다 해도 버려진 애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 애가 어떻게 잘못 배달된 물건처럼 이리저리 보내지는 나보다 더 끔찍하게 살 수가 있나. 그것도 작은할아버지라는 작자에게 겁탈당하면서.

내 믿음과 상관없이 해리는 노래를 잘했다. 나이에 안 어울리게 성숙한 목소리를 낼 줄 알아서 수업 시작하기 전에 선생님이 노래를 시킨 적도 많았고 팝송도 몇 번 들으면 외워버리는 애였다. 그래서 그 늙은이가 술만 처먹으면 해리를 찾았을 거다. 「섬마을 선생님」 좀 불러봐 이미자처럼. 「처녀 뱃사공」 알지. 노래는 뽕짝이 제맛이거든. 해리는 울면서 노래를 불렀고, 흥이 안 난다고 때리는 바람에 울음을 참고 몸을 배배 꼬면서 노래하는 걸 본 적도 있다.

나는 자꾸만 속이 탔다. 연거푸 마셨는데도 속이 탔다. 나중에는 얼음물을 달라고 해서 들이켰다. 계산서나 기하의 돈을 쓰게 될 거라는 걱정은 이미 내 머리에 없었다. 여기서 그만 나가야 한다는 생각과 해리를 한 번 보고 싶다는 생각이 뒤엉켜 끝없이 갈등했다. 한편으로는 이 모든 게 두렵기도 했다.

해리가 나를 봤다면 아마 ‘틈새’에서였을 것이다. 혼자서 원탁을 차지해도 아줌마가 봐줄 만큼 자주 가는 애. 그러니까 저번에 나를 일제히 쳐다보던 그 젊은이들이 더스티였던 모양이다. 내가 누구인지 알고 쳐다봤다는 건데. 그때 아는 척할 수도 있었는데 왜 이렇게까지 했을까. 장난처럼. 어쨌든 나는 해리를 두어 번 보고도 알아채지 못했다. 목소리를 듣기 전에는 상상도 못했다. 기하가 눈뜨자마자 그 이름을 꺼내기 전까지는 기억의 가장 밑바닥에 눌려 있는 그림자일 뿐이었다. 깨고 나면 홀로그램처럼 흩어지는 악몽일 뿐이었다.

<거기까지 /> 꽃 -1

묵직해진 머리를 의자에 기댄 채 무대를 바라보았다. 문신처럼 화장하고 무대의 꽃이 된 해리. 내 손에 체크무늬 상처가 깊게 패인 날 사라진 애. 늙은이에게 당할 때마다 담뱃불 자국이 몸에 찍히던 애. 왜 저렇게 화장할 수밖에 없는지 나는 안다.

뜨겁고 무거운 머릿속에서 차가운 게 천천히 흘렀다. 그건 아무리 시끄러워도 알아들을 수 있는 해리 목소리. 나에게는 노래가 아니었다. 머릿속 굴곡을 따라 천천히 움직이는 차갑고 끈적한 물질. 출구를 찾지 못해 밀도가 높아진 눈물이거나. 눈을 감으며 나를 놓아버렸다. 이제는 못 도망친다. 여기서 빠져나가기에는 너무 늦어버린 것 같다.

“얘, 취한 거 같은데.”
“미성년이 제법 세네.”

웃음. 이 목소리 기억난다. 통화음 너머에서 웃던 남자. 분명히 나를 두고 하는 소리인 줄 알지만 나는 눈을 뜨지 못했다. 돌처럼 무거운 눈을 굳이 뜨고 싶지도 않았다. 내가 봐야 할 것에 용기가 나지 않는다. 이대로 그냥 모든 게 끝나버렸으면. 이 정도면 충분히 겪지 않았나.

얼핏 본 것 같기는 하다. 고사리무늬가 눈앞에서 어른거리는 걸. 그 속의 희미하고 무표정한 여자 얼굴. 그것은 해리이기도 하고 엄마이기도 했다. 고사리무늬는 아름다웠지만 너무 가까워서 어지럽고 살아서 꿈틀거리는 것 같아 징그러웠다. 그것들이 자라나 나를 감고 또 휘감아 고치처럼 가두어나갔다. 내 몸은 옴짝달싹 못하게 오므려지고 작아지다 기어이 태아처럼 변해갔다. 애벌레처럼 동그랗게 말린 몸뚱이는 막에 싸여서도 너무 투명하고 연약해서 위태롭기 짝이 없었다. 나를 철저하게 둘러싼 눈물에 동동 떠서 나는 가끔 눈을 끔뻑이고 손가락을 빨아보았다. 배가 고팠다. 너무나 강렬한 빛을 감당하기에 내 눈꺼풀은 너무 얇고 약했다.

마치 살갗을 가르기라도 한 듯 아프게 눈이 떠졌다.

“컵라면 먹을래? 아님, 삼각 김밥?”

꿈결의 바람처럼 느껴지는 소리. 비현실적이다. 나는 천천히 일어나며 이게 어떤 상황인지 파악하려고 주변을 살폈다. 창문도 없는 낯선 방. 좁고 답답하고 화장품과 음식 냄새가 뒤섞인 방이었다. 그리고 등을 보이고 앉아 있는 여자. 해리. 어제 내가 꿈을 꾼 게 아니었던 것이다.

막 샤워를 했는지 노랗고 긴 머리가 곱슬한 채로 젖어 있었다. 아무 기억도 없는데 나도 모르게 혹시 무슨 짓을 저질렀을까. 그럴 리 없었다. 옷도 어제 입은 그대로다.

“아니면, 기사 식당 같은 데 갈까?”

여전히 그 자세로 해리가 물었다. 걔도 나를 보고 있었다. 벽에 붙은 좁고 작은 책상 위 사각 거울을 통해. 나는 그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기만 했다. 어떻게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말할 수 있을까.

해리가 나를 돌아보았다. 저절로 마른침이 삼켜졌다. 눈알이 뜨거워졌지만 피하지 않았다. 얘도 겁먹은 것 같다. 너무 경직돼서 그렇게 보이나. 아무렇지도 않게 한 말이 아니라는 걸 얼굴을 보니 알 것 같다. 얘도 나처럼 견디고 있다는 걸.

낯설다. 그나마 기억하던 어린 해리를 순식간에 흩트리며 전혀 생소한 여자가 나를 보고 있었다. 머리 모양만 보면 아가씨 같지만 얼굴이 혜인보다 어려 보인다. 밴드 공연 포스터 속의 화장 요란한 여자로도 안 보이고 내가 알던 해리도 아닌 전혀 다른 얼굴. 증거라도 찾듯 나도 모르게 목덜미로 눈길이 갔다. 이미 알아채고 해리가 흉터에 손을 가져갔다. 지옥에 떨어질 미친 영감탱이. 얼굴도 못 알아보게 자랐어도 흉터는 그때 그대로다. 내가 기억하는 건 하나인데 귀밑으로 둘이 더 있다. 별안간 가슴에 뜨거운 덩어리가 뭉치고 뻐근해져서 나는 고개를 돌렸다. 두 개의 기타가 눈에 들어왔다. 그 옆의 도면 통과 가방. 고시텔, 내게 침대를 내주고 얘는 어디서 잤을까. 둘이 끌어안고도 못 잘 만큼 침대는 몸 하나 겨우 누일 정도다.

우리는 음식 냄새가 묘하게 떠다니는 복도를 잠자코 지나 밖으로 나갔다. 해리는 목에 스카프를 감고 후드 티에 모자까지 썼다. 늦었는지 교복 입은 애들이 뛰어가는 걸 보고 해리가 나를 슬쩍 보았다. 너 학생이잖아, 하는 것처럼. 문득 혜인이 생각났고 썰물이 빠져나가듯 가슴이 시렸다. 이 정도 결석이면 학교에서 무슨 조치가 내려졌을 것이다. 무사히 잘 지내고 싶었는데 결국 또 이렇게 됐다.

우리는 말없이 그저 걸었고 나란히 걸으면서도 얼굴 한 번 마주치지 않았다. 그리고 근처 시장으로 가서 해장국을 사 먹었다. 우리는 해장국에 고개를 처박은 채 밥알과 콩나물 대가리 같은 걸 연구라도 할 것처럼 자세히 보며 야금야금 남김없이 먹어치웠다. 속이 빈 터라 나한테는 아주 귀한 한 끼니였다.

“여기 자주 와?”

내 말에 해리는 고개만 끄덕였다. 그렇게라도 입을 떼고 나니 비로소 우리가 아는 사이라는 게 실감났다. 이렇게 6년을 건너뛸 수도 있는 거구나. 엄마와도 안 되던 게 해리와는 되다니. 깍두기까지 알뜰하게 먹고 나서야 해리가 등을 똑바로 펴고 나를 슬쩍 보았다.

“여기 밥 맛있어. 틈새 김밥이랑 여기. 나한테는 완전식품이야.”

완전식품. 단순히 영양식을 말하지 않는다는 걸 나는 안다.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파본 애들에게는 채워져야 할 허기 식품군이 몇 개쯤 더 필요하다. 사랑이나 안심 혹은 소속감이라는 영양소. 더 정확하게는 엄마. 나한테는 그랬다. 해리가 나랑 똑같은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또 잠자코 걸었다. 해리가 밥을 사서 음료수는 내가 사고 싶었는데 기껏 초코우유를 집어서 웃음이 났다. 야하게 화장하고 클럽에서 노래하는 애치고는 착한 입맛이다. 공원을 몇 바퀴 돌고 전철역을 두 개쯤 지날 때까지 우리는 그저 걷기만 했다. 해리도 나처럼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망설이는 게 분명했다. 결국 고시텔 앞까지 다시 와서야 해리가 먼저 손을 흔들었다. 나도 손을 들었다. 그러나 나도 해리도 머뭇거릴 뿐 돌아서지 못했다. 해리가 고개를 떨군 채 헛발질을 몇 번 하더니 약간 찡그린 채 나를 쳐다보았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그새 코가 좀 빨개졌고 눈물이 맺혀 있었다. 안 울려고 찡그리는 얼굴에 어린 해리가 있었다. 옛날에도 쟤는 참아보려고 꼭 저렇게 찡그리곤 했다. 그게 너무 가엾어서 안아줬었다. 내 아픈 첫사랑은 그렇게 시작됐다.

“있잖아, 뮤. 나랑 가족 할래?”

/ 작가소개 /

황선미 작가 사진

황선미(1963~)

소설가

<소설>
『나쁜 어린이 표』 , 『마당을 나온 암탉』 , 『뒤뜰에 골칫거리가 산다』, 『들키고 싶은 비밀』 , 『푸른 개 장발』 , 『과수원을 점령하라』 , 『주문에 걸린 마을』, 『어느 날 구두에게 생긴 일』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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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6-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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