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연재소설

《거기까지》먼지 - 4

<마당을 나온 암탉 />의 황선미 작가의 새로운 청소년 소설 : <거기까지> 먼지 -4<마당을 나온 암탉 />의 황선미 작가의 새로운 청소년 소설 : <거기까지> 먼지 -4

27일 9시 블랙콜 더스티.

처음 보는 쪽지다. 혹시 더스티가 나를 여기로 데려왔나. 기하도 그들이 불러서 온 거고? 하긴, 그들이 기하에게 연락하려고만 들면 나 아니라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렇다면 굳이 이런 쪽지를 왜 나한테 남겼는지 모르겠다.

27일이면 오늘이다. 오늘 밤에 블랙콜로 오라는 거다. 나는 쪽지를 다시 주머니에 넣으며 수납창구로 갔다. 그런데 누가 이미 계산을 마친 뒤였다. 기하 이 자식. 도대체 요즘 뭘 훔치는 걸까. 아무래도 이 돈은 돌려줘야 뒤탈이 없을 것 같다.

나는 밖으로 나가려다 흠칫 돌아섰다. 병원으로 막 들어온 엄마를 본 것이다. 피하고 나니 우습다. 숨기까지 할 건 뭐람. 나는 엄마가 허둥지둥 응급실로 들어가는 걸 숨어서 지켜보다 밖으로 나갔다. 이런 데서 엄마를 감당할 자신도 없고 엄마가 안심하는 것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우산도 없는데 비가 흩뿌리고 있었다. 옛날부터 이런 날이 제일 싫었다. 춥고 찝찝하고 더 배고프고 혼자라는 걸 온몸으로 확인하게 되는 이런 날씨. 안전한 애들과 길거리 애들이 확실하게 구분되는 빌어먹을 날씨.

서비스 센터에서 휴대폰부터 찾았다. 문제가 없는지 다시 확인하며 직원이 ‘그동안 문자가 많이 왔네요’ 했지만 나는 받자마자 주머니에 찔러 넣고 전철역으로 갔다.

비를 피해 들어왔을 뿐 갈 데는 없었다.

나는 간이의자에 앉아 전철이 들어왔다 빠져나가는 걸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몸뚱이만큼 커다란 악기를 짊어진 여자애가 내 앞에서 전철을 기다리기도 했고 유창한 영어로 대화를 주고받다가 웃음을 터뜨리면서 대학생들이 지나가기도 했다. 코앞에서 전철 문이 닫혔다고 발을 구르는 사람. 큰 소리로 통화하는 사람. 살아야 할 이유가 분명한 그들을 보고 있자니 그들의 세상에 잘못 끼어든 기분이 든다.

여기서 몇 정류장만 가면 베네치아가 있다. 거기라도 가고 싶지만 윤이 주중에 며칠만 나가는 거라고 들은 것 같다. 펑키 머리도 신경 쓰인다. 어쩐지 그가 나를 알고 있다는 기분이 드는데. 예민해진 탓인가.

전화가 왔다. 엄마다. 갑자기 가슴 밑바닥이 떨렸다. 나는 진동이 실컷 울리다 잠잠해질 때까지 그냥 보기만 했다. 액정이 까매졌다. 나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내쉬며 휴대폰을 열었다. 몇 가지 앱에 숫자를 껴안은 빨간 동그라미가 꽃처럼 피어 있었다. 내 꽃봉오리는 일곱 번 필 수 있어. 나는 열두 번. 나는 열아홉 번. 향기인지 독인지 알 수 없는 그것들을 나는 하나하나 열기 시작했다.

<거기까지 /> 먼지 -4

내키지 않았지만 배가 고프니 어쩔 수 없었다. 햄버거에 콜라 한 잔. 혹시 기하랑 엮이더라도 최소한으로 대가를 치러야 한다. 틈새 라면이 더 싸지만 그것으로는 내일 아침까지 못 견딘다. 밥상을 꼬박꼬박 받은 것도 아닌데 그사이 엄마 밥 때문에 길거리 면역력이 꽤 약해진 것 같다.

콜라의 마지막 탄산 한 방울까지 빨아들이고 일어났다. 여기서도 길 건너편 병원이 잘 보여서 나는 일 층 ‘바른 가정의학과’를 보면서 양상추를 씹어 먹었고 이 층 ‘최송은 치과’를 보며 손가락에 묻은 소스를 핥아먹었다. 최송은. 한 번도 고개 숙인 적 없을 것 같은 그 여자 이름이 최송은이었다. 최송은. 삐져나온 피클을 마저 챙겨 먹으며 웅얼거려 보았는데 확실히 김난희와 어감부터 다르다. 야무지고 고집이 셀 것 같고 좋은 집에서 자랐을 것 같은. 졸업도 하기 전에 임신했다고 자식을 쫓아내는 집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그런 집에서.

더스티가 정한 9시까지 나는 햄버거 가게에서 죽치고 앉아 시간을 죽였다. 그동안 유리방에 플러그를 꽂고 대기 중이었던 문자는 모두 마흔세 건. 그중 반이 스팸이었다. 내 환상은 먼지처럼 흩어져버리기도 했고 지루하게나마 확인되기도 했다.

혜인은 결국 아무 연락도 하지 않았다. 그러면 그렇지 생각하면서도 그 믿음이 깨지는 게 가장 속이 아팠다. 윤은 예상대로 꼬박꼬박 문자를 남겼지만 너무 빤해서 지루했고 다 읽으려니 짜증마저 났다. 를 친구로 받아들이기로 한 게 잘한 일인지 모르겠다. 도진이 꼭 저 같은 문자를 딱 한 번 남겼다. 무. 지금 이 현실이 꿈이라는 걸 증명할 수는 없을까.

기하의 문자는 예상 밖이었다. 이제부터 이 번호야. 그사이 휴대폰을 바꿨다는 거였다. 날짜를 보니 이미 나흘 전이다. 그러니까 폐기시킨 휴대폰 때문에 내가 어제 그 고생을 했던 거다. 정말이지 기가 막힌다. 그런데도 병원에 찾아온 걸 보면 더스티와 기하가 어떤 식으로든 연결이 돼 있는 모양이다. 전화기가 한두 푼도 아니고 번호까지 이렇게 바꿀 수 있다니 아무래도 이 자식은 내 상상 밖의 인물이 틀림없다. 전교 성적 1퍼센트는 뻥일지 몰라도 머리가 좋다는 건 인정한다. 뭘 확인해서가 아니다. 눈 돌아가는 것부터 비상한 애다. 스팸 같기도 하고 단순히 잘못 온 것 같기도 한 문자도 있었다.

오랜만이다. 연락해.

지워버릴까 하다 클릭하게끔 유도하는 주소가 없어서 그냥 둬보기로 했다. 아무 상관없지만 혜인 때문이기도 했다. 기대했던 혜인의 플러그가 없는 것에 실망한 대신 이 플러그에 호기심이 발동한 거다. 단순히 잘못 온 것일 수도 있지만 깨지기 전까지는 마음대로 상상해도 되니까.

잘 모르겠다. 좋아하지 않아도 친구라고 할 수 있나. 유리방에서 겨우 버티는 동안 대기 상태의 플러그를 꽂은 애들은 도진, 윤, 기하. 혜인은 없었다. 인사 정도는 주고받으며 어울렸던 학교 친구들도 전혀. 엄마 집으로 들어가면서 나는 시설이나 길거리에서 알고 지내던 애들을 다 털어냈다. 필요해서 어울렸을 뿐 친구가 아니라고 판단했으니까. 생각해보니 그건 틈새 애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도 얘들이 나와 이어져 있다는 걸 이렇게 확인하고 만다. 빗발이 더 굵어져 블랙콜로 가는 동안 옷이 다 젖었다.

클럽 앞은 한산했다. 입구를 지키고 있던 그 청년도 보이지 않았고 들어가는데 입장료도 받지 않았다. 무대에서는 어떤 여자 가수가 전자피아노를 치면서 혼자 단조로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몇 안 되는 손님들은 저희끼리 떠들고 가수도 혼자 노는 식이었다. 스모키 화장을 했어도 겨우 스무 살이나 됐을까 싶은 청년이 다가왔다. 딱 달라붙는 검은색 양복이 그를 더 어려 보이게 했다. 저번 청년도 저런 차림이었는데 여기 단복인가 보다. 내가 고등학생이라는 걸 알아본 눈치였지만 그는 덤덤하게 물었다.

“일행 있어요?”
“더스티가 보자고 해서 왔어요.”

내가 쪽지를 보여주자 그가 그걸 가지고 안으로 갔다. 나는 벽 쪽으로 가서 여자 가수가 혼자 노래하는 걸 물끄러미 보았다. 이런 데서도 저렇게 노래하는 가수가 있구나. 참 재미없게도 부른다. 이런 데서는 다들 미친 듯이 소리치고 악기를 두들기고 헤드뱅잉을 막 하는 줄 알았다. 당연히 그런 공연도 있겠지만 생각보다 클럽이라는 데가 시시하다. 뭐 이 정도를 가지고 선생들은 그렇게 애들을 겁주는지.

“공연 끝나야 되니까, 좀 기다리래요.”

종업원이 나를 안쪽의 탁자로 안내했고 메뉴판도 갖다 주었다. 아무것도 시키지 않을 거라 나는 메뉴판을 보지도 않았다. 시간까지 정해주면서 오라더니 자기들은 공연을 해야 되니 기다리라? 그럼 당연히 9시가 넘는다. 뭐하자는 건지 좀 두고 보자는 오기가 생겼다. 어차피 갈 데도 없다. 날씨 탓인지 지하실에서 나는 공기 냄새가 더 탁하게 느껴지지만 길거리보다야 백 번 낫다.

종업원이 쟁반을 들고 오더니 그걸 내 탁자에 내려놓았다. 똑같이 생긴 컵에 맥주와 콜라가 한 잔씩. 나는 종업원을 빤히 보았다.

“더스티가 주문한 거예요.”

나는 의자에 기댄 채 맥주와 콜라를 뚫어져라 보았다. 뭘까. 이러는 이유가. 이것도 기하랑 관계가 있을까. 그러면 뭐든 좋을 것 같지 않다. 내가 노려보는 사이에 양쪽 유리컵에서 물방울이 맺혔고 흘러내렸다. 차가운 땀이거나 눈물일지도 모를 물방울. 그렇게 자기 체온을 조절하며 맥주도 식어가고 콜라도 식어갔다. 그러는 동안 무대는 여러 번 가수를 바꾸어가며 다른 소리와 다른 조명으로 살아났다. 어느새 홀도 가득 차고 내가 상상하던 귀가 터질 듯한 무대와 관객들이 일제히 뛰는 광경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더스티가 나왔다.

멤버 다섯에 문신처럼 화장한 여자가 전자기타를 메고 가운데. 키가 크고 늘씬하다. 비슷한 느낌을 받은 적이 있다. 틈새. 거기서. 원탁에서 김밥을 먹던 여자애. 어쩐지 걔 같다. 기하도 거기서 더스티를 처음 봤을까. 조명 때문인지 요란한 화장이 별로 튀지도 않고 머리까지 사자 갈기 같아서 무대와 잘 어울리는 편이었다. 얼굴을 드러내기 싫거나 너무 평범해서 튀려고 저런 콘셉트를 선택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목소리가 예상 밖이었다. 노래하기 전, 관객에게 하는 던진 한마디.

“기다리던 날입니다.”

시선이 탁자로 떨어졌다. 마른침이 삼켜졌다. 또다시 한마디.

“여러분도 그러신가요?”

여기저기서 동시에 반응이 터졌다. 네에! 호오! 오케이! 나는 콜라 잔을 들었다가 놓고 맥주를 단숨에 들이켰다. 이제 알겠다. 나한테 왜 그렇게 자꾸 연락이 왔는지. 기하랑 상관없이 나를 불렀던 거다.

해리. 해리가 저기 있다.

/ 작가소개 /

황선미 작가 사진

황선미(1963~)

소설가

<소설>
『나쁜 어린이 표』 , 『마당을 나온 암탉』 , 『뒤뜰에 골칫거리가 산다』, 『들키고 싶은 비밀』 , 『푸른 개 장발』 , 『과수원을 점령하라』 , 『주문에 걸린 마을』, 『어느 날 구두에게 생긴 일』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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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6-02-18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