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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연재소설

《거기까지》먼지 -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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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바람은 그새 더 싸늘해져서 나는 어깨를 움츠리고 전철역으로 갔다. 추워서인지 손등이 더 심각하게 느껴졌다. 처방 약을 먹었으면 벌써 아물었을 게 약 없이 나으려니 이렇게 고생이다. 내 잘못이지만 결국 그가 헤집어놓은 상처가 덧나고 만 셈이다. 대충 견뎌보려다가 약국에 가서 보여주고 비상약을 사 먹은 게 전부였다. 약사조차 병원에 가라며 약을 안 주려고 했었다. 무슨 고집이었는지 모르겠다. 나를 괴롭혀봐야 나만 손해지 누가 대신 아파할 것도 양심의 가책을 느낄 것도 아닌데.

전철에서부터 배가 불편했다. 너무 여러 가지를 한꺼번에 먹어서인지 펑키 머리 때문에 거북했는지 너무 추워서인지 몰라도 꼭 체한 것 같았다. 아니 분명히 체했다. 심호흡을 하고 트림을 하면서 참아보려고 했으나 끝내 진땀이 나고 어지럼증으로 토하기 직전이었다. 옆에 있던 사람들이 불안한 낌새를 챘을 정도였다.

무슨 정신으로 전철에서 내리고 바깥으로 나왔는지. 분에 안 맞는 걸 먹으니 이 모양이지. 틈새 라면이면 충분할 주제에.

볼썽사나운 짓을 큰길에서 할 수가 없어 기를 쓰고 뒷골목으로 뛰었다. 급기야 남의 멀쩡한 가게 간판을 붙들고 먹은 걸 고스란히 게워냈다. 거기서 얼쩡거리다 걸리면 무슨 꼴을 당할까 싶어 재빨리 피하는데 다리가 꼬였다. 실수가 아니었다. 머리가 핑 돌고 골목의 불빛이 어지럽게 흔들렸다. 기어이 어지럼증이 일을 내고 만 것이다.

넘어지고 일어나고 또 넘어지면서 나는 최선을 다해 걸었다. 뭐든 붙잡고 싶은데 도무지 잡히지를 않아 자꾸만 헛손질을 하게 됐다. 온갖 사람들 소리. 뒤엉키는 불빛. 블랙콜. 냄새. 응급차 소리. 꿈틀거리는 무늬. 갈라진 거울.

아프다. 너무 아프다. 어지러워 땅 밑으로 꺼질 것만 같다. 발가락에 쥐가 나서 펴지지가 않아 땅을 디딜 수가 없다. 땅에 닿으려고 안간힘을 써보지만 오그라든 발가락은 말을 듣지 않고 도무지 잡히는 게 없어서 나는 죽을힘을 다해 허우적댔다. 살고 싶다. 여기를 벗어나 살아야만 한다. 숨이 막힌다.

나의 모든 구멍을 다 틀어막은 세상. 검은 물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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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렴풋이 정신이 들기 시작하며 맨 먼저 든 생각. 다행이다. 살았어.

가수면 상태지만 안전한 곳에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다. 혹시라도 착각일까 두려워 굳이 눈을 뜨려고 하지 않았다. 분명치 않지만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허약한 애야. 뮤.

눈알이 꿈틀했다. 그러나 붙어버린 눈꺼풀이 도무지 열리지가 않았다. 결국 몇 번쯤 눈알을 굴리다 스르르 힘이 풀려버렸다. 눈알에서 뜨거운 게 흘러 머릿속 깊은 곳으로 천천히 식으며 흘러드는 듯했다.

“뮤. 너 안 오면 나 죽을 거야. 그래 버릴 거야. 여기만 아니면 어디라도 괜찮아. 새벽 기차 아니면 못 도망쳐. 술 취해서 뻗으면 못 일어나거든.”

해리가 울며 내 손을 잡았다. 귀밑에 담뱃불로 새로 지져진 상처가 검붉게 부풀어 있었다. 나는 진땀으로 손이 끈적해져서 해리 손을 놓고 싶었다. 내 손이 이렇게 끈적거린다는 걸 해리가 알아버리는 게 싫었다.

해리의 목에 둥그런 딱지가 채 떨어지기도 전에 그 늙은이가 해리를 또 건드렸다. 목에 담뱃불 자국이 나던 날, 나는 숙제 때문에 그 집에 갔고 해리가 비명 지르며 당하는 걸 처음 보았다. 너무나 고통스러워하면서 그 얼굴이 나를 보았고 우리는 그 뒤부터 차마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해리가 먼저 나를 찾아왔다. 같이 도망쳐달라고. 부모 잃은 어린애를 먹이고 입히고 학교 보내주는 건 아무나 못하는 일이라고 누누이 확인시키는 할아버지로부터. 귀여우니까 안아주는 거라고 꼼짝 못하게 하는 주정꾼으로부터. 할머니는 늘 해리를 흘겨보았고 은혜는커녕 싹수가 글러먹은 애라고 함부로 대했다. 나도 도망치고 싶었다. 여기만 아니면 어디라도 좋을 것 같았다. 해리와 함께는 아니었다. 나는 해리한테서도 벗어나고 싶었다. 동네 애들과는 비교도 안 되게 예쁜 해리. 나는 걔를 너무나 좋아했고 걔가 징그러웠고 더럽게 느껴져 끔찍했다.

그날 뭐 때문에 다 저녁에 그 집에 갔는지 모르겠다. 엄마가 온다고 했던 것 같다. 엄마랑 같이 살 거라고 믿고 인사를 하러 찾아갔을 것이다. 그런데 취해서 몸도 가누지 못하는 늙은이가 나를 보더니 느닷없이 곡괭이를 집어던졌다. 해리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그리고 이튿날 영빈이 죽었다. 진땀으로 손바닥이 미끄러웠다. 나는 천천히 일어나 등을 기댔다. 눈알에서 뜨겁게 흘렀던 게 눈물이었을 거다. 이 기억에서만 나는 온몸이 뜨거워지는데 아마도 그게 다 눈물일 것이다. 절대로 빠져나오지 않는 지독한 물.

짐작대로 병원이었다. 주변에 내가 아는 사람은 없었다. 뮤. 얼핏 들었던 소리도 역시 악몽의 한 자락이었던 거다. 벗어날 수 없는 악몽. 아무리 잊고 싶어도 내 몸에 새겨진 또렷한 기억. 사면동 그 촌구석에서 나는 저주받은 시간을 보냈고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족쇄에 묶여버렸다.

“너, 울었냐?”

기하다. 나는 걔를 멍하니 보며 눈 주위를 만져보았다. 울다니. 나한테서 눈물 같은 게 나왔을 리 없는데. 엄마만 내가 울고 싶은 걸 알아차리는 줄 알았다. 얼굴이 퉁퉁 불었잖아. 엄마한테 들키는 것도 싫은데 하필이면 기하다. 그나저나 얘가 왜 여기 있을까. 나 모르게 무슨 일이 있었을까.

“어떻게 된 거야?”

기하가 대답도 않고 그 째진 눈으로 나를 빤히 보았다. 그러더니 잠자코 주머니에서 돈뭉치를 꺼내 툭 던졌다. 학생 주머니에서 나오기에는 큰돈이었다. 뭔지 몰라도 이 자식한테서 냄새가 난다. 저번에 본 얘 엄마를 생각하면 의심을 안 할 수가 없다.

“이자까지 쳤다. 서로 빚 없는 거다.”

한주먹도 안 되는 게 어지간히 폼을 잡는다. 어이가 없다. 상황이 이렇게 뒤바뀌다니. 저 자식 정말 싫은데 왜 이런 식으로 엮인담. 만약 나를 여기까지 데려와줬다면 투덜거릴 처지가 아니지만.

나는 돈을 집었다. 구린 돈일지 몰라도 나는 얘한테 받을 게 있고 병원비도 내야 하니 거절할 수가 없다. 손에 깨끗한 붕대가 감겨 있었다. 통증도 없다. 무의식중에 안전해졌다고 느낀 게 이것 때문일지도 모른다. 막판에 통증이 팔뚝까지 뻗쳐서 이러다 팔 하나를 못 쓰게 되는 거 아닌가 걱정이 됐었다.

“나 여기, 네가 데려왔냐?”

혹시 엄마한테 연락이 갔을까. 집까지 알아낸 애가 그건 못할까. 이번에도 기하는 대답하지 않았다. 까칠하기는 해도 나한테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뭘까. 뭐 때문에 저러는 걸까.

“체크. 생각보다 약골인가 봐. 이석증인가 뭔가, 검사가 더 필요하다던데. 알면 알수록 이상한 놈이다 너. 간다.” “간다고?”

나도 모르게 약한 소리가 튀어나왔다. 뜻밖이었는지 기하도 나를 보더니 피식 웃었다. 그러고도 가버렸다. 생긴 거랑 똑같이 인정머리 없는 놈이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다 침대에서 내려와 얼른 신발을 챙겨 신었다. 응급실 간호사들은 다른 환자 때문에 내 쪽은 보지도 않았다.

의사가 뭐든 검사를 더 하려들지 않게 나가야겠다. 돈도 없고 엄마가 알아봐야 시끄럽기만 할 거고. 병원비 내려고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는데 쪽지가 하나 따라 나왔다.

27일 9시 블랙콜 더스티.

/ 작가소개 /

황선미 작가 사진

황선미(1963~)

소설가

<소설>
『나쁜 어린이 표』 , 『마당을 나온 암탉』 , 『뒤뜰에 골칫거리가 산다』, 『들키고 싶은 비밀』 , 『푸른 개 장발』 , 『과수원을 점령하라』 , 『주문에 걸린 마을』, 『어느 날 구두에게 생긴 일』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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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6-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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