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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선미 연재소설 '거기까지'

《거기까지》독 - 4

<마당을 나온 암탉 />의 황선미 작가의 새로운 청소년 소설 <거기까지>독 - 4<마당을 나온 암탉 />의 황선미 작가의 새로운 청소년 소설 <거기까지>독 - 4

내가 아무리 간절해도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이 있다는 걸 나는 너무 일찍 알아버렸다. 거기에 이렇게 또 하나가 보태졌다. 돌아보니 내가 아는 애들이 다 어디로 가고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속이 텅 비었다. 설마 나도 걔가 좋았을까. 누구를 좋아한다는 게 이렇게 시시하다니. 영화도 뮤직비디오도 전부 다 구라. 아니면 좋아한 게 아니었거나.
전철을 탔다. 망가진 휴대폰을 만작거리며 이제는 자주색으로 변해버린 상처를 잠자코 들여다보았다. 만져보니 뜨듯하게 열까지 난다. 이러다 가운데가 노랗게 변하면서 근지러울 테고, 그때 짜내면 원인은 처리된다. 이 정도 사소한 상처는 흉터도 없이 아물 것이다. 선명한 체크 모양의 이 흉터는 뼈가 보였을 만큼 깊게 찢어지고 남은 흔적이다. 그때는 손가락 두 개가 아예 부러지는 줄 알았다. 어린애한테 곡괭이를 집어던졌을 만큼 미친 그 늙은이. 소름이 쪽 돋으며 퍼뜩 정신이 들었다. 마침 문이 열려서 도망치듯 전철에서 내렸다. 또 쓸데없는 생각에 빠질 뻔했다. 고작 여자애 하나 잃은 걸 가지고. 걔보다 더한 것도 잃고 또 잃으면서 살았는데.
지하도에서 나오니 화실과 틈새 중간쯤. 올 데가 여기뿐이라는 게 씁쓸했다. 그나마 화실에는 가는 날도 아니고 그림도 안 가져온 터라 틈새로 가는 수밖에 없었다. 마치 결정을 기다리기라도 한 듯 위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고픈 건지 아픈 건지 위통증이 점점 심해져 뭐든 먹어야 했다. 틈새는 한 끼 때우러 온 사람들로 가득했고 마침 긴 탁자의 자리 하나가 남아 있었다.

원탁을 차지한 젊은이들이 유난히 시끄러웠다. 저번에 본 여자애도 끼어 있는데 잠자코 김밥만 먹고 있지만 분위기가 그들과 일행인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원탁 쪽 창문을 보느라 여자애와 눈이 마주쳤으나 걔가 이내 고개를 돌렸고 내 신경도 창문 너머에 쏠려 있어서 건성으로 보아 넘겼다.
라면을 끼적이며 부어오른 손등을 보았다. 금방 곪을 것 같다. 그러면 터뜨릴 수 있고 이 상처도 끝. 어느새 바깥이 어둑해졌다. 곧 건너편 건물에 불이 꺼질 것이다.
벌떡 일어나 틈새를 나왔다. 계산할 때 원탁의 젊은이들이 나를 보는 게 느껴졌다. 무심코 본 것과는 다른, 흥미로운 뭔가를 발견한 듯한 껄끄럽고 부담스러운 시선이었다. 이런 건 똑바로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얼굴에 라면 가닥이라도 붙었나 싶어 쓱 문지르고 길을 건너갔다.

불안하고 머리가 무거웠다. 뭘 어쩌겠다는 건지 나 자신도 알 수 없었다. 그냥 부딪쳐보고 싶었다. 그가 어떤 얼굴일지 구경이 하고 싶었다. 핑계는 충분하다. 의사가 봐야 할 손등. 이보다 더한 상처도 혼자서 감당한 적 많지만 의사가 코앞에 있는 상황 아닌가. 더구나 이 상처에는 그의 몫도 있다. 그가 전혀 모른다고 해도.
진료가 거의 끝날 시간인데도 기다리고 있는 환자가 아직 몇 명 있었다. 피곤해 보이는 간호사들은 무표정하게 환자 이름을 부르거나 기계적으로 처방전을 내주었다. 간호사 중 하나가 나를 보고는 단조로운 말투로 말했다.

“학생. 오늘 진료는 끝났는데.”

잠시 주춤했지만 나는 그렇게 말한 간호사를 빤히 보는 것으로 나 자신을 추스르고 안으로 들어섰다. 앉아 있던 중년 환자가 거들어줬다.

“아픈 게 어디 진료 시간 딱딱 맞춰서 맘대로 되나.”

말해놓고 나니 겸연쩍었는지 허허 웃고 헛기침 한 번. 아무도 대꾸가 없자 실없이 또 나섰다.

“원장님 방송 나오고 나서 환자가 부쩍 늘어난 거 같어. 나 같은 회사원이야 진료 시간 늘어나서 다행이지만,
아가씨들은 퇴근 시간이 늦어지겠어.”

“아가씨 아니고, 간호사거든요. 안으로 들어가세요.”

간호사의 깐깐한 반응에 중년 환자가 뚱한 얼굴로 일어나더니 너 때문이란 듯 나를 스윽 보고 진료실로 들어갔다. 표정 관리하며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저 간호사는 오늘 하루가 꽤나 힘들었나 보다. 말에 짜증이 반이다.

“학생. 여기 주민번호랑 이름. 이 병원 온 적 있어요?”

“아뇨.”

엑스표가 그어진 대기자 명단 끝에 이름을 적자 간호사가 컴퓨터로 내 신원을 확인했다. 그리고 나를 한 번 쳐다보았다. 저런 반응도 이제는 무덤덤하다. 한 부모 가정. 그나마 흔해빠진 성씨인 걸 고마워하라고 엄마가 말한 적 있다. 희귀한 성씨였으면 남들이 더 빨리 눈치 챘을 거라나. 중3 때 담임이 얼마나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는지 알지도 못하고. 차마 그 저질스러운 면상을 칠 수가 없어 책상만 걷어찼는데도 정신이 쑥 빠지게 얻어터졌다. 담임의 호출까지 엄마가 무시하는 통에 내 중학 시절 마지막은 아주 화려했다.
보통은 간호사가 먼저 어디가 불편한지 묻는다. 너무 피곤해서인지 간호사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먼저 온 환자들이 진료실에 들어갔다 나올 때마다 긴장 수위가 점점 높아졌다. 그도 내 차트에서 ‘김난희’라는 이름을 보게 될까. 그 이름을 기억할까. 그 바람에 나를 알아보게 될까.

“들어가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나는 일어났다. 동시에 뒤가 당겨지는 것처럼 뻐근했다. 진료실로 가는 건 크게 한 번 숨이라도 들이마셔야 하는 일이면서 결국 피할 수도 없게 된 일이었다. 나는 진땀 나는 손바닥을 허벅지에 문지르며 천천히 들어갔다.

그는 방금 전 환자의 기록을 정리하느라 컴퓨터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러다 그의 시선이 나를 지나쳐 밖을 향했다.

“오늘 이 환자가 마지막인가요?”

몹시 피곤해하던 간호사가 친절하게도 안에까지 와서 알려주었다.

“네. 그리고 치과 원장님 내려오셨어요.”

그가 안경 너머로 나를 보았다. 안경을 쓰는 줄 몰랐다. 의사 가운이 사람을 저렇게 달라 보이게 하는구나. 샤워실에서 갑자기 마주쳤을 때와는 모든 게 달랐다. 나는 쓸데없이 긴장했고 혹시라도 그가 내 숨소리를 알아챌까 봐 무척 신경이 쓰였다.

“어디가 불편하지?”

그가 컴퓨터와 나를 번갈아 보며 물었다. 나는 그가 이미 관자놀이의 흉터를 보았다는 걸 느꼈다. 목소리는 다정하다. 환자를 항상 이렇게 대하는지 내가 샤워실에서 마주친 학생이라는 걸 알고 저러는지 헷갈린다. 나는 잠자코 그의 탁자에 손을 올렸다. 그는 이번에는 나를 보고 상처를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내 손을 잡았다.
촉수가 건드려지기라도 한 듯 나도 모르게 움찔했다. 유치하게도 손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가 피식 웃었다.

“겁먹었나? 애도 아니면서 뭘.”

그는 간호사를 불렀고 노련하게 상처를 처치했다. 긴장한 탓인지 곪을 대로 곪아서인지 그의 전문성 때문인지 나는 그다지 아픈 줄을 몰랐다. 어쩌면 닿을 정도로 가까워진 그의 이마, 머리카락, 비누 냄새, 낮은 음성 따위에 신경을 빼앗긴 탓인지도 모른다.
여지없이 손바닥에 진땀이 났고 그가 중얼거렸다. 다한증인가. 그러더니 옆에 있던 휴지를 꾹 쥐었다가 놓았다. 구겨진 휴지를 보는데 머릿속에 날카로운 바늘이 곤두서는 듯했다.

“주사 맞고 가요. 항생제 처방할 테니까 잘 먹고, 이틀 뒤에 보자고.”

그가 컴퓨터에 기록을 하며 덤덤하게 말했다. 그러니까, 그가 환자를 대하는 태도는 대략 정해져 있고 지금도 예외는 아니었던 것이다. 나는 엉거주춤 일어나 거즈가 붙은 손을 보고 그를 슬쩍 돌아보았다. 그가 미간을 찡그리며 나를 다시 보았다.

<마당을 나온 암탉 />의 황선미 작가의 새로운 청소년 소설 <거기까지>독 - 4

“우리, 어디서 본 적 있나?”

순간 나쁜 공기가 훅 들어오는 것 같았다. 나는 그대로 진료실을 나와버렸다. 감당 못하게 속이 답답했다. 무슨 생각으로 여길 왔을까. 혹시 나도 모르게 뭘 기대했을까. 의례적인 처치 말고는, 샤워실의 그 일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태풍의 근원이 나비의 날갯짓이라더니, 내가 이렇게 함부로 뒤흔들려도 태풍의 근원은 저토록 조용하고 무사하다.
대기실 의자에는 그새 여자 셋이 들어와 기다리고 있었다. 중학생처럼 보이는 여자애들과 한눈에도 여유가 넘치는 아줌마. 나는 당황해서 시선을 피했다. 그들이 누구인지 본능적으로 알아차리고 말았다. 아니나 다를까, 치과 원장일 그 아줌마가 그의 방으로 가며 투덜거렸다.

“당신, 진료 시간 원상 복귀시켜. 우리를 자꾸만 기다리게 하잖아. 간호사들도 힘들고.”

“학생. 이쪽으로.”

간호사가 먼저 주사실로 들어가며 말했다.
나는 뒤도 안 돌아보고 병원을 빠져나왔다. 여자애들이 놀라서 쳐다보고, 간호사가 부르고, 처방전 어쩌구 하는 소리가 어지럽게 뒤통수에 들러붙었지만 도망치는 것 말고는 할 게 없었다.

/ 작가소개 /

황선미 작가 사진

황선미(1963~)

소설가

<소설>
『나쁜 어린이 표』 , 『마당을 나온 암탉』 , 『뒤뜰에 골칫거리가 산다』, 『들키고 싶은 비밀』 , 『푸른 개 장발』 , 『과수원을 점령하라』 , 『주문에 걸린 마을』, 『어느 날 구두에게 생긴 일』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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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6-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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