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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연재소설

《거기까지》독 - 3

<마당을 나온 암탉 />의 황선미 작가의 새로운 청소년 소설 <거기까지>독 - 3<마당을 나온 암탉 />의 황선미 작가의 새로운 청소년 소설 <거기까지>독 - 3

욕실에서 나오는데 문자 알림 소리가 났다. 맨 먼저 떠오른 사람이 혜인이었다. 나는 천천히 물기를 닦고 옷을 입고 머리를 매만졌다. 시리얼에 우유까지 부었다. 신경이 온통 문자에 쏠려 있는데도 일부러 무시하고 나에게 집중했다. 어려서부터 몸에 밴 습관이다. 누가 비난할수록 옆에서 싸움질이 벌어져도 나를 지키고 온전하게 버티려면 이게 최선이었다. 더욱 단단하게 안으로 웅크리기. 결국 시리얼을 다 먹고 나서야 문자를 확인했다.
별거 아니었다. 벌거벗은 채 이것부터 봤으면 얼마나 더 맥이 빠졌을까.

안기하 핸드폰보관 더스티

이런 걸 돌려주려는 사람이 다 있다니. 일부러 훔쳐서 팔아먹기까지 하는 고가인데 착하기도 하셔라. 그나저나 뭐든 훔치는 도둑놈이 이걸 누구한테 털렸다는 게 재미있다. 원숭이가 나무에서 떨어진 건가.
‘더스티’라는 글자에 눈이 멎었다. 설마 거기서 그 꼴이 됐을까. 아무리 밤무대라도 노래하고 연주하는 사람들이 깡패도 아니고. 그건 아닐 것이다. 애를 그 꼴로 만들고 전화기 챙기는 것도 말이 안 되고, 찾아가라고 연락까지 하는 건. 패싸움에라도 걸려들었나. 그것도 아니다. 클럽에 간 건 목요일이고 기하가 나를 찾아온 건 금요일이었다.
클럽. 아무리 단속해도 고등학생이 그런 데 가는 거야 뭐. 하지만 만취와 머리가 깨질 정도의 사고는 보통 일 아니다. 나는 물론이고 길거리 형들도 클럽에는 가보지 못했다. 어리고 돈도 없었지만 꼬락서니부터가 입장 불가였기 때문이다. 그래도 뮤지션과 관객 자리가 엄연히 구분됐을 거라는 정도는 상식적으로 안다. 그들과 기하가 따로 만나지 않았다면 전화기 문제가 생길 리 없는 것이다. 하지만 기하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만약 눈곱만큼이라도 아는 사이였다면 절대로 감추지 않았을 거다. 혹시 전화기와 사고가 전혀 상관이 없는 게 아닐까.

“젠장!”

머리를 털어버렸다. 무슨 상관이람. 그런데 왜 이런 연락이 나한테 올까. 저장된 번호 중에서 골랐다고 해도 걔 식구나 학교 친구도 있을 테고, 같이 갔던 도진, 분명히 윤 번호도 있을 텐데.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 잡생각에서 벗어나자면 다른 게 필요했다. 나는 열심히 스팸 문자를 손가락으로 넘기며 눈을 사로잡을 게 없나 뒤적였다. 혜인. 걔 흔적이 보고 싶었다. 충분히 냉정해졌어도 마음 한구석이 여전히 혜인을 놓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절대로 내가 먼저 연락할 리는 없다. 자존심 때문이 아니다. 안 되는 것에는 포기가 빠를 뿐.
나도 모르게 눈썹이 꿈틀했다. 더스티가 보낸 문자가 또 있다. 어제 두 번. 방금 전 하나. 복사해 보낸 것처럼 같은 내용. 뭐지. 왜 하필 나일까. 신경 쓰인다. 꼭 나더러 와서 가져가라는 것 같다.
도진과 윤에게 문자를 보냈다. 윤이 즉각 답을 보냈는데 기하 핸드폰은커녕 기하가 어떤 상태인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또 셰프 얘기뿐이다. 다음 주 화요일에 자기랑 같이 가자고. 셰프가 새로 만든 메뉴를 테스트해달라고 했다나. 셰프라니. 고급스러운 놈. 이런 애가 왜 나를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영빈도 나만 따랐다. 독인 줄도 모르고.
도진은 답이 늦었다. 그날 검정고시 학원 때문에 클럽에 가지 않았다며 자기는 그런 식으로 낭비하는 삶과 거리가 머네 어쩌네…… 결론적으로 기하 상태를 모른다는 거였다.
더스티. 내가 아는 영어 단어와 같은 거라면 ‘먼지’라는 뜻이다. 그룹 이름으로는 아주 별로다. 튀어도 모자랄 판에 먼지라니. 그러니까, 기하가 빠졌다는 멤버는 먼지 소녀. 얼핏 본 초대권 이미지가 생각났다. 문신처럼 화장한 얼굴이 꼭 단체관람 갔던 연극의 배우 같았다. 슬픈 연기를 무표정하게 하는 희극배우. 사실은 그보다 화장이 요란했던 것 같다. 멤버들 중에 유독 눈에 띄었으니까. 그런 애들의 연락이라니. 궁금하기는 하다.

<마당을 나온 암탉 />의 황선미 작가의 새로운 청소년 소설 <거기까지>독 - 3

아침 내내 엄마는 한마디도 안 했다. 말은커녕 아예 없는 사람 취급이다. 피 묻은 옷도 궁금할 테고 내가 돈에 손댔다는 것도 모를 리 없고 어쨌거나 외박도 했는데 말이다. 하다못해 마주 앉은 밥상에서 검붉게 부어오른 내 손을 봤을 텐데도 눈길 한 번 안 주었다. 하긴, 우리는 여태 이렇게 지내왔고 이게 나도 편하다.
교실로 가면서 안경을 고쳐 썼다. 내 시력은 정상이다. 그래도 검은 테 안경을 쓰는 건 관자놀이 흉터를 가리기 위해서다. 감쪽같이 가려지지 않아도 사람들이 흉터부터 보는 경우가 적고 반듯한 학생으로 봐주는 효과도 좀 있다. 우수한 학생은 못 돼도 최소한 나는 튀지도 않고 문제 행동도 하지 않는다. 내신이 전부고 어느 대학에는 꼭 가야 하는 애들과 달리 내 목표는 무사히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것. 초등학교도 중학교도 워낙 너덜너덜하게 겨우 끝내서 이번만큼은 잘하고 싶었다. 엄마가 나를 다시 찾아오고 같이 살자고 했을 때 나는 다짐이라는 걸 했다. 무사히 잘 살아내자고.
혜인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오늘따라 유난히 하얘 보인다. 이렇게 보니까 키도 크고 머릿결도 반짝이고 교복도 좋아 보이고 가방도 비싼 메이커 같고. 아무튼 나랑은 뭐 하나 어울릴 게 없다.
혜인이 단짝이랑 팔짱을 끼고 내 쪽으로 걸어오는 걸 보고 나도 모르게 얼어버렸다. 인사를 할까 말까 망설이다 어정쩡하게 손을 들고 말았는데 단짝이 나를 흘낏 쳐다봤을 뿐 혜인은 눈길도 안 주고 지나갔다. 온몸이 빨개지는 기분이었다. 시설에서 남의 팬티를 훔쳐 입었다가 벌거벗겨졌을 때도 이렇게 무안하지 않았다.
온종일 나는 혜인 근처에 있었다. 뒤통수나 옆모습을 물끄러미 보기도 하고 웃는 소리를 귀담아듣고 일어나서 영어책 읽을 때는 색깔 펜으로 단어에 밑줄도 긋고 모의 총회 시간에는 무조건 혜인을 위해 손뼉도 쳤다. 알아주든 말든 그게 내가 할 일 같았다.
종례 중에 선생이 나를 지목했다.

“김무. 다친 친구를 응급실까지 데려갔다고? 바람직한 일이긴 한데, 혹시 직접 관계가 있는 건 아니지?”

당황스러웠다. 병원에서 저런 고자질도 하나. 모두의 시선이 내게 쏠렸고 나는 무심코 혜인을 보았다. 내 상황이 어느 정도 전달됐기를 바랐는데 혜인의 싸늘한 표정은 나를 슬쩍 보고는 끝이었다. 나는 입술을 힘껏 안으로 말아 깨물면서 선생의 말을 곱씹어보았다. 어쩐지 선생은 내 안경이 가린 관자놀이 흉터를 주의 깊게 봤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문 앞에 있다가 혜인을 막아섰다. 화난 것 같지는 않은데 표정이 아주 차갑다. 얘한테 이런 얼굴도 있었나 싶게 낯설다.

“설명해줄게.”
“됐어. 충분해.”

혜인이 너무나 간단히 냉정하게 나를 거절했다. 뭐가 충분하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나야말로 혜인과의 모든 관계가 거기까지라는 걸 깨닫기에 충분한 말을 듣고 말았다. 다정해야 될 대상과 거리를 두어야 할 대상에 철저히 다른 태도를 보일 수 있는 또 한 사람이 하필 혜인이라는 경험은 겪지 말아야 할 일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되고 말았다. 게다가 걔는 내 앞에서 반장에게 장난을 걸었다. 나한테 그랬듯이 놀리고 발길질하고 어깨에 팔도 걸치고. 손바닥으로 입술을 아프게 문지르며 거기를 벗어났다.

그래. 거기까지.

혜인도 결국 마찬가지였다. 내 사정이나 설명 따위가 조금도 중요하지 않은 이런 경우가 어디 한두 번인가. 내가 아주 싫어하는 놈이 하필 머리가 깨져서 찾아온 사정에 대해, 간밤에 옆방 형이 보던 성인잡지가 내 가방에서 나온 문제에 대해, 위탁 가정의 친아들이 엄마 지갑에서 돈 훔치는 걸 보고도 묵인했다가 결국 도둑 누명을 썼던 일에 대해, 어떤 남자한테 시집가려고 나를 사면동 촌구석에 또다시 버린 엄마 때문에 내가 얼마나 절망적이었는지에 대해 나는 제대로 설명한 적이 없다. 그럴 기회조차 없었다. 내 설명이나 사정이 전혀 중요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내가 뭘 어떻게 할 수 있겠나.
화나고 울고 싶은데 울 수가 없어서 또 진땀이 나기 시작했다. 나는 겨우겨우 숨을 고르며 괜히 휴대폰을 들여다보았다. 손이 떨려서 글자가 잘 안 보였다. 그러다 더스티 문자에 시선이 멎었다. 내친김에 통화 버튼을 눌렀다. 다만 핑계가 필요했을 뿐인데 무심코 던진 낚싯줄에 멍청한 고기가 낚인 것처럼 저쪽에서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딱히 할 말을 못 찾는 사이에 저쪽에서 여보세요, 소리를 몇 번이나 했다.

“저기, 문자 보내셨죠? 안기하 핸드폰.”
“아! 그랬지, 그랬어.”

대뜸 반말이다. 실실 웃는 것도 같고. 거슬리는 소리를 참고 듣자니 얼굴에 벌레가 기어가는 것처럼 경련이 일었다. 괜히 걸었다. 머릿속이 뒤엉켜서 쓸데없는 짓을 하고 말았다.

“어떤 친군지 진짜 궁금하다.”

또 웃음.
친구. 어떤 친구. 뭐가 궁금해.
나를 두고 웃는다. 내가 지금 개떡 같다고 우스운가. 여자 친구가 무시한다고 알지도 못하는 것들까지 웃어.
속이 뒤틀려서 전화기를 패대기치고 말았다. 몇 조각으로 작살난 전화기가 내 멍청한 짓을 당장 확인시켜주었다. 친구 하나가 여동생과 누나 그리고 엄마까지 데리고 떠나버렸다는 걸. 난생처음 가진 비싼 스마트폰까지.


/ 작가소개 /

황선미 작가 사진

황선미(1963~)

소설가

<소설>
『나쁜 어린이 표』 , 『마당을 나온 암탉』 , 『뒤뜰에 골칫거리가 산다』, 『들키고 싶은 비밀』 , 『푸른 개 장발』 , 『과수원을 점령하라』 , 『주문에 걸린 마을』, 『어느 날 구두에게 생긴 일』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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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6-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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