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연재소설

《거기까지》독 - 2

<마당을 나온 암탉>의 황선미 작가의 새로운 청소년 소설 <거기까지>독 - 2<마당을 나온 암탉>의 황선미 작가의 새로운 청소년 소설 <거기까지>독 - 2

기하 녀석이 또 무슨 소리를 할 것처럼 입을 우물거렸다. 나는 돌아섰다. 그리고 뒤도 안 돌아보고 그곳을 떠났다. 온몸에서 진땀이 스멀스멀 빠져나오는 게 느껴졌다. 저 자식을 아는 체하는 게 아니었다. 어쩐지 예감이 좋지 않았다.
달리고 또 달렸다. 병원을 나와 거리를 정신없이 달리면서 보이는 것만 보고 들리는 것만 들었다. 떠오르는 기억도 생각도 막고 싶었다.
무슨 놈의 햇살이 아침부터 이렇게 환할까. 눈이 부셔서 똑바로 걷지를 못하겠다. 어제저녁부터 굶었고 잠도 못 잤으니 어지러울 수밖에. 괜찮아진 줄 알았는데 어지럼증이 도지고 만 것 같다. 어렸을 때는 쓰러지거나 너무 메스꺼워서 온종일 누워있기도 했다. 누ㄷ는 비타민 부족이 원인이라 했고 누구는 애정 결핍, 봉사활동 왔던 의대생은 달팽이관의 문제라고도 했다. 그 말이 마음에 들었다. 비타민 부족이나 애정 결핍보다는 폼 나게 들렸고 의사가 될 사람이 한 말이라 믿음이 갔다. 애들한테 "귓속 달팽이관에 문제가 생긴 거야" 하면서 "어지러운 것과 달팽이는 비슷하잖아"라고 뻥치면 애들은 아, 하면서 나를 보는 눈이 달라졌다. 자기들에게 없는 특별한 걸 가진 애로 봐주는 거다. 그것 때문에 나를 잠깐 맡겨진 부잣집 아이로 보는 애도 있었다.
기어이 몸이 휘청했다. 빈속이 쏟아질 것처럼 꿇어올라서 헛구역질을 하며 골목으로 들어가 간신히 숨을 돌렸다. 오래된 지린내가 코를 찔렀다. 빨리 여기서 나가야한다. 그런데 겨우 숨이 잦아들자마자 몹쓸 기억이 고개를 쳐들었다.

문. 해. 리.
심장에 마른 가지를 꼭꼭 꽃아주듯 기하가 그렇게 말했다.
몸 속 깊은 데가 아프게 꿈틀했다. 아, 이러면 안 된다. 머리를 털고 벽을 짚으며 골목을 빠져나갔다. 썩은 내가 진동하는 이런 데서는 빨리 나가는 게 상책이다. 다른공기로 숨 쉬고 싶다. 밝고 환하고 웃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에서. 남들에게는 평범한 하루하루가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그런 세상에서 평범한 아이로 살고 싶었다. 어떤 부모의 아이. 어떤 집에 사는 애. 놀이공원에 데려가주고 크리스마스 때 산타클로스 이야기를 해주고 생일날 케이크에 초도 꽂아주고 잘못하면 야단치고 보살펴주는 어떤어른들의 아이.
혜인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이미 열한 시가 넘었을 테지만 한 시간쯤은 화를 내면서도 기다려줄 것이다. 착한 애니까 틀림없이 그렇게 해줄 거다. 빨리 가면 된다. 집에 가서 전화부터 하고 사정을 설명하면 봐줄 거다. 옷은 갈아입어야지. 이런 몰골로 걔를 놀라게 할 수는 없다. 걔는 나와는 다른 세상의 단순한 애라서 몹시 겁먹을 거다.
택시를 세워 탔다. 기사가 목적지를 물으며 백미러로 나를 수상쩍게 살폈다. 위험한짓이었다. 돈도 없이 택시를 타는 건 경찰서로 직행할 수 도 있는 일이다. 아무리 침착하려고 해도 지금 나는 불안해 보일 것이고 피 묻은 행색은 충분히 의심할 만하다. 그러나 생각해보니 무서워할 이유가 없었다. 병원에 연락해보면 다 확인될 일. 그런데도 이 찜찜하고 불안한 기분. 가슴팍을 더럽힌 핏자국처럼 나를 함부로 건드리는 정체. 듣지 말아야 할 이름을 듣고 말았다. 그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도려내고 싶을 만큼 불쾌한 기억의 끄나풀이 건드려지고 만 것 같다. 거기에 사로잡히기 전에 혜인에게 가고 싶다. 나는 정신을 가다듬고 기사에게 최대한 정중하게 부탁했다. 택시가 아파트로 막 들어설 때였다.

“아저씨. 제가 지금 택시비가 없는데요, 잠깐만 기다려려주시면 집에 가서 가지고 나올께요.”

“뭐어?”

기사가 당장 돌아보았다. 택시가 순간 휘청했지만 기사는 한숨을 쉬면서도 운전을 계속했다. 여기까지 와서 나를 내려놔봐야 자기만 손해라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다행히 경찰서로 가지도 않았다.

“아저씨. 제 지갑 맡기고 올라갔다 올게요. 학생증이랑 학원 등록증 들어 있어요. 오분, 넉넉잡아 십 분이면 돼요.”

"인마. 오 분, 십 분이면 돈이 얼만 줄이나 알아? 겨우 이딴 걸로 널 믿으라고? 내가 원, 별꼴을 다......"

“죄송해요.”

병원에서 나를 붙잡아둔 방법을 써먹은 셈인데 나쁘지 않다. 진작 이럴걸. 그랬으면 약속도 지키고 그따위 소리도 안 들었을걸. 까짓 학생증이 뭐라고 그는 빈 지갑을 담보로 잡았고 나는 쏜살같이 집으로 뛰어갔다. 문 앞에 '뻑규'라고 휘갈긴 피자가게 전단지가 떨어져 있었다.
긴장해서 번호를 잘못 누르는 바람에 요란한 경고음이 울렸고 당장 욕이 튀어나왔다. 나는 웃옷을 벗어던지고, 손에 잡힌 티셔츠에 목을 끼우고, 전화기를 주머니에 넣고 안방 침대 옆 탁자를 뒤져 닥치는 대로 돈 챙기는 것을 거의 동시에 끝냈다. 그리고 총알같이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기다려준 시간까지 정확하게 계산하고 가는 기사를 향해 나는 꾸벅 인사를 했다. 그리고 또 택시를 찾아 뛰었다. 방금 전 내가 보낸 게 바로 택시였다는 걸 깨닫는데 시간이 좀 걸렸다. 갈아입은 옷이 그새 또 흠뻑 젖었고 어지럽고 속이 메스꺼웠다.

엄마한테서 전화 두 통
혜인에게서 전화 네 통. 문자 여덞 개.
반장한테서 전화 아홉 통.

12시 58분. 늦어도 너무 늦었다.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는다. 당연하다. 나라도 안받겠다. 그래도 계속 전화하고 문자를 보냈다. 하지만 약속장소에 도착할 때쯤 소용없는 짓이라는 걸 깨달았고 택시에서 내릴 때는 몸이 물먹은 것처럼 무겁기만 했다. 예상대로 혜인은 거기 없었다. 목 자르는 시늉이 현실이 된 것 같다. 벌이라도 받듯 나는 거기를 떠나지 못했다.
내게 연락한 사람은 반장뿐이었다. 뭐라고 할지 빤해서 수신거부로 막아버렸다. 내가 지금 할머니, 할아버지 들 앞에서 재롱부릴 처지도 아니고 애초부터 나랑 맞지도 않은 거였다. 혜인에게 어느 갤러리에 갈 거냐고 묻지 않은 게 후회가 됐다. 갤러리나 일러스트 전시보다 혜인과 어울리는 것에만 마음이 있었던 것이다.

서성대는 내내 일러스트 전시가 있는 갤러리를 검색해보았다. 책상에 놓아둔 상태였기 때문에 배터리가 얼마 없어서 부지런히 손가락을 놀렸고 삼청동 어디쯤에 있는 갤러리 한군데를 찾기는 했다. 혜인이 거기 있을 리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가보기로 했따. 걔 역시도 갤러리나 일러스트 전시가 아니라 나 때문에 잡은 약속이었다는 걸 안다. 그래도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그게 다였다.

멍청이. 그동안 왜 한 번도 어디 사는지 안 물어봤을까. 결국 삼청동까지 가는 동안 전화기 배터리가 죽어버려서 지도 검색이 중단됐다. 진즉 택시 타고 주소만 알려줬어도. 배터리가 죽기 직전 엄마한테서 전화가 왔지만 몇 번 울리다가 조용해졌다. 나를 둘러주었던 보호막이 순식간에 사라지듯이.

모르는 길을 무작정 걸었다. 배터리 충전할 데를 찾지 못해서 지치도록 걷기만 했다. 내가 나에게 내리는 벌이었다. 걸을수록 내가 혜인과 멀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부터 다른 세상 애 같았고 닿을 수 없는 거리감이 있었는데 그 사실을 확인하듯이.
영락없이 다시 길거리 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배고프고 외롭고 더럽고 초라하고 함부로 무시당하고 아무것도 아니던 그때, 철저히 혼자였던 그때가 자꾸만 떠올랐다. 다른 애들처럼 지내면서 다 괜찮아졌다고 믿었는데 내가 달라지는 건 불가능한 모양이다. 괜찮아지려고 노력하는 게 무슨 소용일까. 이렇게 싫고 무거운 기억을 짊어지고 끝까지 살아낼 수가 있을까. 무사히 어른이 되고 결혼도 하고 직업도 가질 수 있을까. 그러지 못할 것 같다.

그나마 주머니가 비지 않아서 돌아올 수 있었다. 삼청동에서 결국 난 길을 잃었다.어디로 가야 하는지, 뭘 찾아야 하는지, 찾은들 뭘 어쩔 것인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어두워질수록 혼란스러워졌고 어지럼증이 끝내 도지고 말았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도저히 못 견딜 때까지 걸으면서 나에게 고통을 주었고 덕분에 꿈틀거리는 오래 전 기억을 막아냈다. 너무 지치면 머리도 마비되는 법이다.

“어쩌자는 거야?”

엄마가 피 묻은 옷을 내 얼굴에 집어던졌다. 나는 사지를 뻗고 드러누워 버렸고 엄마는 자기가 하고 싶은 온갖 소리를 다 퍼부었다. 어렸을 때 나한테 해댄 모든 악담과 욕과 푸념이 다 쏟아졌던 것 같다. 내가 기억하는 건 기절하듯 잠에 끌려들어 가며 웃었다는 것. 나도 모르게 엄마를 좋아하게 됐나 보다. 이건 가장 나쁜 덫에 걸려들었다는 뜻이다.
깨어 보니 어제 뻗은 그대로였다. 똑똑히 보라는 듯 피 묻은 옷이 얼굴을 반쯤 덮었고 엄마는 이미 나갔는지 조용하다. 열 시가 조금 넘었다. 천천히 일어나는데 온 몸의 뼈가 우두둑 소리를 내며 맞춰졌다. 어지럼증이 좀 남아 있어서 나는 햇살이 창문 모양으로 들어온 걸 물끄러미 보면 멍하니 앉아 있었다.

잠은 묘한 약이다. 어제는 죽을 것 같던 일도 곰곰히 따져볼 여유를 준다. 기하가 다쳐서 찾아왔엇다. 그 자식과의 관계는 돈만 받으면 끝난다. 봉사활동에 못 갔다. 내가 대학 갈 것도 아니고, 나 없다고 봉사 점수 못 받을 놈 하나도 없다. 혜인과 끝난 것 같다. 걔가 먼저 고백했고 어차피 난 그런 애 사귈 처지도 아니다. 해리. 문해리. 기하가 그 이름을 어디서 어떻게 들었는지 몰라도 신경 안 쓰면 된다. 걔가 무슨 일을 당했건 내 문제 아니다. 잊으면 된다. 까짓 거.
까맣게 죽은 전화기에 플러그를 꽂아두고 샤워를 했다. 뜨거운 물을 오래오래 받으며 씻고 또 씻었다. 뜨거운 물을 오래오래 받으며 씻고 또 씻었다. 이렇게 버려야 할 것은 버리는 거다. 핏덩이로 시설에 맡겨졌고, 위탁가정에 머물다 어떤 할머니한테 보내졌고, 다시 그룹 홈으로, 엄마가 잠시 데려갔다가 기차역이 있는 사면동 촌구석 친척집으로, 거기서 또 시설로. 옮겨 다니는 동안 나는 세상에 내 것이라곤 하나도 없다는 걸 알아버렸다. 이제라고 내가 뭘 가질 수 있을까.

“아!”

손등을 문지르다 움찔했다. 상처가 밤사이 눈에 띄게 부어올랐다. 도대체 이 속에 얼마나 독한 게 처박힌 걸까. 남들은 서로 때를 밀어주며 관계를 확인한다는데서 겨우 유리 조각이나 얻어오다니.
깨져버린 거울에 몇 조각으로 나뉘어 비치던 그가 떠올랐다. 그때는 놀란 얼굴이었다. 몇 발짝 안 가서 재수 없게 바뀌어버린 이유가 뭘까. 나를 같잖게 여기게 된 이유. 끝내 모르겠지. 그런 식으로 다시 만날 일 없을 테니까. 맙소사, 벌거벗고 대면이라니. 그때는 당황해서 생각조차 못했는데 그와의 거리가 고작 그거였다. 십칠 년 동안 정체도 모르고 막막하던 거기까지. 고작 한 발짝.

/ 작가소개 /

황선미 작가 사진

황선미(1963~)

소설가

<소설>
『나쁜 어린이 표』 , 『마당을 나온 암탉』 , 『뒤뜰에 골칫거리가 산다』, 『들키고 싶은 비밀』 , 『푸른 개 장발』 , 『과수원을 점령하라』 , 『주문에 걸린 마을』, 『어느 날 구두에게 생긴 일』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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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5-12-31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