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연재소설

《거기까지》독 - 1

<마당을 나온 암탉>의 황선미 작가의 새로운 청소년 소설 <거기까지>독 - 1<마당을 나온 암탉>의 황선미 작가의 새로운 청소년 소설 <거기까지>독 - 1

어쩔 수 없이 하게 된 플래시몹을 마지막으로 맞춰보고 돌아오니 일곱 시가 넘어 있었다. 피자를 주문해놓고 그간 불성실했던 태도를 반성하는 차원에서 화실 숙제를 마무리하는 중이었다.

틈새는 안 가면 그만이고 ‘그’에 관한 것은 고민 중이다. 알고 싶었던 건 알았고, 지금 상황으로는 더 가기 어려운데 말끔하게 정리가 안 되는 이 불편한 속. 감정 때문도 아니고 그에게 나를 확인시킬 마음 따위도 없다. 그런데도 어째서 깨끗하게 접어지지가 않는지. 이유를 잘 모르겠는데 아무래도 그가 어디 있는지 알아버린 탓인 것 같다. 그러나 화실을 두고 고민하지는 않았다. 거기서는 내가 다시 만들어지는 기분이라서. 선생도 호의적이고 아무도 나를 모르고 그나마 재미있는 거고 무엇보다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멀다.

“진짜 유리라도 박힌 거야?”

주먹을 쥐었다 펴고 상처를 들여다보았다. 빨갛고 살짝 붓기는 했지만 상처도 작고 보이는 것도 없는데, 손을 쓸 때마다 뭐가 찌르는 느낌이다. 눌러보면 딱히 어디쯤인지도 모를 정도로 작은 게 어지간히 거슬린다. 기어이 곪으려나 보다. 원래 이렇게 눈에도 안 보이는 것들이 더 문제다.

인터폰이 울렸다. 당연히 피자가 온 줄 알고 버튼을 눌렀다. 그런데 한참 지나도 배달원이 올라오지 않았다.
좀 이상하다 싶을 때 다시 인터폰이 울렸다. 이번에는 화면을 보며 버튼을 눌렀다. 오래된 아파트라 모양만 인터폰이지 버튼 기능 말고는 잘 들리지도 않고 화면으로 얼굴 확인하기도 어렵지만, 밑에서는 들리고 보이기도 할지 모르니 이렇게라도 해야 된다. 일부러 큰소리로 말도 해줬다.

“왜요? 문이 안 열려요?”

저쪽에서 알아듣기 바라며 다시 버튼. 잠시 서서 기다려보았다. 역시 아무도 올라오지 않았다. 내려가 보기로 했다. 배달부들이 이럴 때 엄청 열 받는 줄 아니까 아예 겸손하게 돈 바치고 받아오는 성의라도 보이지 싶었다.
유리 현관문이라 엘리베이터에서 나갈 때부터 밖이 보이게 마련인데 당연히 있어야 할 배달 오토바이가 안 보였다. 그새 엉뚱한 집에다 주고 가버렸나 싶어 갸웃거리며 나가보았다.

뜻밖에도 기하가 있었다. 계단 구석에 쭈그려 앉은 채. 어디서 한바탕 뒹굴고 온 꼬락서니였다. 센 척하고 예민하게는 굴어도 싸움질은 모르는 애가 머리에 피가 엉겨 붙은 채 여기까지 온 것이다. 나는 얘한테 집을 가르쳐준 적이 없었다. 아마 어느 학교 다니는지도 말한 적 없을 거다. 그런 걸 나눌 만큼 오래 만나지도 않았고 누가 나에 대해서 알기를 원치 않기 때문에. 여기까지 온 걸 보면 이 자식은 생각보다 나에 대해서 많이 알아본 보양이다. 어쩌면 그 아르바이트라는 것도 단순히 뭘 훔치는 정도가 아닐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야. 너 여기 왜 왔어?”

팔을 붙잡아 일으키는데 구역질 나는 냄새가 확 풍겼다. 술에 토사물에 잡다한 오물에 몇 번 뒹굴면 적당히 이렇게 된다. 그나저나 이 꼴을 해가지고 여기는 왜 찾아왔을까.

“무…… 체크. 아, 무야……”

부은 눈을 간신히 뜨고 기하가 나를 보았다. 그리고 축 늘어졌다. 내 가슴팍으로 쏟아진 머리에서 찐득한 피가 문질러졌다. 나는 놀라서 물러났다가 쓰러지는 기하를 다시 부축했다.
머리를 다쳤다. 아직도 피가 난다. 내게는 지갑뿐이었다. 휴대폰도 없이 슬리퍼만 끌고 나온 길이다. 어디서 털렸는지 기하 주머니도 빈 채였다. 경비실로 달려가 봤지만 자리를 비운 상태라 기하를 들쳐 업고 택시가 있는 곳까지 갈 수밖에 없었다. 쓰레기를 들고 나온 아줌마가 지레 경계하는 눈초리로 피하는 바람에 말도 못 붙였다.
덩치도 작은 게 어찌나 무거운지 몇 번이나 주저앉을 뻔했다. 피자 오토바이가 나를 지나쳐갔다. 불길한 예감이 밀려들었다. 왠지 가지 말아야 할 곳으로 끌려가는 것만 같은.

“아, 씨바. 뭐냐고!'”

짜증 나서 미치겠다. 배고파 죽겠는데, 피자는 막 받았을 때 먹어야 제일 맛있는데 왜 내가 이런 놈 때문에 지금 이 시간에 이래야 하는지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도진도 밥맛이지만 나는 처음부터 이 자식이랑 생리적으로 안 맞았다. 싫었다. 아주.
기사가 마뜩찮은 얼굴로 우리를 훑어보고 병원 응급실까지 데려다주었다. 생각지도 못했건만 나는 기하 보호자가 되어야 했고, 피 같은 돈을 다 털려야 했다. 그 정도로는 어림도 없어서 볼모처럼 남아줘야 했다.

의료진들은 나한테 별걸 다 물어봤고 나도 이 사태의 한 놈쯤으로 여기는 듯했으나 나는 기하의 신상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었고 그런 시선이 억울할 뿐이었다. 관자놀이의 선명한 흉터가 그들에게 불온한 선입견을 주었다는 짐작은 했다. 이게 늘 걸림돌이다. 아무튼 나로서는 안기하라는 이름 말고는 말해줄 게 없었다. 얘가 주가 조작이라고 뻥치는 알바를 한다는 건 할 소리도 아니고 더스티 멤버에게 꽂혔다는 것도 마찬가지. 하지만 진짜로 내가 이 자식에 대해 아는 건 그게 전부였다. 혹시 클럽 갔다가 이 꼬락서니가 됐을까. 하지만 그건 어제였다. 윤도 그렇게 문자를 보냈다. 전화기라도 있으면 도진이나 윤에게 뭘 물어보기라도 할 텐데.

어느 새 열 시가 훌쩍 넘어버렸다. 편리한 전화기가 사람을 아주 멍청이로 만들었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기억하고 있는 전화번호가 전혀 없다니. 가까이 지내는 애들도 혜인도 심지어 엄마까지도 전화기 없으니 연락 불가. 불친절한 변두리 병원은 신원불명 환자 대신 나를 담보로 잡았다. 혹시라도 몰래 도망칠까 봐 의심스러웠는지 학교, 전화번호, 이름, 생년월일, 집 주소까지 다 캐내서 적어두었다. 그런 것들이 나를 말해주는 단서였다. 당연한 건데 한꺼번에 확인하고 나니 내가 나일 수 있는 근거가 제법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응급처치를 받고도 기하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머리가 어떻게 됐을까 봐 물어봤더니 술이 안 깨는 거란다. 술 마시기에는 어린 몸이 만취한 거라 깨어나려면 시간이 좀 걸린다며 간호사가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술 마시기에는 어린 몸’이라는 말이 있는 줄도 몰랐다. 길거리에서 어울리던 형들은 허구한 날 마시고도 멀쩡히 잘만 깨어났다. 기껏해야 얘 정도거나 더 어렸을 거다. 자식. 보기보다 곱게 자랐나 보다. 아무튼 간호사가 나까지 한심한 애 취급하는 것 같아서 굉장히 찝찝했다. 내가 혜인과 헤어지고 아무리 여자가 없어도 간호사랑은 절대 안 사귈 거라고 유치한 다짐을 다 했다.

밤이 깊어지자 한 명뿐인 의사는 어디로 갔는지 안 보이고 간호사는 집에 다녀오겠다는 내 말을 싹 무시했다. 친구가 깨어나는 건 보고 가야 되지 않느냐고 되레 충고다. 어차피 나한테는 돈도 없고 버스도 끊겼고 걸어가기에는 너무 멀리 와버렸다. 저런 간호사한테 차비 좀 빌려달라고 하기도 싫고. 지독한 도둑놈한테 아주 더럽게 걸리고 만 것이다.
밤새도록 내 걱정은 내일 혜인과의 열한 시 약속이었다. 설마 새벽이면 깨어나겠지. 가족에게 연락만 되면 돌아가야지, 그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도무지 깨지를 않는 것이다. 내가 저랑 무슨 상관이라고 이렇게 볼모로 잡고 혼자서 늘어지게 자고 있느냐 말이다. 끔찍한 놈. 어떻게든 약속을 지키고 싶은데 그러지 못할까 봐 나는 수없이 절망하고 억울해하고 짜증이 났다. 몰래 도망가고 싶은 충동도 있었다. 이런 데서 몰래 나가는 거야 일도 아니다. 그러지 못한 건 나 때문이었다. 가족이 있는 집이라는 데서 교복을 다시 입게 됐을 때 다짐한 게 있었다. 나를 잘 지켜내자고. 다른 애들처럼 무사히 살자고.
내가 풀려난 건 다음 날 열 시가 넘어서였다. 기하가 깨어나고 자기 엄마 전화번호를 댈 때까지 나는 참을성 있게 기다려야 했다. 털린 돈이야 나중에 어떻게 되든 집에 가려면 차비라도 있어야 했기 때문인데 얼굴이 하얘져서 유령처럼 달려온 걔 엄마를 보고는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게다가 걔 엄마조차 자기 아들이 이렇게 된 게 내 탓인 양 쳐다보는 바람에 말도 붙이기 싫어졌다. 걔 엄마 역시 내 얼굴에서 가장 먼저 본 게 관자놀이의 흉터였다. 나쁜 놈이라는 명백한 표시처럼 나를 규정해버리는 흔적.

기하 엄마는 종잇장처럼 말랐고 듣지 않아도 사정이 얼마나 궁색한지 짐작이 됐다. 걔 엄마한테는 이 상황이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는 난생처음 일어난 일인 모양이었다. 싸움질은 아니더라도 분명히 어딘가 구린 놈이고 결코 선량해 보이지도 않는데 집에서는 착한 아들인가 보다.
걸어서 가는 수밖에 없었다. 이미 약속을 지키기는 어려워졌다. 나중에 꼭 이 자식을 불러내고야 만다. 돈도 받아내고 분이 풀릴 때까지 작살을 내줄 거다. 시설 여기저기를 들락거리며 길거리를 굴러다니는 동안 나는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 아는 애로 길들여졌다. 이런 놈한테 그 정도가 필요할까 싶지만.

“야, 체크.”

입이 바짝 말랐는지 기하가 잡음처럼 말했다. 걔 엄마는 간호사를 따라 나가는 중이었다. 머리는 붕대로 싸매고 얼굴은 퉁퉁 붓고 안 그래도 작은 눈까지 파묻히기 직전이라 내가 알던 놈이 영 아닌 것 같다.

“나중에 이자까지 쳐서 갚아라.”

알았다는 건지 통증 때문인지 기하가 눈을 끔뻑했다. 아직은 맞을 준비도 안 됐고 욕먹을 상황도 못 되는 놈이니 지금은 봐주기로 한다. 우리 집을 어떻게 찾아왔는지는 물어볼 필요 없다. 다시는 오지 말라는 경고를 먹여줄 거다.

“너, 해리라고, 아냐?”

혀가 꼬여서 느릿느릿 기하가 웅얼거렸다.

“뭐?”

“문,해,리”

/ 작가소개 /

황선미 작가 사진

황선미(1963~)

소설가

<소설>
『나쁜 어린이 표』 , 『마당을 나온 암탉』 , 『뒤뜰에 골칫거리가 산다』, 『들키고 싶은 비밀』 , 『푸른 개 장발』 , 『과수원을 점령하라』 , 『주문에 걸린 마을』, 『어느 날 구두에게 생긴 일』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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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5-12-28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