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의 여로

길에서 헤매는 자들의 집 찾기

길에서 헤매는 자들의 집 찾기 이제하의『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
지금부터 스물일곱 해 전 겨울날에 서울에서 직장에 다니는 사내가 속초 물치 바닷가에 나타난다. 그가 든 가방엔 아내의 유골가루가 들어 있다. 아내가 죽은 지 무려 삼 년이 지나서 바다에 유골을 뿌리러 온 것이다. 그는 그러나 자신이 왜 이곳에 왔는지 망각한 사람처럼, 우연한 사건에 몸을 맡기며 나흘 동안 강원도 땅 이곳저곳을 헤맨다.
소설의 시간 배경은 한겨울이지만, 나는 땡볕 때문에 눈을 제대로 뜨기 힘든 한여름날 아침에 소설 주인공의 행적을 쫓아서 홀로 차를 몰고 길을 나섰다. 그 동안 강산이 두 번이나 바뀌었고 계절이 전혀 다르니, 바깥 풍경에서 작품의 정취를 고스란히 맛보기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다. 이럴 때는 눈에 잡히는 한없이 밝고 푸르고 싱그러운 풍경을 머릿속에서 다만 스산하고 을씨년스러운 겨울날 잿빛 풍경으로 바꾸어 체험하는 상상놀이가 필요하다. 나는 핸들을 단단히 쥐고 정면을 응시하며 계속 자기암시를 준다. 지금은 한겨울이다. 한바탕 폭설이 쏟아지려는지 하늘이 어둡다. 지금 나는 황량하고 쓸쓸한 겨울바다로 가고 있다.
소설 속에서 주인공 '그'가 발을 디딘 곳을 순서대로 적어보면 이러하다. 그는 서울에서 고속버스로 속초에 와서 시내버스로 갈아타고 물치 삼거리에 이른다. 이곳에서 저녁을 먹고 다시 버스를 타고 설악동에 가서 하룻밤 자고 강릉 경포대로 이동한다. 여기서 또 하룻밤을 자고 양양으로 올라가서 택시를 타고 한계령을 넘어 원통으로 간다. 이곳에선 서울에서 온 사람들의 승용차에 동승하여 인제로 가서 하룻밤을 더 자고, 다음날 선착장에서 배에 오르는 걸로 여정을 마감한다.

이러한 행로를 그대로 밟으려면 한 차례 같은 길을 왕복해야 한다. 속초에서 강릉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속초 아래 양양까지 돌아 올라와야 하기 때문이다. 곧장 버스를 타고 서울로 가는 코스를 놔두고 소양호 뱃길을 이용해야 하니 여정이 대폭 길어지게 돼 있다. 주인공 입장에서 몸이 고단해지는 건 둘째 치고, 하루나 이틀 회사에 결근해야 하므로 여간 부담스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속초 물치 삼거리 식당 사진
△ 소설 첫머리에 나오는 속초 물치 삼거리 식당
원주의 집을 떠난 지 한 시간이 지나서, 나는 시원스레 펼쳐지는 호수 옆길을 따라 경포대 해수욕장으로 들어가서 호텔 골목에 차를 세운다. 몇 발짝 동쪽으로 나아가니 갑자기 시야가 트이며 명랑한 해수욕객들의 웃음소리가 온몸으로 달려든다. 파라솔 그늘에 십여 명 무리 지어 바닷바람을 즐기는 외국인 가족도 눈에 들어온다.

그는 아내와 신혼여행을 갔던 경포대에서 바다에 유골을 뿌리면서 사실상 여행 목적을 이루었다. 그런데 한 여자, 아니 두 여자가 발목을 잡는다. 하나는 그가 설악동 여관에서 낯선 사내들과 화투를 친 여행 첫날밤에 그의 짝이 되어 놀다가 새벽에 갑자기 심장마비로 죽은 여자이다. 그의 의식 속에서 이 여자는 자살로 추정되는 교통사고로 죽기 전까지 여러 해 심장질환을 앓았던 아내에 대한 환각을 불러일으킨다. 자기 고향이 어딘지도 모르는 채 가족이나 친척도 없이 살다가 비참한 죽음을 맞은 아내, 그리고 몸 파는 일을 하며 연명하다가 여관에서 비명에 죽은 여자가 서로 겹쳐진 것이다.

그의 발목을 잡은 또 다른 여자는 물치에서 스치듯 만난 간호사이다. 이 여자의 동행은 혼자서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는 노인이다. 북쪽에 고향을 두고 온 이 노인은 죽기 전에 휴전선 앞까지라도 가서 먼발치로나마 고향 하늘을 바라보는 게 마지막 남은 꿈이며 소원이다. 주인공 사내는 여행 첫날에 노인이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제의를 거절했다. 그런데 그 자신이 북쪽에 고향을 두고 온 실향민으로서 이 일이 줄곧 마음에 걸린다. 이와 동시에 필경 지금 어떤 곤경에 처한 게 분명한 간호사가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다시 한 번 죽은 아내를 향한 연민이 간호사에게로 전이되면서, 결국 그는 편안한 귀경길을 버리고 어제 온 길을 거슬러 올라가는 수고를 선택한다.

오늘날 소설 첫머리에 등장한 물치 삼거리엔 해맞이공원이 서 있다. 이곳 식당에서 주인공은 매운탕을 먹었다. 나 또한 길가 식당으로 들어가서 심심하고 부드러운 곰치탕을 시켜 먹는다. 주인 아낙이 무슨 이유로 혼자 여행을 다니느냐고 묻지만 나는 말없이 미소를 지어 보인다. 소설 주인공이 다른 사람들의 눈에 그렇게 비쳤듯이, 이런 휴양지에선 혼자 다니는 사람을 대할 때 무슨 각별한 사연이 있는 게 분명하다는 선입견에 저절로 빠져들게 만드는 모양이다.

식사를 마치고 길 건너 해맞이공원으로 간다. 곳곳에 조각품을 세워놓고 나무를 잘 가꾼 공원이다. 다만 페인트칠이 선명한 울타리가 눈에 거슬린다. 내구성이 떨어지더라도 이런 곳은 나무로 울타리를 만들어야 제격이 아닐까 여겨진다. 주인공이 초병한테 검문을 받은 바닷가로 내려가니 과연 소설에서 묘사된 대로 모래펄이 아니라 자갈밭이 나온다. 그는 왜 이 자갈밭으로 내려왔을까. 초병의 방해가 없었다면 이곳에서 아내의 유골을 뿌리려 했던 걸까.

여름날 한낮의 설악동 여관촌은 꽤나 한산하다. 골목을 걸어가는데 여관이나 식당 안에 앉은 사람들이 일제히 나를 바라본다. 주인공이 하룻밤 묶으며 화투를 친 여관, 주인공의 짝이었던 여자가 심장마비로 죽은 여관이 이곳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이 소설은 길을 잃고 헤매는 나그네들의 돌이킬 수 없는 운명을 다룬 소설이다. 고향을 잃은 사람들이 줄지어 등장하며, 그들은 결국 고향으로 상징되는 안식에 이르지 못하고 길에서 죽음을 맞는다. 일평생 길에서 떠돌다가 길에서 죽는 것, 이것이 바로 나그네들의 운명이다.
해맞이 공원 사진
△ 물치 삼거리의 해맞이 공원
물치 앞바다 사진
△ 주인공이 초병의 검문을 받은 물치 앞바다
나는 차를 한잔 마시고 싶은 욕구를 억누르고 다시 차에 올라 길을 떠난다. 한계령 휴게소에 들르자 차를 댈 자리가 없을 만큼 여행객들이 바글거린다. 노래방이 국민 전체를 평균수준 이상의 가수로 만들었듯이, 디지털카메라는 모든 여행객을 카메라나 사진 전문가로 만들었다. 할머니 할아버지 아줌마 아저씨 어린이들이 곳곳에서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는다. 이 즐겁고 유쾌한 여행객들에게선 소설 주인공처럼 조금도 쓸쓸하다거나 어둡다거나 하는 구석을 찾을 수 없다.
한계령 사진
△ 한계령 오르는 길
한계령 휴게소 사진
△ 한계령 휴게소
원통은 이번에 내가 처음으로 발을 들여놓은 고장이다. 차에서 내려 버스 터미널 앞을 어슬렁대자 일대에서 가장 오래 돼 보이는 여관이 나타난다. 그 곁으로 터미널에서 원통시장을 향한 곳에 건물 잔해가 어지럽다. 빛 바랜 벽지로 보아 낡은 여관들을 무너뜨린 듯하다. 주인공이 노인과 간호사를 찾아서 차례로 탐문한 여관들이었을 것이다.
이 소설에서 집은 단순히 벽과 문과 천장으로 이루어진 구조물이라기보다는,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만드는 따뜻한 관계에 가깝다. 다시 말하면 한 쌍의 남녀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건축하여 언제든 서로 의지할 수 있는 심리적 공간을 의미한다. 주인공은 생전의 아내와 이런 공간을 만들지 못했고, 여관에서 죽은 여자나 간호사 또한 금전 거래로 이루어진 왜곡된 관계 속에서 젊은 날을 흘려 보냈다. 작품 속에서 주인공의 눈길과 마음이 줄곧 닿는 곳을 돌아볼 때, 주인공도 이들과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다. 따라서 그가 원통을 지나 이른 인제에서 간호사와 재회하여 여관방에서 마주앉아 밥을 먹는 장면은, 서로를 따뜻하게 감싸주고 지난날의 상처를 어루만져주며 더불어 살아갈 미래에 대한 복선으로 읽힌다.
원통시장 앞 여관 잔해 사진
△ 원통시장 앞 여관 잔해
인제 선착장 사진
△ 소설 끝 부분에 나오는 인제 선착장
나는 물어물어 찾아간 인제 선착장에서 나의 여정을 마무리한다. 이곳은 오래 전에 선착장 기능을 잃었다. 상류지역 홍수를 막고자 댐 수위를 낮추면서 더는 배가 들어오지 못하게 되었다. 콘크리트 바닥, 난간 역할을 한 쇠줄, 휴게소와 매표소로 사용되었을 목조건물은 폐허와 퇴락이 무엇인지, 한때 떠들썩하게 오가던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진 자리의 적막이 얼마나 완강한 것인지를 한눈에 보여준다. 뒷산 계곡으로 이어지는 비닐호스에선 계속 맑은 물이 흘러내리고, 소설 말미에서 물에 빠져죽은 아이의 넋을 달래던 무당의 넋두리는 여전히 귓전을 울리건만, 개미 새끼 하나 보이지 않는 완벽한 적요이다. 온몸을 감싸 안는 이 적요는 때로는 다감하고, 또 때로는 등골이 오싹해질 만큼 섬뜩하다.
해지는 도로 사진
△ 나그네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
이제하 소설집 사진
이 소설은 길을 잃고 헤매는 나그네들의 돌이킬 수 없는 운명을 다룬 소설이다. 고향을 잃은 사람들이 줄지어 등장하며, 그들은 결국 고향으로 상징되는 안식에 이르지 못하고 길에서 죽음을 맞는다. 일평생 길에서 떠돌다가 길에서 죽는 것, 이것이 바로 나그네들의 운명이다.
글과 사진
원재길_시인. 소설가. 1959년생.
시집『나는 걷는다 물먹은 대지 위를』, 소설 『적들의 사랑 이야기』,『달밤에 몰래 만나다』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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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4-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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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