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의 여로

어머니라는 불길한 유혹

어머니라는 불길한 유혹 구효서의 『늪을 건너는 법』과 강화도
오전 11시쯤 길을 나섰다. 마음이 무거웠다. 이상한 일이었다. 목적지도 목적도 분명한 여행이었다. 목적지는 강화도의 이곳저곳. 목적은 구효서의 『늪을 건너는 법』의 주인공이 다녔던 길을 따라다니는 것. 아니, 그 길을 따라다니며 주인공의 감회를 같이 느껴보고 그 감상을 적는 것.
언제부턴가 이런 글을 쓰고 싶었다. 어느 날부터인지 문득 텔레비전을 보다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흘러내린 눈물 앞에서 느꼈던 당혹감, 처연함 같은 것들을 표현해보고 싶었다. 정말, 그러고 싶었다. 그러던 차 『늪을 건너는 법』 의 주인공의 여로를 뒤밟아보지 않겠느냐는 전화를 받았다. 혹여 전화한 사람의 마음이 바뀔까 싶었다. 해서 어떤 틈도 주지 않고 곧장 수락했다. 소설 속의 주인공의 행로를 따라다니면 그때그때 일어나는 마음의 파장, 혹은 무늬 같은 것을 적어본다는 것은 얼마나 청승맞은 일이겠는가. 그러니 또 얼마나 매혹적인 일이겠는가.
거기다가 『늪을 건너는 법』 의 주인공의 여로였던 것이다. 아직도 나는 『늪을 건너는 법』 을 떠올리기만 하면 묘한 흥분에 빠져들곤 한다. 지금부터 15~16년 전 『문예중앙』에는 쉽게 납득이 안가는 시리즈가 있었다. ‘90년대를 여는 문예중앙 중점 기획’이라는 이름 하에 신예작가들의 장편소설이 잇달아 전재되었던 것. 그 연재물에는 박상우의 『지구인의 늦은 하오』도 있었고, 이승우의 『가시나무 그늘』도 있었고, 또 이제는 다시 얼굴을 볼 수 없는 채영주의 『담장과 포도넝쿨』도 있었다. 그리고 또한 구효서의 『늪을 건너는 법』 이 있었다. 그 이전에도 구효서의 활동은 지금처럼 가히 멈춤이 없었건만 구효서의 작품을 실제로 대한 건 『늪을 건너는 법』이 처음이었다. 그 떨림이라니. 한 순간 맥이 턱 빠졌을 정도였다. 그 후 나는 한동안 구효서의 작품을 찾아 읽느라, 지나간 『문예중앙』을 들쳐보느라 마냥 분주해야만 했다. 그런데, 그랬던 것인데, 『늪을 건너는 법』 이 무슨 운명의 부름처럼 다시 내게 온 것이었다. 어찌 마다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길을 집을 나서는 마음은 전혀 가볍질 않았다. 이 여행이 마냥 즐겁지만은 않게 된 것은 길을 떠나기 위해 『늪을 건너는 법』의 주요 공간인 강화도의 지도를 뒤적거리면서였다. 아뿔싸, 아하, 없다. 없었던 것이다! 『늪을 건너는 법』에는 작중 화자이자 주인공이 태어난 곳은 ‘경기도 강화군 불은면 창포리’로 되어 있으나 지도상에는 그러한 지명이 없었다.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은 있지만 ‘창포리’는 없었다. 그리고 이 소설에서 주인공의 출생 비밀을 안고 있는 또 하나의 중요한 지명으로 등재되어 있는 곳이 ‘경기도 강화군 불은면 운수리’인데 역시 지도상에는 ‘운수리’라는 지명이 없었다. 강화도라면 작가 구효서의 출생지이자 고향 아닌가. 그러니 착오일 수도 없을 터. 종잡을 수가 없었다. 해서, 답답한 마음에 술의 힘을 빌려 작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통해 돌아온 답은 간단명료했다. “다 가짠데, 다 만들어낸 곳인데……” 그랬던 것이다. 『늪을 건너는 법』 자체가 실재와 환상, 역사와 허구, 의식과 무의식이 겹쳐져 있듯 이 소설에 등장하는 지명 역시 그러했던 것이다. 난감해졌다. 내게 주어진 일은 실재의 공간, 혹은 실제로 있는 공간을 찾아가는 일이었으므로.
망설이기도 했으나 그냥 가기로 했다. 어떻게 보면 소설 속의 공간이란 그 공간과 지명이 실재한다 하더라도 근본적으로 다 실재와 환상이 겹쳐져 있는 것 아니겠는가. 그러니 이곳이 『늪을 건너는 법』의 모델이 된 곳이겠거니 하는 것만을 확인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하기로 했다. 아니, 그렇게 믿기로 했다. 다만 한 가지 위안이 있다면, 나의 처지가 『늪을 건너는 법』의 주인공인 전봉구와 처지가 같아졌다는 것이었다. 전봉구가 어느 날 존재의 저쪽에서 날아온 팩스 한 장으로 정말로 실재인지 환상인지 모를 분열된 상태로 강화도를 헤매었듯 나도 그렇게 같은 심정으로 그곳을 헤매게 되었으니, 이걸 행운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무엇이라 해야 할지.
하여간 길을 나섰다. 그리고 강화대교 앞에 섰다. 우리나라에서 세 번째로 세워진 연륙교. 『늪을 건너는 법』의 주인공 전봉구는 2차선 다리를 건넌 것으로 되어 있는데 정작 그 다리는 막혀 있고 옆에 새로 건립된 4차선 다리로만 강화도 진입이 가능하게 되어 있다. 이 강화대교 앞에서 전봉구는 “몸이 여린 신열로 달아오르고 있음”을 느낀다. 전봉구에게 있어서 강화도란 아버지의 질서에 의해서 억압된 세계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어머니를 정점으로 하는 무시무시하면서도 매혹적인 충동의 세계이기도 하고 무의식적 에네르기들이 방향 없이 질주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폐기처분되었던 어머니의 세계가 문득 귀환한다. 어느 날 예고도 없이 날아온 한 장의 팩스. “당신의 피와 이름과 과거와 성장과 의지와 사랑들이 모두 누군가에 의해 조작된 것이라면, 당신의 인생 자체가 그 처음부터 가짜 신분의 벽돌 한 개로 시작된 것이라면, 당신의 삶은 무엇이겠는가.” 이렇게 아버지라는 이름에 의해 억압된 어머니의 세계가 귀환하고, 작중화자는 당연히 망설인다.
옛 강화대교사진 - 3
△ 강화 역사 박물관에서 바라본 옛 강화대교. 주인공이 존재의 위기감을 느끼며 건넜던 다리
그 어머니의 목소리를 확인할 경우 아버지로 상징되는 초자아를 부정하는 것이 되므로. 하지만 전봉구는 강화도로, 그러니까 어머니의 세계로 접어든다. 그 계기는 미즈 정이라는 여성. 전봉구는 미즈 정이라는 여성과 하룻밤을 보내거니와 그녀와의 시간을 통해 ‘초세기적 초사회문화적 공간의 체감’ 같은 것을 느끼고는 아버지의 세계를 ‘배반’하기로 한다. 그리고 강화도, 그러니까 의식의 세계 저편으로 들어선다. “차가 출발하고, 나는 천천히 바기나 속으로 미끌어져 들어가는 환상과, 쏟아지는 졸음 속으로 함몰해 버렸다.”

그를 따라 강화도로 들어갔다. 하지만 나는 전봉구와 같을 수 없었다. 운전대를 잡고 있었으므로. 나는 한없이 투명하고 명료한 정신으로 강화도에 접어들고야 말았다. 한마디로 나는 강화도로 들어서는 순간부터 전봉구와의 미메시스적 경험, 혹은 감정이입에 실패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 이물감은 강화도 여기저기를 다니는 순간에도 결코 없어지질 않았다. 강화도에 들어서서 먼저 찾은 곳은 역시 전봉구가 먼저 들른 문화원. 소설 속의 문화원은 실재의 곳으로도 상상의 곳으로도 등장한다. 하나, 지금의 문화원은 너무도 번듯하여 소설에서처럼 어떤 몽환감도 주지 못했다.

다음 시외버스터미널로 갔다. 상상 속에 잠깐 나타나선 곧 사라지는 문화원장이 강화도의 기록되지 않은 역사 혹은 어머니들의 역사의 안내자로 소개해 준 ‘통대’를 만난 곳이 바로 터미널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전의 터미널 분위기는 이미 없고, ‘통대’가 거주하는 곳으로 되어 있는 ‘천국만화가게’는커녕 만화가게조차 없다. 또는 그 만화가게로 표상되는 혼란스러움, 소요, 혼란, 동요, 떠들썩함도 찾기 힘들다. 전봉구는 이곳 어름에서 미즈 정과 같은 신비함을 갖춘 여성을 만나는데, 그녀를 만났던 소요궁이라는 곳도 역시 찾을 수 없었다. 물론 이런 명명들이 다 작가가 지어낸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도 이물감은 지울 수 없다. 그런 분위기, 기미, 징후조차도 느낄 수 없었으므로.
시외버스터미널 사진
△ 주인공이 ‘통대’를 만나는 것으로 되어 있는 시외버스터미널 전경. 지금은 현대식으로 탈바꿈해 소설 속의 분위기를 느끼기는 힘들다.
시외버스터미널 사진
낮이었기 때문일까. 이 소설에서처럼 사람을 혼곤 속으로 몰아넣는 끈적끈적한 날씨가 아니라 너무나 한없이 투명하고 차가운 날씨 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면 술도 한 잔 하지 않은 맹숭맹숭한 정신 때문일까. 전봉구는 이곳 강화도에서 깜빡깜빡 정신을 잃는다. 그리고 꽤 오랜 시간 이후에 정신을 차리는 바, 그 시간 동안 자신이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음을 확인하고 한다. 망아의 상태에서 나타나는 또 다른 나의 발견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한 겨울 속의 맹숭맹숭하고 투명한 나는 망아의 상태에 전혀 빠질 수 없었고, 그래서 ‘통대’, ‘소요궁’으로 표상되는 무의식적 충동들의 징후조차도 발견할 수는 없었다. 길은 전봉구와 같은 길이건만, 같은 길을 갈수록 나는 전봉구에게서 멀어지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답답하게도.

만화가게에서 만난 ‘통대’로부터 시작하여 전봉구는 어머니의 세계로 깊숙하게 빠져든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억압되었던 구체적인 어머니의 실존을 찾아내는가 하면 아버지의 도덕률에 의해 폐기처분된 잉여의 쾌락들, 잉여의 욕망들을 경험하기도 한다. 뿐만 아니다. 전봉구는 통대 등의 안내로 구체적인 어머니로부터 시작하여 아버지의 이름 때문에 폐기처분된 역사 속의 어머니들, 혹은 어머니들의 역사들과 조우하게 된다. 즉 강화도라는 지리적 속성 때문에 강화도에는 정사에 의해 은폐된 질서화되지 않은 혁명적 에네르기들이 넘쳐났음을 발견하게 된 것. 전봉구는 여기서 더 나아가 그 혁명적 에네르기들이 마냥 질서 바깥을 떠돈 것이 아니라 실재적인 운동과도 결합되기도 했다는 것도 발견한다. 그 어머니로 표상되는 신비로운 힘들은 한편으로는 관능적이면서도 활력이 넘치고 퇴폐적이면서도 건설적인 ‘나림’이라는 공동체로 출현했다가 사라지는가 하면, 역사의 중요한 사건들(예컨대 대몽항쟁에서부터 한국전쟁시의 유격대)들의 중요한 요인으로 작동하기도 했던 것. 전봉구는 급기야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가 바로 이러한 역사나 의식 속에서는 의도적으로 배제된 어떤 힘들의 상징물임을 인정하고, 그리고 그것을 자기화한다.

이런 과정에 이르기까지 전봉구는 강화도 전역을 헤맨다. 정족산과 삼랑성, 초지진 등등. 특히 삼랑성에서 ‘나림’의 흔적, 그러니까 아버지의 이름에 의해 현실 저 구석으로 떠밀려간 어머니의 세계를 찾기 위해 고투는 그야말로 처절하다. 또 아버지가 지정해준 역사지리지와 위배되는 어머니 세계의 흔적을 만날 때마다 보이는 그의 마음 속에 갈등 또한 만만한 것이 아니다. 그렇게 전봉구는 정족산과 삼랑성, 초지진, 부주고개, 길상면 내리(이 역시 행정지도상에는 없는 지명이다)를 찾아 다니고, 또 어머니의 흔적을 암시하는 물증들 앞에서 고통스러워한다. 해서 그는 여러 다양한 역사서들의 몇몇 구절은 물론 지역역사박물관에 어재연 모조 장수기 옆에 보관되어 있는 부주고개 계모임 규약(이 소설의 지역역사 박물관은 강화역사박물관을 말하는 듯하나 이 박물관에 부주고개 계모임 규약 같은 것은 없었다) 앞에서 절망하고 좌절하고 또 새로 태어나기도 한다. 자신의 실존을 찾기 위해 처절한 고투라고나 할까. 하여, 그는 저 선사시대부터 이어져온 또 하나의 역사를 발견하고 결국에는 자기화하거니와 동시에 정사에 의해 은폐된 인간 욕망의 관능적이면서도 활력 넘치는 드라마 또는 무의식들의 불연속적인 역사를 복원해 낸다.

물론 소설의 마지막에서 전봉구는 강화도에서 확인했던 모든 것을 폐기처분하겠노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것은 가능하지 않을 터이다. 강화도 곳곳에 무의식의 역사적 흔적들이 개입되어 있듯, 이미 의식의 차원으로까지 귀환한 내용들을 다시 돌려보낸다는 것은 불가능하였기 때문이다. 전봉구는 내내 이 세계를 버리려 하겠지만 그런 만큼 그의 세상에 대한 통찰은 깊어질 것이고 삶의 내용은 풍부해질 것이다. 억압된 것의 귀환이란 더 넓어지고자 하는 염원에서 이루어지고 그것이 이루어지면 인간은 더 넓어지는 것이므로.
삼랑성 사진
△ 삼랑성. 아마도 이곳 밑에 이씨집성촌이 있었을 듯
삼랑성 사진
내가 전봉구의 행적을 따라다니며 보고자 했던 것도 바로 그런 것이었는지 모른다. 세상을 보는 눈을 넓혀줄, 나의 의식과 어긋나는 무시무시하면서도 매혹적인 음모와 신비의 징후들. 하지만 전봉구의 행적을 같이 따라다니고자 했건만 나는 그런 것 근처에도 갈 수 없었다. 전봉구가 하나씩 다른 지점에 도달할 때마다 은폐되었던 무의식적 충동들과 가까워졌다면, 나는 그럴수록 분석가적이고 방관자적인 시선으로 차가워졌다. 그래서 전등사를 끼고 도는 삼랑성에서 어떤 절박함을 느낄 수 없었고, 삼랑성에서 내려다보는 마을에서도 어떤 신비감의 기미조차도 엿볼 수 없었다. 말하자면 강화도는 민숭맨숭하고 차가운 나에게 어떤 곁도 주지 않았다.

그렇게 강화도에서 떠밀려 나왔다. 참담했다. 따지고 보면 강화도란 나에게 그렇게 먼 곳만은 아니었다. 강화도 들어가는 초입에 할아버지가 살았고 큰 아버지가 살았던 것. 해서 나는 명절 때마다 한 번씩 그곳에서 강화도를 바라보고 했다. 그런데도 나에게 강화도는 나에게 끼어들 어떤 틈도 주질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보니 어쩌면 그것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효서에게 강화도가 큰 의미가 있는 것은 바로 그곳에 구효서의 성장 드라마, 그러니까 오이디푸스의 처절한 파노라마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즉 구효서에게는 바로 강화도가 존재의 태반이기에 구효서는 그곳에서 존재의 늪을 느끼고 또 그 늪을 건너는 법을 배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만약 내가 어떤 늪에서 허우적대고 있다면, 그리고 그 늪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면, 다시 말해 내 스스로 억압한 것들을 다시 귀환시켜 나를 더욱 넓은 나로 확장시키고자 한다면, 내가 갈 곳은 강화도가 아니라 내가 태어나고 성장한 바로 그곳이리라. 여기에 생각이 미치자 참담한 마음이 조금 걷히는 듯도 했고, 전봉구에 대한 이물감이 조금 씻기는 듯도 했다.

나는 그렇게 구효서의 강화도를 벗어났다. 그리고 나의 강화도로 들어섰다.
늪을 건너는 법 책 사진
구효서에게 강화도가 큰 의미가 있는 것은 바로 그곳에 구효서의 성장 드라마, 그러니까 오이디푸스의 처절한 파노라마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즉 구효서에게는 바로 강화도가 존재의 태반이기에 구효서는 그곳에서 존재의 늪을 느끼고 또 그 늪을 건너는 법을 배울 수 있었던 것이다.
글과 사진
류보선_평론가. 군산대 국문과 교수. 1962년생.
평론집『경이로운 차이들』, 『한국 근대문학의 정치적 (무)의식』, 『또다른 목소리들』, 『한국문학의 유령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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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4-11-28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