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의 여로

소설 주인공보다 더 극적인 발터 멘야민의 몇 가지 장면에 대하여

소설 주인공보다 더 극적인 발터 벤야민의 몇 가지 장면에 관하여 파리, 카프리, 산 레모, 그리고 포르부
1. 파리 보들레르, 19세기의 수도, 아케이드 프로젝트
어쩌면, 아니 일종의 병이라고밖에 내 마음을 설명할 수 없겠다. 그곳을 향하는 마음, 그를 생각하는 마음. 지난 밤 나는 어떤 꿈을 꾼 것일까. 창밖에는 십일월 아침 햇살이 가득하고, 밤새 치열했던 꿈은 햇살 속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심증은 분명한데, 실체는 묘연하다. 확실한 것은, 꿈에 나는 일 년 전 어느 날, 누군가에 이끌려 파리의 거리들을 온종일 걸었고, 해질녘 어느 한 지점에 붙박히듯 서 있었다. 묵념을 하듯, 고개를 약간 숙이고, 애도의 마음으로 나는 누군가의 묘석과 마주하고 있었는데, 아마 거기 잠들어 있는 누군가의 이름을 바라보고 있었으리라. 이것이 꿈의 장면인지, 여러 번 찾아가서 익숙해진 기억의 장면인지 가릴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거기, 묘석에 새겨진 이름이 누군가이다. 그의 이름과 마주할 때면 내 귓전에는 수백수천 개의 문장들이 아우성친다.
불꽃으로 가득 찬 눈을 다시 뜨자
나는 내 누옥(陋屋)의 공포를 발견했다.

- 샤를 보들레르, 「파리의 꿈」, 『악의 꽃』(함정임, 파리예술기행서 『인생의 사용』 프롤로그 헌사)
파리에 관한 한, 가장 행복하고 충격적인 경험은 보들레르를 쫓아가는 것이다. 보들레르야말로 족보에 새겨진 진정한 파리 사람이기 때문이고, 동시에 평생 파리를 벗어나고자 지독하게 파리를 쓴 ‘19세기 최초의 이방인’이자 그것으로 ‘현대인이라는 새로운 종족’의 기원을 연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지난 밤 꿈에, 아니 일 년 전 수많은 날들, 나로 하여금 파리의 거리를 떠돌아다니게 만든 장본인은 따로 있다. 남프랑스 지중해의 동쪽 끝과 서쪽 끝, 그러니까 스페인과 이탈리아 국경을 넘어 마주쳤던 뜻밖의 장면들 속의 주인공이다. “모든 시대는 다음 시대를 꿈꾼다”(미슐레, 「미래로! 미래로!」)고 했던가. 19세기의 파리에 살지 않는 한, 그리고 더 이상 20세기의 파리에 갈 수 없는 한, 두 세기의 파리를 체화한 누군가의 안내를 받을 수밖에 없는데, 19세기에는 샤를 보들레르이고, 20세기에는 발터 벤야민이다. 나는 청춘시절부터 20년간은 전자를 통해, 그 후에는 후자를 통해 두 겹의 파리를 보고 배웠다.
파리 한복판에 있는 몽파르나스 묘원의 샤를 보들레르 묘 사진
△ 파리 한복판에 있는 몽파르나스 묘원의 샤를 보들레르 묘
파리의 아케이드들은 대부분 1822년 이후 15년 동안 만들어졌다. 아케이드가 등장하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은 직물 거래의 번창이다. 신유행품점 즉 대규모 상품을 가게 안에 상비한 최초의 점포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이것은 백화점의 전신이기도 하다. 발자크가 “마들렌 성당 광장에서 생 드니 문까지 쭉 진열되어 있는 상품들의 위대한 시(詩)가 각양각색의 시구를 노래하고 있다”라고 쓴 시대가 바로 이때였다.

- 발터 벤야민, 「19세기의 수도-파리」, 『파리의 원풍경』(『아케이드 프로젝트』 1), 조형준 옮김, 새물결)
2. 카프리 - 아샤 라시스와의 운명적인 만남, 1924년 5월에서 10월
꿈의 내용은 십일월의 아침 햇살과 함께 사라졌지만, 뙤약볕과 폭풍우를 견뎌낸 몇 알의 붉은 열매처럼, 내 손 안에는 보들레르가 이끄는 파리, 벤야민이 안내하는 보들레르와 파리는 분명해졌다. 때로 꿈에서 촉발되어 현실의 몇 시간, 아니 며칠을 꿈의 장면을 쫓아 살곤 하는데, 십일월 아침에 뜻밖에 환기된 벤야민은 세속적인 일들일랑 잠시 제치고, 그동안 끊임없이 파리를 드나들면서 떠돌아다녔던 거리들, 아케이드들, 그리고 도서관들을 되살려내라고 나를 부추겼다. 나는 이런저런 글에서, 심지어 최근 발표한 소설 속에까지 개입시킬 정도로 벤야민을 둘러싼 장면들에 사로잡혀 있었다.
프랑스에서 스페인으로 가는 방법은 방향에 따라 여러 가지가 있다. 내가 생각한 스페인 행로는 지중 해안선을 따라 피레네 산맥을 통과하는 것이었다. 프랑스 서쪽 끝 페르피냥에서 국경을 넘어 가면 만나는 첫 포구, 포르부로의 여행이었다. 포르부나 페르피냥이나 피레네 산맥을 국경 삼아 동과 서로 나뉘어져 있지만,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파예야 냄비에 해산물볶음밥을 만들어 먹고 바닷가 포도밭에서 수확한 포도주를 마시는 같은 피, 같은 기질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특히 포르부는 지도에 지명이 보일 듯 말 듯 가장 작은 단위의 크기로 표기되어 있는 포구 마을이었다. 그곳에 가려고 마음을 먹게 된 것은 일요일 퐁피두 도서관에 갔다가 서가에서 우연히 뽑아든 한 권의 책에서 시작되었다. 게르숌 숄렘이 발터 벤야민을 추억하며 쓴 「한 우정의 역사」. 나치에 쫓겨 스페인의 이 자그마한 포구마을 포르부에서 죽은 발터 벤야민을 추도하는 의미로 쓴 이 책의 첫 장을 넘기면 발터 벤야민의 한 마디가 박혀 있다. "게르하르트(숄렘), 나는 어쨌든 자네의 이 편지 구절들을 일종의 역사 기록으로 본다네."

- 함정임, 「스페인 여행」, 《한국문학》 2014년 가을호
행복하게도 나는 우정의 여러 감동적인 장면들을 기억하고 있는데, 이청준과 김현 선생을 향한 김윤식 선생의 우정, 프란츠 카프카를 향한 막스 브로트의 우정, 그리고 발터 벤야민을 향한 게르하르트 숄렘의 우정이다. 이들의 우정은 상호적이며, 지극하다는 데 공통점이 있다. 꿈의 끝자락에서 시작된 십일월 아침의 현실은 벤야민을 주인공으로 한 사랑과 우정의 여정이 되었고, 이제 보들레르를 지나 숄렘에게 이르렀다. 그리고 거기에서 급기야 또 다른 뜨거운 이름과 맞닥트렸는데, 벤야민의 그녀, 19세기의 수도를 해부해서 자본주의의 실체를 까발리고 자기 식대로 재구성하려는 엄청난 포부를 가졌으나 사랑 앞에서는 바보 천치처럼 소심했던 벤야민이라는 사내를 꼼짝 못하게 했던 아샤 라시스였다. 나는 서가 귀퉁이 사진들로 꽉 찬 궤짝으로 달려갔다. 십여 년 전 나폴리에서 배를 타고 갔던 카프리 섬의 장면들을 오래된 궤의 먼지와 어둠으로부터 햇빛 속에 꺼내놓았다. 1924년 5월과 6월 벤야민은 이 섬에 머물며 『독일 비극의 원천』을 썼고, 마르크스주의자인 러시아 여인 아샤 라시스를 처음 만났다. 이들의 극적이고도 운명적인 만남은 벤야민의 『모스크바 일기』의 옮긴이 서문에 이렇게 소개되어 있다.
난 상점에서 만델(견과류의 일종)을 사려고 했다. 나는 만델을 이탈리아어로 뭐라 부르는지 몰랐고 상점 주인도 내가 뭘 원하고 있는지 몰랐다. 이때 내 옆에 서 있던 한 남자가 ‘친애하는 부인, 제가 도와드려도 되겠습니까?’라고 물었고 난 ‘네 부탁합니다’라고 말했다. 난 만델 상자를 받아들고 다시 장터로 향했다. 그 신사가 날 쫓아오더니 물었다. ‘그 상자를 제가 들어다 드려도 되겠습니까?’ 내가 그를 쳐다보자 그가 말했다. ‘제 소개를 허락해 주시지요. 저는 발터 벤야민 박사입니다.’ 난 내 이름을 말해주었다.

- 김남시(발터 벤야민, 『모스크바 일기』 옮긴이 서문, 원문은 Asja Lacis, Revolutinar im Berf, 1971)
세계 최초의 백화점인 르 봉 마르셰 사진
△ 세계 최초의 백화점인 르 봉 마르셰. 발터 벤야민에 따르면 아케이드의 상점이 발전한 것이 백화점이라고 한다.
파리 생토노레 거리 사진
△ 파리 생토노레 거리의 아케이드들
3. 산 레모와 루르드 - 숨 가쁜 도피와 은둔, 그리고 망명의 꿈
꿈에서 시작된 십일월 아침의 뜻밖의 벤야민의 여로는 보들레르와 파리, 라시스와 카프리를 거쳐, 두 개의 국경을 향하고 있는데, 하나는 남프랑스 서쪽 알프스의 바다 쪽 산자락의 국경을 넘어 이탈리아의 산 레모이고, 다른 하나는 남프랑스 동쪽 피레네의 바다 쪽 산자락의 국경 지대인 루르드이다. 유대계 독일인 발터 벤야민은 나치의 추적을 피해 바타이유가 사서로 재직(1924~1942)하던 파리 국립도서관 지하 서고에서 13년에 걸쳐 보들레르와 파리를 연구하는데, 그 결과물이 미완이지만 『아케이드 프로젝트』(1927~1940)라는 방대한 저작이다. 그러나 이 기간은 연구실에 붙박여 지속적으로 집필한 것이 아니라 나치의 추적으로 생사를 오가는 도피 생활 속에 이루어진 것이다. 순간순간 목숨을 노리며 조여 오는 공포 속에 끊임없이 장소를 바꾸며 안정된 연구처를 희구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걸었던 희망은 미국행 배를 타는 것이었다. 오랜 도피 생활로 경제적인 궁핍에 시달린 벤야민은 북유럽과 남유럽을 가리지 않고 거처를 찾아 떠돌았다. 그는 1934년과 1935년에는 산 레모에 체류하면서 파리의 아케이드 연구했다. 이 산 레모는 몇 해 전 이혼한 전처 도라가 살고 있었고, 벤야민은 그녀의 집에서 은둔생활을 했다.
세상에 노출된 벤야민의 마지막 글은 편지이다. 그는 산 레모 이후, 주로 파리에서 보내다가 게슈타포의 추적이 극에 달하자 미국행을 단행한다. 편지는 1940년 8월 8일 피레네 산간 루르드에서 문학적인 동지였던 한나 아렌트에게 보낸 것으로 기록된다. 벤야민은 루르드에서 배를 타기 위해 피레네 국경을 넘었고, 1940년 9월 26일에서 27일 사이에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한나 아렌트는 한 달 뒤 이 비극적인 소식을 접했했다. 그리고 몇 달 뒤 포르부로 벤야민의 무덤을 찾아갔다. 그러나 그녀는 어디에서도 벤야민의 이름을 찾을 수 없었다.
묘지는 작은 만으로 이어지는데 바로 지중해에 면해 있어요. 그 묘지는 돌을 깎아 테라스 형태로 조성되어 있었어요. 그 돌벽 속으로 관들도 밀어 넣죠. 그곳은 내가 생전에 보았던 가장 환상적이고 아름다운 곳들 가운데 하나였어요.

- 한나 아렌트(게르숌 숄렘, 『한 우정의 역사』, 최성만 옮김, 한길사)
산 레모 거리 사진
△ 산 레모 거리
이탈리아 국경 포구 산 레모 사진
△ 이탈리아 국경 포구 산 레모.
이곳에서 마지막으로 머물던 벤야민은 한나 아렌트에게 편지를 썼다.
4. 포르부 - 생사의 기로에서 신비 속으로 사라지다
노란 꽃, 언덕의 노란 꽃, 돌무지 틈에, 바람에, 가만가만, 흔들리는 노란 꽃. 나도 모르게 꽃을 향해 손을 뻗었다. 손이 닿지 않아서 발뒤꿈치를 들었다. 노란 꽃에 손이 닿는 순간, 꽃 너머, 언덕 아래가 한눈에 들어왔다. 가파르게 깎아지른 듯 움푹 들어간 포구에 하얗게 파도가 치고 있었다. 순간, 등 뒤에서 백이 외쳤다. 그 바람에 손에 힘이 들어가 꽃을 툭, 꺾었다. 꽃대를 받치고 있던 돌무더기가 발아래로 굴러 떨어져 내렸다. 돌조각을 하나 주워들었다. 붉었다. 등 뒤에서, 백이 다시 외쳤다. 자동차는 길가에 세워져 있었고, 백은 빨리 오라는 손짓을 한 차례 더 했다. 뛰어가 조수석에 앉자 백이 시동을 걸었다. 귓불에는 찬 기운이 감돌았다. 그러나 유리창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은 따스했다. 자동차가 쏜살같이 언덕길을 달려 내려왔다. 국경을 넘었다. 스페인이었다.

- 함정임, 위의 글
몇 년 전, 남프랑스 여행을 하다가 페르피냥에서 피레네 산맥을 넘었는데, 원래 계획된 여정에 있던 것이 아닌, 순전히 우연히 이루어진 한 나절 여행이었다. 그런데 지중해안의 피레네 산간을 완상하며 포구와 마을과 산기슭과 기슭의 해변의 묘지와 철도역을 넘어 국경에 이르자 신비로운 분위기에 휩싸였고, 급기야 두 나라의 공유지인 언덕의 경계에 차를 세웠다. 왼쪽으로 내려다보면 하얗게 포말을 일으키며 부딪치는 해안가 포구마을과 철도역이 보였고, 오른쪽으로 내려다보면 역시 같은 풍경에 철도역만 없는, 더 작은 포구 마을이 보였다. 그곳이 포르부였다. 위의 대목은 그날의 기이한 느낌을 써본 것이다. 그날 즉흥적인 반나절 여행의 최종 목적지는 포르부가 되었고, 아비뇽을 거쳐 파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귀국하자마자 그곳, 포르부의 실체를 알게 되었다. 벤야민이 이승에서 마지막 숨을 쉬고 놓은 곳이라는 것을.
포르부는 언젠가는 다시 찾아가야 할 내 미래의 여행지이다. 포르부에 다녀온 뒤 지금까지 나는 벤야민에 사로잡혀 있다. 그러나 알고 간들, 아렌트처럼, 그곳에서 벤야민의 이름을 확인할 수는 없다. 그곳 공동묘지에 적혀 있는 벤야민의 이름과 설치물들은 모두 허구이다. 25년 가까이 보들레르나 카뮈 등의 무덤들을 찾아다닌 나의 경험에 비추어, 때로 실재보다 더 강력한 허구(가짜)가 창출되기도 하는데, 포르부의 발터 벤야민의 무덤이 그것이다.
여러 해가 지난 뒤 공동묘지 가운데 한 곳(아렌트가 본 곳)에 나무 위에 그의 이름을 써놓고 특별히 나무 울타리로 막아놓은 벤야민의 무덤을 볼 수 있었다. 내가 입수한 사진들에서 이 무덤은 실제의 묘지에서 동떨어진 곳에 완전히 홀로 서 있는 모습인데, 이 사진들을 보면 그것은 묘지 관리인들이 그의 무덤을 찾는 사람들에게서 팁을 받기 위해 만들어낸 것임이 분명하다. 그곳을 찾았던 사람들도 같은 인상을 받았다고 내게 얘기해주었다. 틀림없이 그곳은 아름다운 곳이지만 무덤은 가짜다.

- 게르숌 숄렘, 위의 책.
피난민 추모 언덕 사진
△ 프랑스에서 스페인 방향의 피레네 국경에 있는 피난민 추모 언덕
이탈리아 카프리 섬 사진
△ 이탈리아 카프리 섬 이곳에서 벤야민은 독일 비극의 기원을 집필하고 아샤 라시스를 처음 만났다.
현대의 변화된 조건 속에서의 지식인의 역할에 대해 성찰하고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한 언어철학자 벨터 벤야민.

인문사회과학의 다양한 모티프를 제공하였고 21세기에 들어서도 여전히 주목받는 철학자.
벨터 벤야민 사진
1) 제목은 발터 벤야민의 「보들레르의 몇 가지 모티브에 관하여」를 차용한 것이다.
2) 이 글을 위해, 『아케이드 프로젝트 1 - 파리의 원풍경』(발터 벤야민, 조형준 옮김, 새물결), 『일방통행로』(발터 벤야민, 조형준 옮김, 새물결), 『한 우정의 역사』(게르숌 숄렘, 최성만 옮김, 한길사), 『발터 벤야민의 모스크바 일기』(발터 벤야민, 김남시 옮김, 그린비), 『벤야민의 마지막 횡단』(제이 파리니, 전혜림 옮김, 솔), 그리고 필자의 「스페인 여행」(《한국문학》 2014년 가을호)과 파리예술기행서 『인생의 사용』(해냄)을 참고하고 인용했음을 밝힌다.
글과 사진
함정임_소설가, 동아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1964년생.
소설『이야기, 떨어지는 가면』, 『동행』, 『행복』, 『당신의 물고기』, 『아주 사소한 중독』, 『버스, 지나가다』, 『네 마음의 푸른 눈』,『춘하추동』
산문집 『하찮음에 관하여』, 『그리고 나는 베네치아로 갔다』, 『인생의 사용』 등
  • 본 콘텐츠는 저작권법에 의하여 보호받는 저작물입니다.
  • 본 콘텐츠는 사전 동의 없이 상업적 무단복제와 수정, 캡처 후 배포 도용을 절대 금합니다.
작성일
2015-02-02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