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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보는 철학자

「어셈블리」정치,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투자

어셈블리 정치, 세상에서 가장 가치있는 투자어셈블리 정치, 세상에서 가장 가치있는 투자

정치와 인생의 공통점은 정답이 아니라 선택만이 있다는 것

매일 아침 한강의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동을 하다보면 가슴까지 답답하게 막히게 하는 상습정체구간이 있습니다. ‘국회-한강대교 정체’란 빨간 글씨를 보는 순간부터 출근길 컨디션이 급다운 되는 거죠. 물론 올림픽대로의 상습정체에 ‘국회’가 직접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정체구간을 알리는 전광판에 떠오 른 ‘국회’란 글씨에 어떤 부정적인 연상 작용을 일으킬 정도로 올 한해 우리에게 들려 온 국회 소식은 국민들 일상의 컨디션을 지속적으로 다운시켜 왔습니다. 드라마 <정도전>을 통해 잘 알려진 작가 정현민은 조선의 정치이야기를 오늘날의 이야기로 끌어 온 드라마 <어셈블리>에서 이렇게 묻습니다.

"무한경쟁, 승자독식의 논리가 판을 치는 정글 같은 세상, 승자에겐 관용이 없고, 패자에겐 희망이 없는 이 팍팍한 세태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향해야 할 공통의 가치는 무엇일까?"

유대계 미국인 기자 밀턴 마이어는 독일의 패전 이후 10년이 지난 어느 시점에, 전직 나치 당원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나치즘이 독일 사회로 스며든 과정’을 추적하고는 이런 결론을 내렸습니다. 나치즘은 ‘악의 점진성과 익숙함, 그리고 습관화로부터 탄생’했다고 말입니다. 쉽게 말해 히틀러는 처음부터 유대인을 학살한 괴물이었던 것이 아니라 나중에 히틀러가 괴물이 되었을 때 이미 사람들이 그것을 묵인할 지경에 이르도록 그 사회에는 악이 습관처럼 자리 잡고 있었다는 말입니다.(밀턴 마이어의 저작 <그들은 자신들이 자유롭다고 생각했다>에서). 지금의 우리의 정치도 불신을 넘어 포기로 치닫고 있지만, 그럼에도 이 드라마는 이렇게 묻고 있습니다. "어떻게 좋은 정치는 가능할까?"라고요. 이 물음에 대한 의미와 함께 2015년을 마감하며 여러분과 함께 다시 들여다 보고자 하는 드라마는 바로 <어셈블리>입니다.

드라마의 주인공인 용접공 출신 초선 국회위원 진상필(정재영 분)은 질문이 많은 국회위원이란 점이 참으로 흥미롭습니다. 다른 국회위원 모두가, 심지어 야당 국회 위원들까지도 당연시하는 모든 말과 행동이 그에게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모습으로 비춰지고 끊임없는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또 누구 때문에 공천을 받았든 혹은 어떤 생각으로 그런 미심쩍은 공천을 받아들였든 이왕에 국회위원이 되었기에 어떻게 하면 정치를 제대로 할 수 있는지 고민하고 알고 싶어합니다.

엘리트출신 베테랑 정치인 백도현(장현성 분)의 자신 있는 그 한마디,

“정치와 인생의 공통점이 뭔 줄 아십니까? 정답은 없고 선택만이 있을 뿐이란 점이지요.”

란 말처럼 각자의 선택에 따라 정치에 대한 입장도 이해도 다르고 또 그만큼 정치 문제가 민감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좋은 정치는 무엇이고 어떻게하면 좋은 정치가 가능한지' 포기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결국 사람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 "정치"이기 때문이니까요.

사실 이 물음은 기원전, 고대 그리스시대부터 고대 로마시대를 거쳐 중세와 근대, 그리고 지금까지도 제기되고 있으며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인류의 난제입니다.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니라, 미국도 유럽도 중국도 경중은 다르겠지만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좋은 삶, 혹은 좋은 정치"란 것이 상황과 문맥에 따라 그때그때 다르게 해석 될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자신 있게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골치 아프지 않게 ‘없다고 믿고 싶은 건’ 아닐런지요.

정치가는 다음 세대를 생각하고, 정치꾼은 다음 선거를 생각한다.

한국 드라마의 특징은 장르가 따로 없는데 비해 공통점은 분명히 존재한다고들 말합니다. 무슨 말이냐면, 정치드라마, 경제드라마, 범죄드라마, 의학드라마 등 표면상 장르구분은 있지만 내용을 들여다보면 하나같이 “로맨스 물”이라는 거죠. 따라서 공통점은 늘 “사랑”입니다. 정치드라마는 정계에서 이우러지는 사랑, 경제드라마는 회사에서의 로맨스, 범죄드라마는 경찰들의 사랑, 그리고 의학드라마는 의대생들의 사랑을 그립니다. 그런데 이 드라마 <어셈블리>의 가장 도드라진 특징은 인간적인 ‘존경’과 ‘사랑’은 있지만 로맨스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낯선 시도로 인해 촌철살인의 대사와 탄탄한 대본에도 불구하고 시청률이 저조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 드라마는 2015년 최고의 명작인 동시에 실험적인 드라마로 여겨집니다.

다시 드라마로 돌아가서, 아마추어 국회위원 진상필의 진상짓(?)을 해결하느라 늘 분주한 보좌관 최인경(송윤아 분)에 주목해봅니다. 삼수 끝에 턱걸이로 서울 대에 들어가 백도현이란 반짝반짝 빛나는 선배의 서클에서 학생운동의 맛을 본 그녀는 조심스럽게 백도현에 대한 존경과 사랑을 키워왔습니다. 그렇게 그의 보좌관 시절도 보내고 청와대 생활도 맛보며 “정치”에 뜻을 품어 온 그녀 는 진상필의 정확한 표현대로, “국회의원급 보좌관”입니다.

이 드라마의 첫 번째 아이러니는 바로 이점입니다. 현실의 국회위원들은 생각 하지 않는 철학과 소신, 그리고 올바른 정치의 꿈을 보좌관이 가지고 있다는 점이죠.

그런 최인경에게 진상필의 비서관 규환이 묻습니다. 보좌관님은 왜 그렇게 진 의원을 좋아하느냐고. 규환은 진상필과 해고자 복직 투쟁을 함께했고, 그에게 배신을 당해 결국 죽기까지 한 것으로 알려진 배달수의 아들입니다. 그가 ‘국회의원이라는 작자들은 다 그 밥에 그 나물이 아니냐’고 묻자 최인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도 그 사람과 함께라면 설령 실패를 한다고 하더라도 괜찮을 것 같다고요.

정치판에서 실패한다는 것은 거의 모든 것을 잃는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모든 의원들이 그렇게도 실패를 두려워합니다. 그런 정치판의 생리를 누구보다 잘 아는 최인경 은 왜 진상필이라는 정치적으로 무능하기 짝이 없는 인물을 신뢰했던 것일까요? 세련된 정치 감각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고, 걸핏하면 흥분해서 할 말 못할 말 가리지 않고 쏟아내는 그 촌스런 정치 신인에게 무엇을 기대했던 것일까요?

아마도 그것은 진상필이 믿고 있는 바른 정치에 대한 믿음, 언제나 어떤 상황이든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 편에 서 있어야 한다는 바로 그 단순하고 우직한 믿음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최인경과 비청계 우두머리 박춘섭은 마찬가지일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모두 승부사였기 때문입니다. 다급한 마음에 달려와 이런저런 소릴 늘어놓은 친청계 백도현의 초조함을 비웃으며, 자신은 아홉 번 출마해서 몇 번의 고배를 마셨지만 그런 실패를 두려워 한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바로 승부사라고 말합니다. 정치에서도 인생에서도 실패를 단 한 번도 겪어보지 않았던 백도현이었기에 그는 진상필과의 치킨게임에서 그 긴장감을 견뎌내지 못하고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최인경 진상필 콤비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은 것과 박춘섭이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은 것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습니다. 한 쪽에는 올바른 정치에 대한 믿음과 소신이 있고, 다른 편에는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는 노련한 생존 기술만이 있을 뿐입니다. 한 쪽에는 국민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전부를 다 놓을 수 있지만, 다른 편에는 그 국민 전부가 그저 자신의 생존을 이어가기 위한 수단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올바른 정치에 대한 최인경의 믿음과 소신은 어디에 뿌리를 두고 있을까요?

“정치를 외면한 가장 큰 대가는 제일 저질스러운 사람들의 지배를 받는 것”

이 말은 극중 최인경이 투표를 하지 않는 청년 규환에게 힘주어 한 말입니다. 그것도 지금으로부터 2500여 년 전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이 한 말이라고 하죠. 플라톤은 “훌륭한 통치자를 둔 이상적인 공동체”를 꿈꾸었습니다. 실제로 그는 자신의 스승인 소크라테스가 아테네식 민주주의의 희생양이 된 것을 보고, 무지한 자들이 통치의 권력을 갖게 되었을 때 공동체가 어떤 위험에 처할지를 실감하였습니다.
그가 생각한 이상적인 공동체는 공동체의 각 부분이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해내면서 동시에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루고 있는 공동체입니다. 말하자면 통치자는 통치자 로서의 제 몫을 다하고, 나라를 수호하는 자들이나 생산을 담당하는 사람들 모두가 자신의 자리에서 제 본분을 다하는 것입니다. 플라톤이 통치자의 자격조건을 ‘지혜 로운 자(철인)’로 삼은 것은 이 때문입니다. 공동체를 이끌어 갈 사람은 무엇이 옳은 일이고, 무엇이 해서는 안 될 일인지를 제대로 아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플라톤은 공동체와 정치의 문제를 바다에서 위태로운 항해를 계속하고 있는 배에 비유합니다. 민주주의라는 제도에서 진짜 권력을 가진 자는 투표권을 가진 국민들 입니다. 바로 이 국민들이 배의 주인, 즉 선주인 것입니다. 문제는 이 선주가 바다나 배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상태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의 국회의원쯤으 로 생각할 수 있는 선원들은 각기 자기가 배에 대해 잘 안다고 말하면서 선주를 현혹시켜 자기가 배를 움직이는 권력을 잡으려고 애를 씁니다. 그런 선원들은 선주를 어르고 달래서 권력을 얻어내는 것만을 목표로 할 뿐, 배를 올바르게 운항하는 일에는 관심도 없습니다. 그들의 목표는 자신들이 꿈꾸는 권력이지 배의 주인인 국민의 행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플라톤이 아테네 민주주의 제도에 대해 부정적이었던 것은 권력을 가진 시민들이 배와 항해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선주와도 같은 상황이라고 믿었 기 때문입니다. 플라톤의 이러한 태도는 민주주의의 가치를 중시하는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물론 민주주의를 최선의 제도라고 할 수만은 없습니다. 오직 당파간의 이익을 위한 싸움으로 변질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민주주의가 최선일 수 없다고는 해도 그렇다고 독재를 선택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독재의 패덕은 민주주의의 패덕에 비할 바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우리가 지향하는 정치제도와 플라톤의 것은 다릅니다. 하지만 그 본질 은 다르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플라톤은 통치자에게 지혜로울 것만 요구하지는 않았습니다. 설령 무엇이 옳은 선택인지를 ‘아는 자’라고 하더라도 이해관계를 갖게 되면 잘못된 판단을 할 수도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 사유재산이나 가족마 저도 허용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플라톤이 통치자 혹은 이른바 정치가들에게 요구하는 덕목은 분명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해관계보다는 공동체의 안녕을 최우선시 해야 하는 종복의 정신을 가져 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주인공 진상필의 소신이기도 합니다. 비록 진상필과 플라톤은 서로 다른 정치 제도를 꿈꾸었지만 정치의 본질에 있어서는 한결 같았 던 것입니다. 바로 나라의 주인인 국민을 위한 정치 말입니다.

드라마 내내 진상필은 한결같이, 그리고 최인경은 차츰차츰 소위 정무적 감각에 따라 말과 행동을 하기보다는 국민의 입장에서 국민을 위한 생각과 판단으로 행동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시대에 이런 정치인이 가능할까요?

청년 규환이 투표를 하지 않는 이유는 다 ‘그놈이 그놈’이어서라고 합니다. 찍을 사람이 없으니까 투표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죠. 그런데, 일개 용접공 진상필을 국회 위원으로 만든 건 결국 경제시 시민들의 투표였듯, 좋은 정치인이 없다면 그나마 덜 나쁜 정치인을 뽑기 위해서라도 투표를 해야만 합니다. 그것은 우리들의 권리이자 의무이니까요. 플라톤이 아주 오래 전에 경고했던 “큰 대가”를 치르지 않기 위해서라도 말입니다.

김정민 (철학 큐레이터, 스토리밸류센터장, 성균관대 철학과 졸업)
이미지 출처
KBS드라마 어셈블리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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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5-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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