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의 여로

기억의 성소, 김소진과 미아리

기억의 성소 김소진과 미아리
10월 중순의 토요일 오후, 길을 나선다. 작품 속의 민홍처럼 신도시에서 경의선 기차를 타고 나와 신촌에서 미아리행 버스에 몸을 싣지는 않는다. 내가 일하는 사무실에서는 지하철을 한 번 갈아타면 된다. 오랜만의 걸음인데도 길음역은 그리 설지 않다. 한참 된 이야기지만 민홍이 찾아가는 길음동 산동네 초입에서 나도 잠깐 산 적이 있다. 그 무렵 "방우 학생"이던 대학 동기 김소진을 길음시장통에서 우연히 만나기도 했다. 87년 어름이었지 싶다. 그날 처음으로 김소진의 뒤를 따라 산동네 길을 올랐다. 몇 년 뒤 등단작 「쥐잡기」의 무대로 재건하게 될 김소진의 그 산동네 집에서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기억에 없다. 허름한 대학노트에 촘촘히 정리해놓은 김소진판 우리말 사전은 기억에 있다. 김소진이 떠난 뒤 모 방송국의 문학기행 프로그램 촬영차 소설가 한창훈과 함께 그곳을 다시 찾은 적이 있다. 97년 한여름이었다. 소설 속 '미아리 셋집'은 문이 닫혀 있었다. 좁은 골목으로 면한 자그마한 창문까지 꼭꼭 닫혀 있는 것으로 보아 사람이 살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민홍으로부터 삼만 원을 송금 받아 보일러를 고치고 겨울을 난 셋집 사람도 재개발이 임박하면서 떠났던 게 아닐까. 그날 민홍은 이 집을 들르지 않았다. 골방 이불 보따리에 끼워져 있던 아버지 영정 사진은 나중에 가져갔을까. 그날 돌산 마을버스 종점에서 내려다 본 산동네는 소설 속에서 민홍이 바라본 풍경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 동네 초입. 일부 남아 있는 옛 집들 너머로 아파트촌이 보인다
△ 이 아파트 숲 어딘가에 '장석조네 기찻집'과 '미아리 셋집'이 있었을 터
구 경계선인 한길을 따라 걸어내려 가려니까 왼쪽으로는 임마누엘 교회 하나와 구멍가게 한 채를 빼놓고는 이미 철거가 다 끝난 폐허의 등성이뿐이었다. 미처 챙겨가지 못한 망가진 가재도구들이 제멋대로 누워 있는 벽돌 무더기 사이로 사람들이 자근자근 밟고 다녔을 골목길들이 호젓한 산길처럼 구불구불 뻗어나 서로 얽히고 설켜 있었다.
그러나 내가 갔을 때는 소설 속의 시간으로부터 적어도 반 년은 지났을 무렵이었다. 왼쪽 미아동 방향의 잔해들 위로 교회나 구멍가게를 본 것 같지는 않다. 오른편 정릉 쪽으로 또 하나의 '폐허의 등성이'를 보았을 뿐. 무너진 집터 한가운데 앉아 벽돌 위에 프라이팬을 걸고 낮술을 마시는 사내들도 볼 수 없었다. "폐허와 술"이 빚어내는 "묘한 활력"을 목도하는 행운은 역시 이방인의 몫은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나에겐 민홍처럼 그 폐허의 등성이에서 기억의 육체가 사라져가는 것을  보고 슬퍼할 수 있는 권리 따위는 없었다. '눈사람 속의 검은 항아리'는 그만의 진실이고 허구일 테니까. 나는 다만 그 사내들처럼 낮술을 마시고 있지는 않았을까. 기억의 육체가 사라져가자 자신의 육신도 거기에 겹쳐버린 너무 조급한 죽음을 옆에 두고 지글거리는 태양 아래서 폐허의 구경꾼이 되어 마시는 낮술이 어찌 달지 않았을까. 그 '묘한 활력'을 나도 민홍에게 설명할 길이 없다는 게 안타까움이라면 안타까움이었겠다.
△ 일부 남아 있는 옛 동네의 좁은 골목길
그러니까 이번의 산동네 순례는 세 번째인 셈. 다시 8년이 지났다. 날은 을씨년스러웠다. 바람도 만만찮았다. 길음역을 나오자마자 다시 역사로 종종걸음을 쳤다. 길음시장통 초입은 길이 전보다 넓어진 느낌이었지만 크게 변한 것 같지는 않았다. 산동네 쪽 입구로 들어가자 낯선 풍경이 앞을 막아섰다. 예전의 산동네는 사라지고 없었다. 대규모 고층 아파트 단지가 눈앞을 메우고 있었다. 두리번거리는데 "반쯤 부서진 집들"과 "세로로 절반쯤 깨진 큼직한 항아리" 대신 번듯한 아파트 상가가 눈에 들어왔다. 내겐 민홍이 국민학교 시절을 보낸 한 지붕 아홉 가구 장석조네 집에서의 그 아득하고 피로했던 기억이 없는 탓이리라. 잠시 후 숨을 고르고 차분히 살펴보니 옛 동네가 죄다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아파트의 숲 사이로 산동네의 낮고 잡은 집들이 일부 남아 있었는데 마지막 재개발을 앞두고 있는 듯했다. 두 시간 가량 오르고 내리며 이곳저곳을 헤맸다. 마지막 달동네의 증거로 남아 있는 작은 등성이에서는 발길이 느려졌다. 한두 사람이 겨우 빠져나갈 만한 좁은 골목길, 시멘트 계단, 그 집이 그 집 같은 곳들. 아주 오래 전의 풍경 같았다. 그러나 골목을 조금 돌아다니다 보면 금방 좁은 길이 끝나면서 훤한 아파트 단지가 기다리고 있었다. 쾌적해 보였다. 마을버스를 타고 돌산 종점에도 올라보았다. 사방이 빼곡히 아파트 숲이었다. 저쪽 어딘가에 장석조네 기찻집이나 민홍의 미아리 셋집이 있었겠지만, 나로서는 가늠이 되지 않았다. 민홍이라면 그곳이 어딘지 바로 손으로 가리켰을 것이다. 왜 아니겠는가. "여태껏 나를 지탱해왔던 기억, 그 기억을 지탱해온 육체인 산동네"가 아닌가. 그러나 민홍 역시 손을 들어 그곳을 가리키는 것 말고 달리 무슨 방도가 있을 것인가. 그날 눈사람 속에 금간 검은 항아리를 숨기고는 "개똥 천지 돌산길을 돌아나와, 눈이 질척거리는 시장거리, 연탄재가 어지럽게 뒹구는 인수교회 뒤쪽의 좁은 골목길들을 혼자 떠돌다 (… …) 길음천변의 음산한 텍사스 거리를 겁 없이 걸어다녔"던 민홍은 바로 그 순간 기억의 순금 지대를 자기도 모르게 지나고 있지 않았을까. 그것은 항아리를 덮고 있던 눈이 한낮의 해를 이기지 못하고 녹아 내릴 수밖에 없는 사정과 정확히 대응되지 않겠는가. 해질녘 집에 돌아오니 눈사람은 깨끗이 치워져 있고 어머니며 기찻집 사람 누구도 자신을 거들떠보지 않았던 것.
나는 나를 둘러싼 세계가 너무도 낯설게 느껴졌다. 내가 짐작하고 또 생각하는 세계하고 실제 세계 사이에는 이렇듯 머나먼 거리가 놓여 있었던 것이다. 그 거리감은 사실 이 세계는 나와는 상관없이 돌아간다는 깨달음, 그러므로 나는 결코 주변으로 둘러싸인 중심이 아니라는 아슴프레한 깨달음에 속한 것이었다.
이 낯섦과 거리감은 근원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세계에 맞서 자기를 세우고자 하는 자가 부단히 부닥칠 수밖에 없는 곤경이다. 기억의 패배도 이 자리에서 보면 불가피한 것이다. 그러나 김소진의 문학은 이 곤경으로부터 세계의 부정이나 허무로 달려가지 않았다. 그가 택한 방식은 자신의 자리에 미아리 산동네를 통째로 올려놓고 정작 자기는 종잇장처럼 얇은 기억 그 자체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눈사람 속의 검은 항아리는 김소진 문학의 의지이자 운명이었다. 민홍이 산동네를 떠나기에 앞서 똥 눌 곳을 찾아 폐허 사이로 난 내리막길을 내달려가는 장면이 아름다울 수밖에 없는 것도 그래서다. 민홍은 반쯤 부서진 집들 속에서 "세로로 절반쯤 깨진 큼직한 항아리"를 발견한다. 그것은 민홍만이 발견할 수 있는 기억의 성소일 터. 그 속에서 폐허의 집터 위로 떨어뜨린 "굵은 황금빛 똥"은 이제 곧 "포크레인의 날카로운 삽질에 깎여" "송두리째 퍼내어질" 산동네의 마지막 육체가 되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것이 김소진 문학의 마지막 육체가 될 줄이야 또 누가 알았겠는가. 민홍이 바지를 추스르며 나온 빈집 항아리 속으로 냄새를 맡은 누렁이 한 마리가 들어가는 모습이 보인다. 민홍이 산동네와 정직하게 몸을 바꾸는 순간이다. 창이 형의 형수가 된 국희를 향해, 혹은 춘하(「춘하, 돌아오다」)를 향해 민홍이 쏘아붙인다. "쐐년." 이런 것이 그들의 사랑이고 김소진의 문학이었으리라. 그립다. 이제 내려가볼까 하고 있는데 전신주 위로 길을 알리는 표지가 보인다. '동방길.' '그리운 동방', 그렇다. 민홍이 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진 다음날 아침 제일 먼저 들렀다는 '신풍의원'도 아직 남아 있다. 조금 더 지켜볼 수는 없었나.
△ 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진 다음날 아침 제일 먼저 들렀던 신풍의원
△ 길음시장통의 마을버스. 그날 민홍은 마을버스를 타지 않았다.
위대한 캐츠비
김소진의 소설은 고난의 시대를 살아온 서민들의 삶의 애환을 절실하고도 아름다운 문체로 그려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가난한 도시 서민의 애환들을 풀어낸 소설 속 에피소드를 해학적으로 표현되었다.
글과 사진
정홍수_평론가. 1963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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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4-10-31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