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의 철학

끝나지 않을 우리들의 파티

철학한답시고 글 안종준 그림 김지혜철학한답시고 글 안종준 그림 김지혜

아파트 전경. 슬모의 집, 거실. 슬모가 잠옷 차림으로 쇼파에 앉아 TV를 보며 뒹굴댄다. TV에선 연말을 알리는 뉴스가 나오고 있다. 앵커가 명동 거리에 나와 “연말이 다가와 거리엔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멘트 치는 모습. 슬모는 TV를 보며 심드렁한 표정이다. 슬모 벌써 연말이구나.... (스마트폰 꺼내 날짜 확인해보면 ‘2015년 12월26일’ 날짜가 액정에 표시되고) 올해도 다 갔네... 그 때 슬모의 얼굴에 엽서가 한 장 철썩 내리 꽂힌다. 슬모, “아얏!” 하며 위를 올려다보면 슬모의 엄마가 슬모에게 엽서를 내리 꽂은 것. 슬모엄마 빈둥거리지 말고 네 우편물이나 챙겨 가, 이것아~! 슬모 (엄마 보며 넉살좋은 미소) 헤에~ 땡큐, 마미. 슬모 엄마는 “이걸 누가 데리고 가... 쯧쯧...” 하며 슬모가 앉아 있는 쇼파를 신경질적으로 청소하고, 슬모는 얄밉게 엄마를 샥 비키며 엽서 내용을 확인한다. 엽서는 <끝나지 않을 우리들의 파티> 라는 제목의 파티 초대장이다. 장소는 옥상, 날짜는 12월27일 저녁 7시. 난보, 요정, 필녀, 사자의 얼굴이 그려져 “끝나지 않을 우리들의 삶을 위해! 다들 컴온~!!” 이라는 메세지가 적혀 있다. 슬모 (엽서 보며) 헤헷, 재밌겠다~ 슬모엄마 (슬모가 서 있는 곳 청소하며) 아우! 좀 비켜! 슬모 (엄마 비켜 서며) 헤헤... 뭐 입고 가지... 헤헤... 슬모 엄마는 청소하며 슬모가 귀찮아 계속 구시렁대고, 슬모는 바보같이 계속 웃고 있는 모습- - 옥상 전경. 옥상 세부 모습 들어가면, 옥상 마당에 춥지 않게 천막을 치고 난로를 피우고, 곳곳에 예쁜 전등과 트리 등으로 연말 파티장 분위기를 냈다. 옥상 방 안도 문을 열어 놔 마당과 이어진 파티장의 일부로 사용하고 있다. 난보, 요정, 필녀, 사자는 옥상 곳곳에서 버너로 음식을 만들거나, 음식과 술을 세팅하거나, 전등을 세팅하거나, 음식 나르거나... 즐겁게 준비 중이다. 모두 나름 차려입은 모습들이다. 그 때, 슬모와 이대리가 옥상에 들어온다. 두 사람도 나름 차려 입고 온 모습.

슬모 저 왔어요~~~! 모두들 (슬모와 이대리를 쳐다보고) 난보 (쏜살같이 슬모와 이대리 곁에 와 코트를 받으며) 와우, 어서 오시죠. 마드모아젤. 이대리 (장난치듯 도도한 표정, 장갑도 벗어주며) 메르시~ 그리고 슬모도 웃으며 난보에게 코트 벗어주려 하자, 어느새 요정이 난보 앞에 나타나 슬모의 코트를 받는다. 난보, “언제 온 거지...” 중얼대며 보고- 슬모 (수줍은 듯 미소 띄며) 감사합니다. 요정 (미소 띄며) 어서 와. 필녀와 사자가 슬모, 요정을 보며 “우후~” 하며 음흉한 미소 짓는다. 슬모 (난로 주위 먹을 것들 보며) 와~ 맛있겠다! 대리님, 가서 같이 먹어요. (그 때, 이대리의 뒤쪽에 누군가 있는 것 발견) 어...? 저기... 다들 뒤쪽 보면, 덩치남이 마치 보란 듯이 난간에 기대 담배를 피우는 뒷모습 보인다. 모두들, “불러달란 거겠지...?”, “연말인데 외로워 보인다...”, “같이 먹자...” 등등 중얼거리고- - 난로 주위, 필녀, 사자, 난보, 요정, 슬모, 이대리, 덩치남, 다함께 도란도란 서서 음식과 술을 먹는다. 만찬이다. 슬모 너무 맛있어요~~!! 사자 슬모는 연말인데 데이트 없었어? 슬모 에이~ 남친 없는 거 아시면서! 헤헤~ 이대리 슬모씨 예뻐서 회사에서 소개팅 엄청 들어와요~ 그런데 한사코 거절하더라구요. 한 번 나가봐도 좋을텐데~ 요정 (슬모를 한 번 쳐다보고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음식 먹고) 필녀 어머~~ 슬모 넌 그런 거 다 나가야 돼! 안그럼 나처럼... (하는데) 사자 (필녀의 입을 막고) 연말에 왜 자학을 해. 으응~? 슬모 안그래도 연말에 집에서 빈둥거리고 있어서 엄마가 싫어했는데 딱 잘됐지 뭐예요. 파티도 오구~

이대리 덕분에 저도 감사해요. 한 해의 끝이라는 게 좀 서글펐는데, 다같이 있으니까 좀 낫네요. (미소) 난보 에이, 그렇다고 끝이라 생각하면 안되죠~ 이대리 (의아한 표정) 응? 그럼요? 난보 왜 그 말 몰라요?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이대리 아, 알죠. 요기 베라 였었나요? 그 야구 선수였던.. 난보 네, 맞아요. 우린 이렇게 살아 있잖아요. 아직 끝난 게 아니에요. 요정 우리들 삶이 정지되거나 중지되지 않는 이상, ‘끝’ 이라는 건 영원히 도착하지 않은 시간이죠. 난보가 서 있고, ‘끝’이라는 텍스트는 동떨어져 있어 난보가 호탕하게 껄껄 웃고 있는 이미지 삽입. 이대리 아, 그런 의미라면 그렇죠. 그냥 올해만 끝이 나는 거지, 우리 삶이 끝나는 건 아니니까... 필녀 하지만 생각해보면, 우리들 삶은 너무 불투명해. 그렇잖아요. 다들 내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세상 속에 살고 있잖아요. 바로 내일 끝나버릴 지도 모르는 세상인 거죠. 사자 그런 의미에서 우리들은 언제나 끝 바로 앞에 놓여져 있는 거지. 끝은 아니지만 언제나 그 바로 앞에. 난보에게 ‘끝’이라는 텍스트가 더욱 가까워져 있다. 난보가 서 있는 위치에는 ‘바로 앞’ 이라는 텍스트가 표현되고, 난보의 표정은 아까의 껄껄 웃는 모습에서 긴장된 표정으로 바뀌었다. 이대리 우린 언제나 끝 바로 앞에 놓여 있다... 의미심장한 말이네요. 슬모 연말이라 그런지 더 와닿는 것 같아요. 끝 바로 앞. 사자 그렇지.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라는 역사 철학자가 있어. 그 분이 쓴 <역사 : 끝에서 두 번째 세계>라는 책은 본인이 죽고 난 뒤에 나온 유고작이야. 그야말로 완성이라는 끝 바로 앞에서 멈춰있는 역사책인 거지.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의 얼굴과 책 표지 이미지 삽입. 슬모 와... 책에도 생명력이 있다고 해야 되려나. 생명력이 대단한 책이네요. 요정 끝이라는 순간이 자기 자신을 덮쳐 오지 못하게 하려고 계속 써낸 거야. 삶을 지속하기 위해서. 이대리 멋있네요. 끝 바로 앞에서 끝까지 싸웠다는 느낌이에요. 그분은. 슬모 맞아요! 멋있어.. 그래서 죽고 난 뒤에도 책이 나올 수 있었나봐요. 사자 하아... 우린 이제 뭘 하면 되려나? 올해가 지나가고 있는 이 시간은 정말로 끝 바로 앞의 시간일텐데. 모두들, 각자 생각에 잠긴 듯 잠시 침묵. 덩치남 (음식을 먹으며) 크라카우어는 <역사 : 끝에서 두 번째 세계>에서 역사를 탐구한다는 건 세상의 도그마들 사이에서 진짜를 찾아내 이름을 붙여주는 것이라 했다. 모두들 (의아한 표정으로 덩치남을 쳐다보고) 슬모 도그마...? 진짜...? 덩치남 도그마는 상투적인 것들을 말한다. 그러니까 역사를 탐구한다는 건, 그런 상투적인 것들 속에서 생생하고 활력을 잃지 않은 진짜를 찾아내야 한다는 거다. 커다란 텍스트 이미지 삽입 : [ 도그마 = 도식이 되어 상투성으로 전락한 것 ] / [ 진짜 = 생생하고 활력을 잃지 않은 것 ] 슬모 (알겠다는 듯) 아.... 덩치남 그러니까, 지금 여기, 끝 바로 앞의 시간에서 해야 할 건, 나의 역사, 나의 지난날을 탐구하고 돌이켜 볼 것. 그래서 틈새에 파묻혀 있어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진짜’를 찾아내 이름을 붙여주는 일일 거다. 난보 지난날을 돌이켜 보기... 필녀 (미소 띄며) 그래... 단순하지만 거기부터 출발해야 하는 거였네. 슬모 그 속에서 그냥 흘려보냈던 진짜 좋은 것들... 그런 걸 찾아서 이름도 붙여보고... 곱씹어도 보고... 요정 그게 우리가 끝 바로 앞에서 삶을 써내려가는 방법이겠지... 끝이 다가오는 걸 막는 방법이라 하면 되려나... 사자 그래. 오늘처럼... 끝나지 않을 우리들의 파티를 즐기듯이... 끝나지 않을 삶을 계속 살아가야지. 안 그래? 모두들, 입가에 따뜻한 미소들이 떠오른다. 슬모 (하늘 보며 놀란 표정) 엇?! 저기 별똥별이에요! 모두들, “정말?”, “어디어디?”, “진짜?” 등등의 반응들.

슬모, 천막 바깥으로 후다닥 뛰어 나가며- 슬모 다들 뭐해요~ 빨리 나가야죠! 모두들, 후다닥 천막 바깥으로 나가 난간에 기대 하늘을 본다. (*요정은 슬모의 곁에) 정말 별똥별이 무수히 떨어지고 있고- 사자 진짜네... 슬모 이쁘다... 모두들, 별똥별을 보며 감상에 젖은 표정들. 슬모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을 쳐다보고- 다른 사람들은 눈을 감고 있기도 하고, 하늘을 쳐다보고 있기도 하고, 손이 시려워 입김을 내뿜기도 하고, 제각각인 모습들. 슬모NAR 옥상에 왔던 올 한 해... 좋았던 순간들이 너무 많아. 과거 인서트 컷 삽입 (*1화 슬모가 지하철에서 울던 모습 / *1화 옥상에서 사자가 슬모를 위해 화를 내던 모습 / *3화 옥상에서 요리하는 슬모와 옥상 생활자들 모습 / *4화 해수욕장에서 요정이 슬모를 지켜주던 모습 / *6화 보름달 아래 옥상에 다같이 있던 모습 / *7화 한강 공원에 다같이 있던 모습) 다시 옥상 난간에 기댄 현재의 모습들 보여지며- 슬모NAR 모두 고마웠습니다. 내년에도 잘 부탁해요. 별똥별 떨어지는 하늘 아래, 옥상의 모습 보여지며- 끝
덩치남

덩치남의 철학 코멘트

마르크스는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헤겔을 빌어 역사의 반복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현재 세대는 아직 새로운 것을 설명할 언어를 갖지 못해 과거의 언어를 통해 자신의 역사를 쓰지만, "그 속에 서 나름대로의 길을 찾고 자신의 모국어를 망각할 정도가 될 때에만 그는 새로운 언어의 정신에 동화되고, 그래서 그 언어로 자신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관점은 시간에 관한 아주 흥미로운 생각을 제공해준다.
막 도착한 현재는 사실 과거를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고, 현재란 그것이 미래에 도착할 수 있을 때에서야 제 언어를 갖게 되는 미묘한 상황을 암시해준다. 시간은 과거-현재-미래로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순차적인 연속성을 갖는 게 아니라 과거와 미래가 동시적으로 현재 속에 공존하거나 갈등하는 양상으로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간 가운데 어느 것 하나 쓸모 없다고 내동댕이쳐서는 안되고, 그 시간들이 어떻게 만나고 스파크를 일으키는지를 살펴야 할 것이다.

작가의 한마디
인류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철학자 중 한 명인 칼 마르크스가 쓴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을 보시면, 인류의 정치와 사회가 어떠한 역사를 거쳐 지금에 이르렀는지 살펴 보실 수 있습니다.
안종준
그림
김지혜
감수
김만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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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5-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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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