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스토리

조국을 위해 하늘을 날다 - 권기옥

허스토리 아멜리아 에어하트 vs 권기옥허스토리 아멜리아 에어하트 vs 권기옥

비행기는 과학기술이 총집결된 근대의 산물이다. 그것이 처음 등장했던 시절, 비행기를 조종하기 위해서는 강인한 체력, 첨단의 조종기술뿐 아니라 근대적인 사고와 태도가 필수적으로 요구되었다. 아멜리아 에어하트(Amelia Earhart, 1897~?)는 1932년 여성 최초로 대서양 횡단 비행 성공과 함께 하늘의 ‘퍼스트레이디’라는 별명을 얻으며 화려한 비상을 하였다. 대한민국 최초 여성 비행사 권기옥(權基玉, 1901~1988)은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비행사가 된 여성이었다. 일제강점기 시대의 식민통치의 압제, 여성에 대한 차별적 인식과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비행기를 조종하였다.

푸른 하늘 위를 자유롭게 나는 비행기처럼, 여성으로서 이루기 힘든 상황을 이겨내고, 꿈을 이루었던 두 여인을 통해 여성의 위대한 ‘자주성’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1924년 2월 5일이나 6일쯤으로 짐작되는 날,

“연료가 떨어졌다. 육지가 보이지 않는다.....” 1937년 7월 2일 미국 해안경비대 경비선 이타스카호로 긴급 타전이 왔다. 남태평양 상공을 날던 비행기 록히드 엘렉트라로부터 온 것이었다. 이 마지막 교신 이후 비행기는 홀연히 사라졌다. 기체의 파편도 조종사의 유체도 그 어떤 유류품도 발견되지 않았다. 모든 것이 공중에서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비행기는 미국과 세계가 사랑하던 여류 비행사 아멜리아 에어하트가 조종 중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의 인생을 바꿀 전화 한 통이 걸려오게 된다.

대서양 횡단 비행을 계획하고 있던 미국 공군 대위로부터 참여 제안을 받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아멜리아에게 이 횡단 참여는 엄청난 위험을 동반하는 일이기도 하였다.
당시에는 대서양 횡단에 15~20시간이 걸렸고, 비행기의 성능이나 항법 기술도 그리 발달하지 않았던 때여서 1927년 한 해에만 19명의 조종사가 대서양 횡단을 시도하다 목숨을 잃었을 정도였다. 하지만 남자들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비행에 상큼한 미소를 가진 미모의 여성이 나타나 성공을 보여주자, 대공황으로 고통을 겪고 있던 미국 국민들은 아멜리아에게서 희망의 꿈을 품게 된다.

그 후, 1932년 5월20일, 아멜리아는 단독 대서양 횡단 비행을 시도하게 되고 고도계 고장과 엔진 파손 등으로 죽을 고비를 넘기며 힘겹게 열다섯 시간여를 비행, 마침내 북아일랜드에 착륙하게 된다.

여성으로서는 최장 비행 기록, 최단 시간 내 횡단 기록 등을 갱신하며 ‘퍼스트레이디’라는 칭호와 함께 국민적 영웅으로 떠오르게 된다.

뒤이어 1935년 하와이-캘리포니아-워싱턴을 잇는 태평양 횡단비행에 성공한 아멜리아는 드디어 소망해온 세계일주비행을 시도하게 된다. 그동안 단독 비행을 고수하던 아멜리아는 항법사 프레드 누난(Fred J.Noonan)과 함께 하기로 한다. 1937년 6월1일 세계경제공황과 제 2차 세계대전을 앞둔 시기 속 그녀는 전 세계인의 희망 그 자체였다. 하지만 아멜리아의 비행기 록히드엘렉트라(Lockheed Electra)는 비행 도중 마지막 교신을 남기며 허공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대한민국 공군의 어머니. 권기옥

“비행사가 되기 위해서는 중국어는 물론 영어도 유창하게 할 수 있어야 했다. 그래서 그녀는 상해에 머물면서 대한적십자회 일을 맡고 있던 미국 의학박사학위 취득자 이희경(李喜儆)을 찾아가 약 두 달 동안 영어를 배웠다. 독립운동을 위해서는 실력이 필요했고,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독립운동은 비행사가 되는 것이라는 확신을 굳혔다.”

권기옥(權基玉)은 1901년 1월 11일 평양에서 태어나 숭의학교(崇義學校) 졸업반이던 1919년, 3 · 1운동에 참가하였다가 체포되어 여성으로 견디기 힘든 무자비한 고문을 받고 6개월간 감옥에 갇히게 되었고, 중국으로의 망명밖에는 길이 없다 생각하게 된다.

그녀는 혈혈단신의 몸으로 송화의 풍천 포구까지 걸어가 멸치잡이 배를 타고 3주 가까이 풍랑을 헤치며 중국의 산둥반도에 도착한다. 끝없이 펼쳐진 망망대해 위에서 문득 17살 어린 시절 평양에서 스미스의 곡예비행을 보며 했던 결심을 떠올리게 된다.

‘비행기만 있다면 지금 당장 일본으로 날아가 조선총독부를 폭파시킬 것이다.’

권기옥은 그 길로 당장 중국의 운남 항공학교로 찾아갔다. 운남은 상해에서 홍콩을 거쳐 배를 타고 월남까지 가서 기차를 타고 내려서도 걸어서 산을 넘어가야 할 만큼 외진 곳이었지만 권기옥의 마음속에는 한시라도 빨리 비행훈련을 받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식민지 여성의 이 결연한 의지는 여자를 받지 않는 항공학교의 규정조차 특례입학을 허가할 정도였다. 권기옥은 남자들도 버티기 힘든 훈련을 필사적으로 견디어 냈다.

그녀가 입학한 약 두 달 후 중국인 여자 2명이 추가로 입학하였는데 그녀들은 비행기에 탑승도 못한 채 학교를 떠났다. 38명의 학생 중 절반이 비행 탑승 적성검사에 불합격하였지만 그녀는 합격하였고, 대부분의 학생들이 20시간 동안 했던 훈련비행을 9시간 만에 마친 후 단독비행을 하였다. 5분이 채 안 되는 비행이었지만 그녀의 감격은 매우 컸다.

그녀는 마침내 1925년 운남 항공학교 1회 졸업생이 되었고, 이로써 대한민국 최초 여자 비행사가 되었다.

그러나 그녀의 바람과 달리 당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항공전투단을 구성할 형편이 되지 않았다. 꿈에 그리던 비행사가 되었으나 독립군으로 하늘을 날 수 없었던 권기옥은 포기하지 않고 일본과 대적할 기회를 찾길 시도했다. 그 후 권기옥은 상해전쟁, 중일전쟁 등 항일전선에서 10년간 중국 공군단에 근무하면서 무궁훈장을 받는 등 일제와 맞서 싸우며 독립의 꿈을 이어갔다.
마침내 광복이 찾아오고 조국으로 돌아온 그녀는 국회국방위원회 전문위로서 한국애국부인회를 다시 정비하여 여성들의 독립 사상을 북돋아 주는데 힘썼다. 대한민국 공군 창설의 산파 역할을 하며 ‘공군의 어머니’로 불리던 그녀의 전 재산은 조종사가 되려는 학생들을 위한 장학금으로 기부한 것으로 전해진다.

1977년 대한민국에서는 그녀의 공을 기려 건국훈장 독립장을 주었다.

한 여성이 자신의 꿈을 이룬다는 게 쉽지 않은 시대에서 자신의 꿈과 자기가 속한 공동체, 즉 민족의 꿈이었던 독립을 위해 일생을 바쳤던 권기옥의 삶은 지금 우리에게도 큰 울림을 주고 있다.

여성의 꿈, 민족의 염원을 이루다

최초의 여성비행사는 역사적인 의미가 있을 때 가치가 있다. 순종을 여성의 미덕으로, 양보와 희생을 여성의 아름다움으로 강요하던 시대의 여성상을 그녀들은 극복하였다. 누구보다 큰 꿈을 가졌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주저하지 않고 과감한 결단의 행동을 취하였다. 아멜리아는 가난한 환경에서도 실망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공부를 시작하였고, 권기옥은 중국으로 망명하면서까지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한 그녀들의 도전정신과 실천은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남자들도 두려워하는 위험한 비행에 과감하게 나선 아멜리아의 용기, 그것도 서른 한 살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첫 대서양 횡단을 시도했다는 사실은 그 시대 여성들에게 귀감이 되었다. 지금 봐도 감탄이 나오는 세련된 스타일과 호감 가는 외모는 많은 이들이 지금까지 그녀를 동경하고 '시대의 아이콘'으로 기억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에 비해, 권기옥은 20세기 전반기, 즉 일제의 식민통치가 강요되고 있을 때 하늘을 날았다. 그녀는 한국 최초의 여류비행사로서 당시 여성들의 삶을 옥죄었던 편협한 인식을 극복하였고, 보수적인 가부장제 사회로부터 당당하게 비행사가 된 그녀의 선택은 여러 가지 역사적 의미를 가진다. 신여성의 가장 큰 공적은 여성을 ‘가정’이라는 좁은 틀에서 해방시키려 노력했다는 점이다. 그녀는 그동안 아무도 인식하지 않았던 여성의 인권 문제에 관심을 가졌고, 여성들이 자기 주체로 나서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비행기가 추락하지 않는 방법은 오직 앞으로 나아가는 것뿐이다.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은 앞으로 가는 것과 같다.

누구나 어려운 상황을 맞닥뜨리게 되지만 포기하지 않고 노력한다면 그 노력이 우리를 행복한 삶으로 곧장 데려다주지는 못 하더라도 삶을 계속 나아가게는 할 것이다.

권기옥의 비행은 여전히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여성들에 대한 차별과 선입견을 넘어서는 희망의 날갯짓으로 우리에게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그림
채한율 (일러스트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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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5-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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