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은 패션이 아니다 -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
꿈보다 해몽이다.
뮤지컬 영화 [레 미제라블]의 인기에 대한 ‘해석’ 이 참 다채롭다. 영화가 원래 그렇다.
영화감상에는 정해진 길이 없다. 제각각 익숙한 길, 정해진 시선, 찾고 싶은 가치들을 따라가면서 본다.
소설 『레 미제라블』을 제대로 읽고 나서, 영화를 본 사람은 많지 않다. 여기서 ‘제대로’ 란 ‘온전히’ 를 말한다. 유명한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초등학생도 안다. 소설 제목 그대로든, 주인공의 이름을 따서 『장발장』으로 바꾼 것이든 한번쯤은 읽어본 작품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영화를 보고 나서 소설을 찾는 사람이 갑자기 많아졌다. 다섯 권을 합치면 무려 2,000쪽이나 되는 완역판이 15만부 이상 팔리는 ‘기현상’을 어떻게 설명할까.
물론 원작(소설)과 영화 사이에는 몇 가지 공식이 있다. 원작이 유명하면 영화도 많이 본다. 영화가 좋으면 원작도 많이 읽는다. 반대로 영화가 나쁘면 아무리 좋은 원작도 읽지 않는다. 또 하나. 원작이 너무나 유명해 영화로 여러 번 만들어지면, 영화도 원작도 인기가 없다. 이 중 『레 미제라블』은 어디에 속할까. 어느 것이라고 잘라 말하기 어렵다. 유명한 원작이지만 여러 번 영화로 만들어졌고, 영화가 빼어나게 좋아서 원작을 다시 읽는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도 없고, 영화가 좋다고 굳이 내용을 익히 알고 있는 원작을 다시 읽어야 할 이유도 없다. 50년 만에 다시 선보일 만큼 그 동안 완역본에 목말라 있었기 때문은 더 더욱 아니다.
결국 『레 미제라블』을 모르고 있었다는 것으로밖에 설명이 안 된다. 2백50년 전에 나온 오래된 소설이지만, 우리에게는 새로 나온 소설처럼 다가온다는 얘기다. 『레 미제라블』이 이처럼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깊고 넓고 웅장하게 그려낸 작품인지 미처 몰랐다는 얘기다. 우리 모두 그저 빵 한 조각을 훔친 죄로 억울하고 감옥생활을 하고 나온 장발장이 신부의 도움으로 회계하고 착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전형적인 청소년용 동화쯤으로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1862년 빅토르 위고는 이 작품을 긴 한 문장의 서문으로 시작했다. ‘법률과 풍습에 의하여 인위적으로 문명의 한복판에 지옥을 만들고 인간적 숙명으로 신성한 운명을 복잡하게 만드는 영원한 사회적 형벌이 존재하는 한, 무산계급에 의한 남성의 추락, 기아에 의한 여성의 타락, 암흑에 의한 어린이의 위축, 이 시대의 이 세 가지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어떤 계급에 사회적 질식이 가능한 한, 다시 말하자면, 그리고 더욱 넓은 견지에서 말하자면, 지상에 무지와 빈곤이 존재하는 한, 이 책 같은 종류의 책들도 무익하지는 않으리.’
이것만 읽었더라도 『레 미제라블』 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한 듯한 호들갑을 떠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빅토르 위고는 굶어 죽어가는 어린 조카를 위해 빵 한 조각을 훔친 죄로 19년간 감옥생활을 하고 나와 새 사람이 된 장발장 이야기를 왜 이처럼 비장하게 했을까. 적어도 장장 17년에 걸쳐 쓴 일생의 역작인 『레 미제라블』은 시대와 국가, 인종 을 초월해 인류가 영원히 추구해야 할 보편적 가치들이 무엇인지, 그것들이 어떻게 파괴되고, 또 복원되어야 하는지를 역사와 사회, 철학과 종교, 인간과 제도를 날카롭게 분석해 설파하고 있다. 『레 미제라블』이 ‘고전 명작’ 인 이유이기도 하다.
빅토르 위고가 본 19세기 초 프랑스는 어떤 모습인가. 최근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으로 출간된 『레 미제라블』을 완역한 불문학자 정기수 박사는 “하나의 혼돈의 세계” 라고 했다. 자유와 평등과 박애가 사라졌다. 용서도, 사랑도, 구원도, 평화도 보이지 않는다. 그것을 톰 후퍼 감독은 영화 시작에 폭풍으로 깃대가 꺾여 바닥에 떨어져 흙탕물에 더럽혀진 3색의 프랑스 국기로 그것을 은유했다. 지옥은 저 먼 피안이 아니라 바로 인간 세상에 있다.
그 이야기를 하는데 거창한 인물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어느 신문 한 귀퉁이에 실린 좀도둑으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한 주교의 용서와 자비로 분노와 불신에 가득 찬 그 좀도둑이 회개하고 성자로 살아가는 모습을 통해, 그가 만나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통해, 타락한 세상을 조롱하고, 인간다운 세상이 무엇인지, 그런 세상을 만드는 힘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자유가 무참히 짓밟힌 장발장과 가혹한 형벌만이 정의라는 강박에 사로잡힌 자베르 경감, 가난으로 몸까지 팔아야 하는 판틴과 학대에 시달리는 그녀의 어린 딸 코제트는 2백 년 전 프랑스에만 있지 않다. 그들의 분노의 절규, 양심의 갈등, 혁명의 끊는 피, 순백의 사랑, 날카롭고 노골적인 세태풍자, 애절한 죽음은 우리 모두의 것이다.
소설 『레 미제라블』은 그것들을 극적인 사건과 구성, 깊은 통찰로 묘사해 나간다. 『레 미제라블』 열풍은 겸연쩍게도 뒤늦게 그것을 발견한 때문일 것이다. 여기에는 세계적으로 인기를 끈 뮤지컬이 중요한 중간매개 역할을 했다. 서사를 노래로 표현한 뮤지컬이 원작과 영화의 열풍에까지 영향을 미쳤으며, 심지어 영화가 뮤지컬의 형식을 그대로 차용했다는 사실 또한 아이러니다. 뮤지컬은 분명 소설보다는 대중적 호소력이 강하며, 소설보다 입체적이고 직접적이다. 소설에는 이성과 인식이 있다면, 뮤지컬은 감성과 자극이 있다.
반면 뮤지컬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있다. 동시성이 불가능하며, 동질성도 보장할 수가 없다. 비용측면에서 대중적 접근도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뮤지컬의 인기와 장점을 살리면서 약점을 보완할 수 있는 방법이 영화다. 동화 수준의 영화 [레 미제라블]은 이전에도 수없이 많았다. 톰 후퍼 감독은 뮤지컬을 그대로 살리는 전략을 선택했다. 뮤지컬의 현장성에 영화의 시각효과를 더했다. 뮤지컬의 시간적, 공간적 제약을 영화의 동시성과 자유로운 이동을 통해 극복하여 더 웅장하고, 화려하고, 사실적인 느낌을 주려 했다. 장면과 이야기 전개는 무대를 중심으로 이뤄지고, 배우들은 녹음이 아니라 뮤지컬에서처럼 현장에서 연기를 하면서 노래까지 부른다. 뮤지컬만큼은 못하지만, 섬세한 감정을 담은 그 노래들이 처음에는 어색하지만, 곧 리듬에 익숙해지면서 감정이입이 된다. 마지막 장발장(휴 잭맨) 이 생을 마감하면서 코제트와 자신을 데리러 온 판틴의 영혼 앞에서 부르는 노래에서는 가슴이 뭉클해진다.
이렇게 감동이 있다고 영화가 뮤지컬, 나아가 소설을 뛰어넘는 완성도를 보여주었다고 말할 순 없다. 뮤지컬도, 영화도 소설과는 다른 구도와 흐름을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레 미제라블] 에는 저마다 온도와 색깔, 주제가 다른 세 가지 큰 이야기가 축을 이룬다. 장발장과 자베르 경감의 대결과 신부님의 존재로 집약되는 죄와 벌과 용서와 구원, 장발장과 코제트와 마리우스의 사랑, 그리고 마리우스와 젊은이들로 대표되는 사회 모순의 타파이다. 소설은 여유를 가지고, 때론 이들을 뒤섞기도 하지만, 영화와 뮤지컬은 이 셋을 바쁘게 번갈아 가며, 따로따로 이야기한다. 무대를 중심으로 극을 전개해야 하는 뮤지컬과 그것을 베낀 영화의 한계일 것이다.
영화는 특히 장발장과 코제트, 마리우스와 코제트의 사랑에 집중한다. 이 또한 영화는 뮤지컬보다, 뮤지컬은 소설보다 대중성을 겨냥하는 한 숙명일 수밖에 없다. 멜로적 감성에 충실해야 한다. 영화 [레 미제라블] 은 결코 원작을 뛰어넘는 작품이 아니다.
뮤지컬의 변주에 불과하며, 이전의 영화들이나 가지를 모두 자른 소설 축약본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뮤지컬처럼 소설 속의 주제들을 음악의 호소력을 빌려 자극적이고 강렬하게 드러내는 것만은 분명하다. 톰 후퍼 감독까지도 궁금해 하는, 한국에서 이 영화 [레 미제라블]이 열광적 인기를 끄는 이유야말로 바로 이 주제들에 있을 것이다. 용서의 힘, 법과 제도의 비인간성, 빈부격차의 비참한 현실, 사회변혁에 대한 젊은이들의 열망을 우리의 현실과 연결 지어 해석하고, 받아들이고, 공감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으로도 영화와 뮤지컬의 가치와 역할은 충분하다. 어차피 영화와 뮤지컬은 패션(유행)이다. 물론 이 유행이 지나면 소설 『레 미제라블』을 잊거나, 이제는 충분히 기억한다며 다시 고전의 뒷자리로 밀어놓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세상은 바뀌지 않아 다시 누군가 색다른 옷을 입혀 ‘유행’ 을 만들 때까지
- 글
- 이대현(영화평론가)『15세 소년, 영화를 만나다』 『열일곱, 영화로 세상을 보다』 『영화로 소통하기, 영화처럼 글쓰기』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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