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작 대 영화

루헤인의 소설 [살인자들의 섬(Shutter Island)]

살인자들의 섬
딱 한 장면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같은 장면에 대사 한마디를 추가했다.
그것도 가장 마지막에. 『미스틱 리버』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미국 베스트셀러 작가 데니스 루헤인의 소설
『살인자들의 섬』 (원제 Shutter Island)은 이렇게 끝난다.
5일째 되는 날, 폭풍은 지나갔다.
햇살이 눈부신 아침. 테디는 병원 입구 계단 모퉁이에 동료인 척과 앉아, 콜리 박사와 교도소장이 멀리서 지켜보는 가운데,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담배를 피우며 이야기한다.
“그래, 이제 어떻게 한다?”
“선배님이 말해 보세요.”
“이 섬에서 나갈 길을 찾아야 해. 집으로 가야지.”
“그런 말 할 줄 알았어요.”
“뭐 좋은 생각 없어?”
“1분만 시간을 주세요.”
척이 고개를 치켜들고 고개를 젓자 콜 리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소장에게 무슨 말을 했고, 둘은 잔디밭을 가로질러 테디가 있는 쪽으로 온다. 금속으로 된 무엇인가를 하얀 꾸러미에 싼 잡역부들과 함께.
“난 잘 모르겠어, 척. 저 사람들이 우리를 노리는 것 같아.”
“아뇨. 우리가 너무 영리하기 때문에 그렇게는 안 될 걸요.”
 테디는 다시 환상에 사로잡힌 정신병자로 돌아온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자신을 섬에서 탈주한 3명의 자식을 죽인 여자를 찾으러 온 연방보안관으로 착각하고 있는 걸까. 전날 밤 콜리 박사와의 대화에서 그가 “난 퇴행하지 않을 거요. 내 이름은 앤드류 래이디스이고, 난 1952년 봄에 내 아내 돌로레스를 죽였소……”라고 말했지만 독자들은 충분히 그렇게 의심할 수 있다. 바로 다음날 그는 현실을 외면하고 바로 환상의 인물 테디가 되었으니까. 그러나 영화 <셔터 아일랜드>는 그것이 결코 환상으로의 복귀가 아님을 말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마지막 소장을 따라가기 위해 일어서는 테디(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에게 한마디를 부탁했다. “괴물로 평생을 갈 것인가, 선량한 사람으로 죽 을 것인가.” 소설과 영화가 다른 유일한 부분이다. 감독은 왜 이 한마디를 굳이 집어넣었을까. 두 가지 의도다. 하나는 영화적 효과, 즉 반전이다. <셔터 아일랜드>는 천연덕스럽게 거의 막판까지 미스터리 스릴러 수사극을 자처한다. 고립의 섬에 있는 정신병원에서 살인을 저지른 한 여성이 사라지는 사건이 발생하자 연방보안관과 그의 파트너가 파견돼 수사를 벌인다. 의문투성이인 사건과 인물들, 사이사이 끼어드는 테디의 두통과 그를 괴롭히는 과거와 환상. 무엇이 사실이고, 무엇이 환상이고, 무엇이 음모인가. 영화와 소설은 마치 사건, 진실을 은폐하려는 듯이 이것들을 뒤섞어 우리를 혼란스럽게 한다. 그리고 마침내 테디가 나치처럼 인간 생체실험을 한다고 의심한 외딴 등대를 찾아가는 순간, 콜리 박사는 테디에게 사실을 말해주면서 지금까지의 영화를 거대한 사이코드라마로 바꿔버린다.
 ‘사실 테디는 조울증으로 자식 셋을 연못에 익사시킨 아내를 총으로 죽여 버린 범죄자다. 테디라는 존재는 망상에 불과하다. 2년간 이 병원에 수감돼 치료를 받았지만 효과가 없었다. 그래서 마지막 방법으로 병원이 이렇게 상황을 꾸몄다. 그이 파트너도 알고 보면 치료를 맡은 의사다.’ 그랬구나. 관객들과 독자들은 지나간 장면을 기억하며, 책 앞을 뒤적이며 그 단서를 찾으려 한다. 그의 망상이 어디서 온 것인지 생각해내려 한다.그가 왜 괴물 살인자 앤드류 래이디스를 부정하고 정의와 선함의 상징인 테디이고 싶어 하는지 2차 대전 현장에서의 그와 아내의 환상 속 그를 통해 분석하려 한다. 그러나 그런 반추의 시간이 끝나기도 전에 영화는 그의 망상은 병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의식적 행위임을 알게 된다.
왜? 죄의식이다. 그는 조울증의 아내를 보살피지 못했고, 그런 아내로부터 아이들을 지키지 못했고, 그런 아내를 죽였다. 괴물인 자신을 부정하고 싶었다. 환상은 그를 테디로 만들었다. 아내를 죽인 범인을 설정했고, 그가 이 정신병원에 있기 때문에 그는 두 가지 일, 실종사건과 아내 살해범 찾기에 나선다. 자신의 죄의식을 타자화를 통해 씻어내려 한다.

그러나 그 죄의식은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테디는 안다. 환상만으로 그 상처를 치유할 수는 없다. 그래서 그는 미친 사람으로 끝까지 살아 갈 수가 없다. 자신의 환상을 현실이라고 고집하면 할수록 그의 죄의식은 불타서 재로 스러지는 아내, 아니면 물을 가득 머금은 아내의 모습이 되어 나타난다. 아내는 그가 환상에서 깨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 등대에 가지 말라고 한다.

그것을 뿌리치고 결국 그는 자신이 앤드류임을 확인하고 나서도 끝내 테디로 남으려 한다. 슬프고 아름다운 그의 마지막 반전이다. 사람들은 그의 마지막 말에서 그가 미친 사람이 아님을 알기에 <셔터 아일랜드>는 스릴러가 아니라 휴머니즘이다. 그는 왜 일부러 전체를 다시 뒤집는 미친 사람을 ‘선택’했을까? 영화의 마지막 대사가 답이다.

그는 괴물인 앤드류로 살기 싫었다. 그보다는 비록 환상 속의 선량한 테디로 죽고 싶었다. 뇌신경 일부를 제거해 과거의 기억을 전부 잃어버린 좀비같은 존재로 사는 죽음의 선택이야말로 그의 실존 방식이다. 고통과 죄의식, 분노가 한계를 넘을 때 인간의 정신세계는 풍선처럼 터지고 만다. 정말 어찌 해 볼 수 없는 상황에 닥쳤을 때 우리는 “미치겠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죄의식 때문에 미치겠는데, 그것을 씻어 내거나 잊어버릴 방법이 현실에서는 없다. 그럼 방법은 무엇인가. ‘환상’의 세계로 나를 집어넣는 길밖에 없다. 그래야 박찬욱 감독의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의 영군(임수정)은 열 손가락이 모두 총으로 변하는 싸이보그가 되고,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의 앤드류는 연방보안관이 되어 할머니를 괴롭힌 인간들에게 복수를 하고, 아내를 죽인 범인(사실은 자신이지만)을 잡을 수 있으니까. 미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사람들에게 가상의 정체성이야말로 또 다른 죄의식의 표현이자, 그것을 잊지 않고 살아간다는 증거일 것이다

적어도 테디는 아내의 살해에 대한 죄의식이 없다. 아내를 죽인 범인이 따로 있으니까. 그러나 그는 다른 곳에서 그 죄의식을 발견한다.
<셔터 아일랜드>는 그것을 전쟁범죄에서 찾는다. 2차 대전에 참전한 앤드류는 기차역에 유대인 시체가 쌓여있는 다카우에서 나치 친위대 소속 간수 5백명의 항복을 받는다. 그는 동료들과 함께 그들을 무장해제한 뒤 모두 총으로 죽인다. 물론 그건 살인이다. 그러나 망설일 필요가 없는 살인이었다. 그놈들은 그보다 더 심한 짓을 당해도 싸니까. 수용소에 갇혀있던 사람들이 좋아서 눈물을 줄줄 흘렸다. 정당한 이유가 있었다. 그래도 그건 잘못된 행동이었으며 그 죄는 평생 씻어낼 수 없다고 말한다. 이는 곧 아무리 미친 사람으로 바뀌어도 죄의식을 떨쳐버리지는 못한다는 얘기다. 그래서 미친 사람은 현실을 도피한 비겁한 사람이 아니다. 어쩌면 박찬욱 감독의 말처럼 ‘진짜 인간적인 존재’일지도 모른다.

사실 미쳤다는 경계는 모호하다. 아니 누가 정말 미쳤는지 안다는 것이 가능이나 할까. 환각은 단지 내면의 표시일 뿐이다. 미쳤다는 것과 정상은 한 쪽은 그것을 드러내고, 다른 한 쪽은 그것을 감추고(억제하고) 있다는 차이일 뿐. 그리고 ‘미쳤다’에는 다른 사실에 대한 논리와 달리 묘하게도 ‘부정의 긍정’이 작용한다. 난 미치지 않았다. 그런데 이 말은 미친 사람들이 하는 말이다.

고로 나는 미쳤다. <셔터 아일랜드>는 이를 카프카 소설에 나오는 것 같은 삼단논법이라고 했다. 그리고 사람들이 일단 미쳤다고 생각해버리면 그 사람이 미치지 않았다는 증거조차 미친 증거가 된다. 주장은 ‘부인’이 되고 두려움은 ‘편집증’이 되고 생존본능은 ‘방어기제’가 된다. 무슨 짓을 해도 벗어 날 수 없다. 아마 그래서 앤드류도 마지막에 미친 테디를 선택했을 것이다.

그 자포자기적 선택 속에서 우리는 테디가 얼마나 앤드류로 돌아오고 싶어 하는지 알 수 있다. 유일한 길은 용서이다. 그러나 그 길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테디 자신이 더 잘 알고 있다. 용서 가운데 스스로를 용서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그는 끝내 조울증에 빠진 아내를 돌보지 못하고, 그런 아내가 아이 셋을 익사시키는 비극을 막지 못해 끝내 아내를 죽인 자신을 용서하지 못했다.

미친 사람들이 나오는 작품은 혼란스럽다. 당연하다. 환상과 정상의 구분이 모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영화를 보거나 소설을 읽는 법은 이따금 인물을 따라 자신이 정신병자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 ‘이상한’ 짓이 아닌 그들의 행동에서 진실을 읽을 수 있다.

다행히 <셔터 아일랜드>는 그럴 필요조차 없게 해 주었다. 마지막까지 환상을 현실로 착각하는 ‘트릭’을 썼다. 그것은 ‘사기’가 아니라‘ 인간에게는 얼마든지 환상이 현실이 될 수도 있고, 현실이 환상일 수도 있다’는 역설이다. 적어도 ‘환상’의 세계만큼은 소설보다 영화가 더 효과적이다. 환상은 이미지 형태로 욕망을 말하기 때문이다. 정신과 교수인 박시성은 『정신분석의 은밀한 시선』에서 “환각을 이미지화하는 일은 위험할 수도 있다”고 했다. “억압된 것을 불러내는 불안한 일이며 상징화될 수 없는 실재를 흘깃 엿보는 것은 정신병의 경험과도 그리 멀지 않기” 때문이다. <셔터 아일랜드>는 그 위험을 연민으로 승화시켰다.

인간의 불안과 소외를 폭력과 범죄, 자기 파괴로 표현하는 마틴 스콜세지의 능력이다.
이대현(영화평론가)『15세 소년, 영화를 만나다』 『열일곱, 영화로 세상을 보다』 『영화로 소통하기, 영화처럼 글쓰기』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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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3-09-28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