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책상

사랑이 넘치는 민들레 시인, 이해인 수녀의 책상

사랑이 넘치는 '민들레 시인' 이해인 수녀의 책상
책상(冊床) : [명사] 앉아서 책을 읽거나 글을 쓰거나 사무를 보거나 할 때에 앞에 놓고 쓰는 상. 
1976년 『민들레의 영토』로 대중에게 알려진 이해인 수녀. 일흔 한 살의 나이에도 여전히 맑은 울림을 전하는 시인입니다. 사랑과 겸손의 삶이 그대로 묻어나는 그의 책상을 만나 보세요.
'국민 이모' 시인.
변하지 않는 동심과 지혜를 시 속에 품다
이해인 수녀의 책상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고운 얼굴 해야 솟아라. 산 넘어 산 넘어서 어둠을 살라 먹고 산 넘어서 밤새도록 어둠을 살라 먹고, 이글이글 애띤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박두진의 《해》 중에서)
새해 첫 날이면 전국 각지를 떠오르는 해를 보려는 사람들로 붐빕니다. 팍팍한 삶 속에서도 희망을 잡기 위해서지요. 매일 뜨고 지는 해이지만 이날만큼은 특별합니다. 붉은 해가 이렇게 아름다웠나 싶어 가슴이 뭉클해지고 기운찬 시작을 다짐하기도 합니다.
평범한 일상을 기쁨과 희망으로 가꾸는 또 다른 시인이 있습니다. 투명하고 정갈한 시어로 손꼽히는 이해인 수녀입니다. 1976년, 시인 박두진의 도움으로 세상의 빛을 본 『민들레 영토』는 지금도 사랑 받는 수녀의 첫 시집이지요.
일흔 하나의 나이에도 변함없이 맑은 영혼을 전하는 이해인 수녀. 그가 새해에 나눠주는 희망의 언어를 듣고자 부산에 있는 성베네딕도 수도원을 찾았습니다. 2008년 대장암 수술을 받고 투병 중인 그는 젊은이보다 더 활기차고 바빴습니다.
수도원 한가운데에 있는 '민들레방'이 그의 집필실입니다. 원래 유치원 교실로 쓰였다는 방은 햇볕이 잘 들어 노란 빛을 띠었습니다. 방 곳곳에 있는 성화와 성물은 그가 시인 이전에 수도자임을 말해주었습니다.
"내가 스물 한 살이던 1965년부터 여기 있었어요. 올해로 꼭 50년 되었으니 내가 수도원의 산 증인이지요. 수도원이란 사실 세상과 분리된 곳이잖아요? 수도원과 세상이 연결되는 통로를 열어주는 것, 그것이 글이라고 생각해요." 그의 집필실은 온갖 편지와 사진, 독자들이 선물한 자수, 조가비 장식 등으로 넘쳤습니다. "내 방에 오면 오래 있을수록 좋아요. 내가 계속 선물을 나눠주니까. 하하."
이해인 수녀
첫 번째 작가의 물건사인을 예술작품으로, 색연필 그림
색연필 그림 사진
"간단한 걸로 큰 기쁨을 주는데 이렇게 좋은 방식이 또 어디 있을까 싶어요. 조그만 정성이 사람 복으로 되돌아 오니까요."
인터뷰 시작 전에 수녀는 책에 사인을 해 줬습니다. 보통 작가의 사인을 받는 독자가 들뜨는데 오히려 수녀가 더 신나는 표정입니다. 색연필을 꺼내더니 서명 위에 그림을 그립니다. 쓱쓱, 색연필 그림은 꽃으로, 풀잎으로, 악보와 음표로 변신합니다.
"내가 글씨를 못 써. 10년 전 쯤 우연히 색연필을 선물 받았는데 써보니 선만 죽죽 그어도 예쁜 거 있지요. 선이랑 동그라미만 그려도 사람들이 서로 가지려고 한다니까. 이것 봐. 예술 작품 같잖아. 이게 내 트레이드 마크예요. 한 번 본 사람은 잊지 못하죠."
향나무로 만들어 은은한 나무 냄새가 나는 색연필. 어린아이들이 쓸 법한 물건이지만 일흔 한 살 수녀의 필수품입니다.
"내가 늘 뭔가 부탁받는 사람이거든요. '동네 심부름 언니'랄까? (웃음) 기도해 달라는 부탁도 받지만 책 보내달라는 요청도 자주 받아요. 그럴 때 책이나 종이에 나만의 색깔 표시를 하죠. 간단한 걸로 큰 기쁨을 주는데 이렇게 좋은 방식이 또 어디 있을까 싶어. 조그만 정성이 사람 복으로 되돌아 오니까요."
두 번째 작가의 물건갖고 싶은 '마음들', 돌멩이 다섯 개
'지혜, 겸손, 수기안인, 감사, 평상심' 이해인 수녀가 갖고 싶은 '마음들'입니다.
돌맹이 다섯개 사진
수녀의 주위에는 소박하지만 귀한 물건들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아침마다 꺼내보고 주무른다는 돌을 보면 알 수 있지요.
모양과 색깔이 각각 다른 돌에 수녀는 이름을 붙여 주었습니다. 하트모양 돌 'wisdom(지혜)', 붉은 돌 '겸손', 계란만한 흰 돌 '修己安人(수기안인)', 회색 돌 '감사', 노란 마름모꼴 돌 '평상심'. 수녀가 갖고 싶은 '마음들'입니다.
"겸손하게 하소서, 지혜를 주소서, 감사하게 하소서...내 시에 자주 등장하는 시어들이기도 하죠. 수기안인은 『논어』에 나오는 단어예요. '자신을 갈고 닦아서 사람을 편안하게 해 준다'. 밖에 나갈 때도 부적처럼 갖고 다니는 돌이에요. 외부에서 강의할 때도 설명하고."
수녀는 요즘 '수기안인'의 뜻을 자주 생각하는지 설명을 되풀이했습니다.
생각이 복잡할 때도 수녀는 돌멩이를 주무릅니다. 그러면 마음이 한결 푸근해진다고 하네요.
"돌은 아무리 만져도 닳지 않잖아요? 기도하는 마음으로 돌을 만지면 마음도 올곧아져요. 누가 내 별명을 '국민 이모'라고 붙여줬는데, 그 별명처럼 마음이 넉넉하고 지혜로운 사람이 되려고 늘 노력하죠."
세 번째 작가의 물건우리말 연습의 책, 국어대사전
국어대사전 사진
"시 앞에서 겸손해지게 되는 귀중한 책이에요. 오랫동안 한결같은 우정의 증거물이기도 하고요."
"나보고 언어를 곱게 쓰는 시인이라고 하는데, 비결이 있지. 이게 내 특급 교과서예요."
첨단 디지털 시대에 이렇게 큰 국어사전을 누가 쓸까요? 저자 이희승의 『국어대사전』은 들기에도 무거워 보였습니다. 마지막 페이지에는 1961년 초판, 1982년 32쇄라고 적혀 있는데요. 지금 19만8000원인 책은 당시 7만5000원이었습니다. 쪽수는 4482 페이지.
사전 첫 페이지에는 친구의 글귀가 곱게 새겨져 있습니다. 1987년 책을 선물한 친구는 고등학교 교사였답니다.
"우리말을 사랑하는 시인아, 네 언어의 시적 정화(精華)에 이 책을 바친다. 다시 태어나도 이 땅에서 우리말을 사랑할 우리는 한국인이기에. 1987년 너의 축일에 벗 데레사."
편지를 쓴 친구는 역시 똑같은 글씨체로 1998년에도 엽서를 썼습니다.
"50대 중반이면 우리들 노인이 맞나?…(친구들과 만나) 해인이의 얘기로도 맥을 이었는데, 너 듣고 있었니? 늘 순수한 네가 참 신비롭다는 얘기들."
수녀는 사랑하는 친구의 응원을 사전에 깊이 새겼습니다.
"요즘도 가끔 뒤적거리면 처음 보는 단어가 왜 그리 많은지. 내 평생 다 못 볼 것 같긴 하지만, 시 앞에서 겸손해지게 되는 귀중한 책이죠. 오랫동안 한결같은 우정의 증거물이기도 하고요."
'마음을 온유하게, 말씨를 부드럽게, 행동을 겸손하게... 우리가 언어를 조금만 순화해도 상처와 폭력이 줄어들 거예요. 서로서로 이타심이 불어나는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세상 사람들이 '이모'로 수녀도 괴롭거나 번뇌에 시달릴 때가 있습니다. 본의 아니게 남들의 오해를 사거나 사실이 아닌 소문이 돌 때, 그로 인해 수도원 사람들이 힘들어 할 때 가장 마음이 아픕니다. 그럴 때 우선 기도를 올리고 마음을 굳게 먹습니다.
"올해 실천하기로 한 세 가지가 있어요. 마음을 온유하게, 말씨를 부드럽게, 행동을 겸손하게. 우리가 언어를 조금만 순화해도 상처와 폭력이 줄어들 거예요. 이타심이 불어나는 한 해가 되기를. 내 새해 소망이에요."
돌발질문작가와 나누는 엉뚱문답
가장 행복할 때는 언제인가요?
남향으로 햇볕이 들 때 가장 행복하지요. 내 시에도 해를 소재로 한 작품이 참 많은데, 햇살에는 전기가 줄 수 없는 따뜻함이 있어요. 자연으로부터 사랑 받고 축복 받는 기분을 느끼죠. 아프고 나서 작은 것들에 더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됐어요. 해 안에 사는 기쁨, 그런 것.
기억에 남는 독자가 있다면 소개해 주세요.
내 독자들은 워낙 다양한데, 교도소 수감자도 여럿 있어요. 그 중 한 명이 수감생활 중 편지를 보내 왔어요. 내 키보다 더 큰 한지에 색깔별 볼펜으로 시에 대한 감상, 새롭게 살고 싶다는 다짐을 썼죠. 1980년대 후반에 사형당한 사형수 독자들의 애틋한 편지도 눈물겨운 추억으로 남아 있고요. 안부를 주고 받던 사형수 11명 중 7명이 세상을 떠났네요.
글이 잘 써질 때는 언제인가요?
행복할 때보단 힘들고 우울할 때 글이 잘 써져요. 밤에 잠들기 전 침실에서 쓰는 편이고요. 우선 연필로 쓴 후 최종 정리는 컴퓨터로 하지요. 특별히 시간대를 나누진 않고, 새벽 5시 반부터 수도생활을 해야 하니까 틈틈이 남는 시간에 써요.
에필로그
'이모', '천사', '민들레 시인'...
수녀의 별명은 참 많습니다.
하지만 스스로 지은 별명은 '종이나라 수녀'인데요. 시인으로 살면서 평생 종이와 함께 살아서랍니다.

"내 방에 책이랑 편지가 참 많아요.
1980년대부터 문인들과 독자들이
보낸 편지를 이름순으로 정리한 창고도 있어요.
어머니(2007년 작고) 생전에 받은 편지도 있고,
故 박완서 작가, 故 장영희 시인, 故 법정 스님...
수십 년 된 편지가 이렇게 많아요.
시 구상을 할 때도 이면지를 쓰고. 종이랑
같이 사는 운명인가 봐."(웃음)
별명이 참 많은데 스스로 지은 별명은 '종이나라 수녀'예요. 시인으로 살면서 종이와 함께 살았는데, 종이랑 같이 사는 운명인가봐요.
김지현(주간동아 객원기자)
사진
이강훈(다큐멘터리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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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5-01-26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