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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책상

지금도 문학에 대한 열정은 맹목적 - 소설가 윤후명의 책상

지금도 문학에 대한 열정은 맹목적 소설가 윤후명의 책상
책상(冊床) : [명사] 앉아서 책을 읽거나 글을 쓰거나 사무를 보거나 할 때에 앞에 놓고 쓰는 상. 
'나'라는 1인칭 시점으로 의식 흐름을 묘사해 온 작가 윤후명. '1인칭 주어는 객관성을 잃는다'는 비평에도 불구하고 소설 속 자아를 세밀하게 탐구해 주목 받았습니다. "그림도, 여행도 모두 새로운 나를 찾는 과정"이라고 말하는 열정의 노장. 그의 책상을 소개합니다.
일흔을 앞둔 소설가,  
20대의 열정으로 문학과 그림을 자유롭게 오가다
소설가 윤후명의 책상
한 해의 끝을 알리는 12월이 오고 있습니다. 매년 이맘때면 달력을 넘기며 일 년간 무엇을 했나 돌아보게 됩니다. 숨가쁘게 달려온 일상에 쉼표를 찍어보는 것이죠. 삶을 여행에 비유한다면 우리는 자아를 찾아 쉼없이 이동하는 여행자입니다.
소설가 윤후명은 "문학이란 진정한 '나'를 찾는 여정"이라고 말합니다. 그의 작품 속 인물들은 자아에 대한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면서 물리적, 정신적으로 이동합니다. 유랑하는 방외인의 삶마저도 그에겐 문학이었습니다.
등단한 지 47년, 일흔을 바라보는 그는 지금도 소설가, 교수, 화가의 삶을 오가고 있습니다. "새로운 활동은 또 다른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라는 그를 서울 효자동 집필실에서 만났습니다. 골목을 헤매는 취재진에게 손을 흔드는 작가는 푸근한 이웃집 할아버지 같았습니다.
'문학비단길'이라 불리는 작업실. 책과 그림, 해외 골동품이 널려 있는 공간은 고서(古書) 냄새를 풍겼습니다. 옆에 난 베란다 틈으로 쏟아진 햇살이 책장을 환히 비춰주고 있었습니다.
소설가 윤후명
첫 번째 작가의 물건시대의 현실을 담은 꽃 한 송이, 엉겅퀴 그림
엉겅퀴 그림
"거제 포로수용소에 갔었는데 황량한 벌판에 엉겅퀴 한 송이가 있더라고요.
마치 전쟁 후 황폐화된 땅에서 저 혼자
살겠다고 몸부림치는 그 꽃이 마치 내 어린 시절 같았어요."
10여 년 전 그림을 시작해 소설집 『새의 말을 듣다』 표지도 손수 그렸다는 작가. 지난 10월에는 서울 옥인동 '길담서원'에서 개인전 《엉겅퀴 상자》를 열었습니다. 전시했던 꽃 그림들이 작가와 한 식구처럼 방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숱 많은 자줏빛 꽃잎들이 작업 공간을 예쁘게 물들였습니다.
그림을 차마 만지지 못하고 바라보던 기자에게 작가가 작품을 번쩍 들어 보였습니다. "이게 종이가 아니예요. 알고 보면 상자곽이야. 우리 세대들은 뭘 함부로 못 버려요. 집에 남는 상자가 많은데 버리기 아까워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어요. 이 세상에 다시 예쁘게 태어나라고."
그런데 왜 화려하지도 않고 잡초처럼 모질게 자라는 엉겅퀴일까요?
"벌써 30년도 더 됐는데, 1983년도에 글 쓰려고 거제도에서 머문 적이 있어요. 우연히 거제 포로수용소에 들렀는데 황량한 벌판에 엉겅퀴가 나 있더라고. 마치 누가 일부러 꽂아놓은 듯 제 혼자 단단하게 살아남아 있었지. 전쟁 후 황폐화된 땅에서 저 혼자 살겠다고 몸부림치는 그 꽃이 마치 내 어린 시절 같았어요. 내가 겪은 현실, 우리의 시대 전체가 그 꽃 한 송이에 들어있는 듯한 충격을 받은 거지요."
그 후로 엉겅퀴는 그에게 특별한 의미가 되었습니다. 어느 날은 약국에서 약을 샀는데 엉겅퀴 추출물이 들어있는 걸 보고 반가워할 정도였답니다. "엉겅퀴가 야생에서 강하게 자라는지라 약효가 있는 것 같다"며 작가는 웃었습니다.
"우리 세대는 모든 걸 경험한 세대예요. 해방, 전쟁, 산업화, 민주화, 정보화 시대까지… 70년 살았는데 700년 산 것 같아. 눈물과 한(恨) 속에서도 치열하게 살아왔던 우리를 자생력 강한 엉겅퀴가 상징하는 것 같아요."
두 번째 작가의 물건먼 땅에서 만난 고려인들의 이야기, 가죽 물통
"1991년 카자흐스탄에 갔을 때예요.
생애 처음으로 고려인들을 만났지요.
한국에선 이미 오래 전 잊혀진 그들의 이야기를 눈물로 들었어요."
가죽 물통 사진
작업실엔 동양적인 장식품이 많습니다. 그 중 커다란 가죽 물통을 작가가 들고 왔습니다. 처음 봤을 땐 악기로 착각할 만큼 꽤 컸습니다. 두껍고 질긴 이 물통은 카자흐스탄 유목민들이 실제 사용한다고 합니다.
"1991년 카자흐스탄에 갔을 때예요. 생애 처음으로 고려인들을 만났지요. 한국에선 이미 오래 전 잊혀진 그들의 이야기를 눈물로 들었어요. 1930년대 강제 이주 당해서 평생 그곳에 살면서도 우리 언어와 풍습을 끈질기게 지키는… 같이 간 일행은 다음 목적지인 모스크바로 떠나는데 난 떠날 수가 없더라고요. 그 후로 카자흐스탄을 세 번째 방문했을 때 우리 민족의 사연을 알리겠노라 결심했죠."
물통은 당시 산 기념품입니다. 한 번도 사용한 적은 없지만 문학적 전환의 계기가 되었던 그 시절을 떠올려 주는 유일한 물건이지요. 카자흐스탄 여행기를 살려 쓴 「하얀 배」는 1995년 이상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작가는 중앙아시아와의 교류가 더 활발해져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실크로드가 통과하는 중앙아시아는 우리와 언어적 뿌리가 유사합니다. 요즘 인문학 연구가 강화되면서 중앙아시아도 조금씩 주목하고 있는데 좋은 현상이에요. 비록 말은 잃어버렸지만 한민족의 식생활과 풍습을 지키는 이들의 삶을 기억해야 합니다. 한번도 우리나라를 와본 적 없어도 그들의 영혼은 태생적으로 한국을 그리워하니까요."
세 번째 작가의 물건40년 세월의 문학적 열정, 시 동인 '70년대'
70년대 모임 사진
"문학의 순수성을 되살리는 동인지를 만들어 보자, 그런 취지로 결성했어요.
아쉽게도 1973년 이후 단체 활동은
못했지만 해외 대학도서관에도 우리 동인지를 배포하는 등 의미가 있었죠."
작가가 가장 아끼는 흑백사진 한 장. 1969년 결성된 시 동인 '70년대'의 모임입니다. 1973년 찍은 사진에는 석지현, 김형영, 고(故) 임정남, 정희성, 그리고 작가가 나와 있습니다. 사진 속 주인공들과 강은교 시인은 2012년 『고래』라는 합동 시집을 냈습니다. 2005년 세상을 떠난 임정남 시인은 참여하지 못했지만, 사진은 그들의 40년 세월을 말해 줍니다.
"20대였을 때니 피가 뜨거운 시절이었죠. 문학의 순수성을 되살리는 동인지를 만들어 보자, 그런 취지로 결성했어요. 아쉽게도 1973년 이후 단체 활동은 못했지만 해외 대학도서관에도 우리 동인지를 배포하는 등 의미가 있었죠. 지금도 한 달에 한 번씩 만나는 든든한 문학 동지들입니다."
작가가 문학을 대하는 마음은 그 대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고 합니다. 그는 "우리 스스로 한국 문학에 대한 건강한 자부심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한국에서는 우리나라 소설 몇 편이 얼마나 번역됐나, 그런 양적인 것에만 관심이 쏠려 있어요. 해외에서 먼저 인정받아야 우리도 비로소 사 보는 추세죠. 그런 환경에서 우리 문학이 얼마나 튼튼하게 성장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먼저 우리 문학의 가치를 제대로 평가해야 희망이 있는 겁니다."
'내 삶에 문학 아닌 다른 것이 가치가 있나 싶어요. 그리고 한국어를 쓰는 나는 문인으로서 참 축복받았다는 걸 기억하고 삽니다. 한국어는 형용사가 풍부해 이미지를 묘사하기에 좋은 언어예요. 지금은 이미지의 시대이고, 이미지는 줄거리, 메시지에 선행한다고 믿거든요. 문장의 미학에 내가 특히 집중하는 이유지요. 머리가 아닌 가슴을 치는 문학을 평생 잃지 않을 겁니다.'
'글에 대한 열정은 지금도 맹목적'이라는 작가. 일흔을 바라보는 그는 지금도 문학만이 삶의 가치라고 힘주어 말했습니다.
"건방진 이야길지 모르겠는데, 내 삶에 문학 아닌 다른 것이 가치가 있나 싶어요. 그리고 한국어를 쓰는 나는 문인으로서 참 축복받았다는 걸 기억하고 삽니다. 한국어는 형용사가 풍부해 이미지를 묘사하기에 좋은 언어예요. 지금은 이미지의 시대이고, 이미지는 줄거리, 메시지에 선행한다고 믿거든요. 문장의 미학에 내가 특히 집중하는 이유지요. 머리가 아닌 가슴을 치는 문학을 평생 잃지 않을 겁니다."
돌발질문작가와 나누는 엉뚱문답
가장 행복할 때는 언제인가요?
지금이 가장 행복합니다. 또는 뭔가 새로운 것을 해보고 싶은데 그 힘이 있음을 느낄 때. 과거에 쓰여진 소설이 아닌, 다른 세계를 소설가란 이름으로 그릴 수 있을 때 행복하지요. 또 얼음이 녹아 흐르는 물소리 같은 것이 문학에서 느껴질 때 행복합니다.
하루 중 글 쓰는 시간은 언제인가요?
예전엔 새벽에 주로 썼는데 요즘엔 딱히 정해져 있지 않아요. 시간을 가려 쓴다는 건 사치이죠.
마감이 코앞일 때 달려들어 쓰는 건 모든 작가의 공통점 같고요.(웃음) 그래서 마감이란 유용한 제도라 생각해요. 마감 기한이 없어서 쓴다 쓴다 해놓고 10년 동안 완성 못 하는 동료도 봤으니까.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은 어떤 건가요?
소설과 그림을 자유롭게 오가며 활동하고 싶습니다.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에서 우러나온 문학, 미술을 하고 싶어요. 예전에 독일에 갔더니 사람들이 맥주집이나 카페, 빵집 어디에서나 고전문학을 주제로 가볍게 대화하더군요. 그만큼 문학과 일상이 가깝게 공존한다는 거죠. 우리나라에선 뭔가 이야길 꾸며내면 '소설 쓰지마라'고 할 정도로 소설에 대한 거리감이 있어요. 고상한 척 현실과 동떨어진 예술이 아니라 일반 독자들과 발맞춰 가는 예술인으로 남고 싶습니다.
에필로그
지금도 청년의 마음으로 글을 쓴다는 작가는 고등학생 시절 가족에게 '문학을 하겠다'고 선언한 때를 잊지 못합니다.

당시 작가는 열여덟 살, 법조인이었던
아버지는 아들이 자신의 뒤를 따라 법학과에 가길 바랐습니다.

"그 때 아버지에게 꽤 당돌한 말을 했는데,
'법은 인간을 구속하고 문학은 인간을 해방하는 거예요'라고 항변했어요. 조그만 녀석이 뭘 알았겠느냐마는 가슴은 이미 문학으로 뜨거웠을 때였죠."

아버지는 작가가 소설가가 된 해에 눈을 감았습니다.
자식이 더욱 잘 되는 걸 보셨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안타까움과 아버지에 대한 추억은 그의 소설 속에 고스란히 녹아 있습니다.
'법은 인간을 구속하고 문학은 인간을 해장하는 거에요' 아버지에게 꽤 당돌한 말을 했지요. 그때는 문학으로 뜨거웠을 때니 그런 말도 할 수 있었어요.
김지현(주간동아 객원기자)
사진
이강훈(다큐멘터리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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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4-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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