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상(冊床) : [명사] 앉아서 책을 읽거나 글을 쓰거나 사무를 보거나 할 때에 앞에 놓고 쓰는 상.
바슐라르의 ‘상상력은 책과 램프 사이에서 나온다’는 말을 좋아한다는 소설가 김탁환. 그만큼 지식과 연구의 힘을 강조하는 그의 작업실을 찾았습니다. 그의 책상에서 집필 습관과 작품에 영향을 준 물건을 만나 보세요.
사라진 옛 이야기들, 그의 손을 거쳐 현재의 열광을 만들다
영화 《명량》이 1750만명 이상 관객을 동원하며 한국 영화의 새로운 기록을 세웠습니다. 올해 상반기에는 드라마 《정도전》의 시청률이 20%에 육박했습니다. 대중문화 속 사극 열풍이 역사적 인물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옛 이야기를 맛깔나게 들려주는 소설가 김탁환. 그는 올해 화제가 된 이순신, 정도전은 물론 황진이, 혜초, 허균 등의 인물을 소재로 40편 이상의 작품을 펴냈습니다. 고전문학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대학에서 스토리텔링을 가르치기도 한 그는 능수능란한 역사 이야기꾼입니다. 최근 역사 열풍으로 더욱 주목 받고 있는 그의 파주 집필실을 방문했습니다.
"어수선하죠? 남들은 잘 안 찾아오는 곳인데."
안경 너머 웃는 작은 눈과 시원한 입매, 숱이 많은 턱수염. 한 눈에 푸근함이 느껴졌습니다.
"대한민국 전체가 현신적인 리더십에 대한 갈망이 큰 것 같아요. 그래서 요즘 이순신 관련 인터뷰 요청이 쏟아지네요. 신작 동화가 나와서 그걸 이야기하고 싶은데 참.."
그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었습니다.
첫 번째 작가의 물건 ㅣ 소설 주인공 그 이상, 호랑이 인형들
"호랑이는 멈추면 죽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계속 활동하는데, 그 점이 소설가와 닮은 것 같아요.
소설가도 쉼 없이 움직이고 글을 쓰니까요."
눈을 부릅뜨고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낸 백호랑이. 금방이라도 살아나 우렁찬 울음소리를 뿜어낼 듯한데요. 작가가 이곳 집필실에서 처음 쓴 소설 『밀림무정』의 주인공 ‘흰머리’입니다. 소설을 읽은 독자가 중국에서 직접 사서 선물한 것입니다.
백호의 턱 밑에는 손가락만한 호랑이 인형들이 모여 있습니다. 최근 출간한 동화 『호랑이 왕대』 시리즈의 주인공들이지요. 꼬리를 흔드는 아기 호랑이, 갓 태어난 새끼를 물고 가는 엄마 호랑이 등이 놓여 있었습니다. 작가는 “얘네들이 책상 위에 있으면 글 쓸 때 상상이 훨씬 잘 된다”며 웃었습니다. 또 사슴, 토끼, 고슴도치 등의 배설물이 그려진 손수건도 작업할 때마다 보는데, 그 이유도 ‘호랑이가 짐승 배설물을 보고 먹이를 찾아 다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작가가 호랑이에게 남다른 애정을 가지는 이유는 뭘까요?
"소설가와 호랑이는 여러 면에서 닮은 것 같아요. 우선 혼자라는 게 그렇죠. 호랑이는 발정기 외에는 혼자 생활하거든요. 소설가도 집필할 땐 철저하게 혼자니까요. 또 집요한 성격도 똑같죠. 호랑이는 먹이를 보면 하루든 보름이든 집요하게 쫓아다니고, 한 방에 공격해 버리죠. 소설가도 이야기를 지으려고 몇 달이든 몇 해든 집요하게 조사해 글을 쓰고, 독자들을 한 방에 매혹시키잖아요. 또 '호랑이는 멈추면 죽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계속 활동하는데, 소설가도 쉼 없이 움직이고 글을 쓰니까요."
작가는 시인 백석이 1940년대 번역한 니콜라이 바이코프의 소설 「식인호」를 읽고 호랑이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새로운 지식 세계와 야생동물 보호에 눈뜨게 되었습니다.
"호랑이 공부하러 한 모임에 갔는데 다들 과학자고 나만 소설가였어요. 다른 곳에선 만나지 못할 '노루 전공', '까마귀 전공' 학자들을 보니 신기하더라고요. 재미있는 건 남성 학자들은 고양이, 토끼 등 작은 동물을 연구하고 여성학자들은 사자, 호랑이 같은 맹수를 연구하더군요. 하하"
새로운 분야의 사람들을 만나고 그 인연으로 활동 폭이 넓어질 때 기쁨을 느낀다는 작가. 야생호랑이 보호단체인 ‘한국범보전기금’ 홍보대사이기도 했던 그는 앞으로도 호랑이에 대한 글을 계속 쓸 생각입니다.
두 번째 작가의 물건 ㅣ 지식을 걸러내거나 저장하거나, 상자
"역사소설은 철저한 자료조사와 고증의 산물이에요. 그래야 제대로 된 상상력이 나오거든요."
"소설 한 권이 나오면 그 동안 모은 책들을 재빨리 걸러내야 다음 작품에 집중할 수 있어요."
소설을 집필할 때마다 최소 100권, 때론 몇 천 권의 책을 펼쳐본다는 작가. 그만큼 방대한 지식을 머릿속에서 비워내는 것도 중요한데요. 그 도구는 ‘책 담는 상자’입니다. 작업실 한 켠에는 구한말 자본주의를 다룬 소설 『뱅크』 집필 후 서재에서 꺼낸 책이 가득했습니다. 이전에 쓴 자료들은 작품이 영상화될 때 영화사나 드라마 제작사로 상자째 보내기도 합니다.
"박스라니 뜬금없지요? 좀 우아하게 갈 걸 그랬나? (웃음) 역사소설은 철저한 자료조사와 고증의 산물이에요. 그래야 제대로 된 상상력이 나오거든요. 소설가는 ‘뻥을 잘 쳐야’ 하는데 그건 엄청난 양의 공부를 바탕으로 이뤄지는 겁니다. 그래서 맛깔나는 소설 한 권 나오고 나면 어떻게 하느냐. 그 동안 모은 책들을 재빨리 걸러내야죠. 그래야 다음 작품에 집중하니까요."
아무리 지루한 책이라도 독파하고야 마는 습관은 대학원생 때부터 시작됐습니다.
"교수님 연구실을 지키는 ‘방돌이’였죠. 고전문학 전공이니까 먼지 쌓인 옛날 책들이 가득해요. 해석하는데 너무 힘들어서 ‘아, 나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구나’하고 좌절을 많이 했어요. 그때 지독히 훈련한 게 지금 소설 쓰는 데 밑천이 됐지요."
작가는 철학자 바슐라르의 ‘상상력은 책과 램프 사이에서 나온다’는 말을 언급하며 ‘엉덩이 붙이고 하는 공부가 아이디어랑 직결된다’고 강조했습니다.
상자를 통해 지식을 걸러내는 한편, 꼭 필요한 책을 남겨두기도 합니다. 서가에는 그 동안 수집한 사료들 중 소수의 중요한 책들만 뽑아 연관된 작품별로 모아 뒀습니다. ‘박스 신세’가 되었다가 다시 선택된 보물같은 책들입니다.
세 번째 작가의 물건 ㅣ 20년 동안 따라다닌 얼굴, 도스토예프스키
"이런 작가가 되고 싶다…
제게 꿈을 꾸게 해준 소설가에요.
저의 첫 모델이죠."
그의 책상을 20년째 지키고 있는 사진이 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얼굴인데요. 소설가가 되기로 결심한 1995년부터 지금까지 작가를 따라다닌 유일한 물건입니다.
"고등학교 때 동서문화사에서 나온 전집을 읽고 참 좋아했어요. 『악령』은 지금 읽어도 매력적입니다. ‘이런 작가가 되고 싶다’고 꿈을 꾸게 해준 소설가로서의 첫 모델이지요."
도스토예프스키는 그의 작품 곳곳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는 『김탁환의 독서열전』에서 자신의 영혼을 뜨겁게 한 책 중 하나로 『도스토예프스키와 함께한 나날들』을 꼽았습니다. 『불멸의 이순신』의 첫머리에도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인용했는데요. ‘만일 지금까지 이 지상에 사랑이 있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자연의 법칙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기의 불멸을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라는 문장에서 소설 제목의 영감을 얻었습니다.
진해 해군사관학교 장교 시절, 그는 도스토예프스키 작품을 포함해 ‘인생에서 책을 가장 열심히 읽었다’고 합니다. 생도들에게 국어를 가르치고 남는 시간에 한 독서는 든든한 문학적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그 후 20년 동안 글을 쓰면서 힘들고 절망한 적도 많았습니다. 그 때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그를 정신적으로 일으켜 세웠던 동기가 되었습니다.
소설가, 칼럼니스트, 교수, 라디오 진행자, 출판인 등 다양한 직업을 거쳐 온 작가는 "소설가가 제일 힘들지만 매력적인 직업"이라고 합니다.
"장자의 잠언록에 ‘추호의 끝보다 큰 것은 없다. 태산도 작은 것이다’라는 말이 있어요. 그만큼 우리 삶은 압축적으로 강렬한 나날도 있고 느슨한 나날도 있는 거지요. 『혁명』이나 『허균, 최후의 19일』은 주인공의 생애에서 20일도 안 되는 날들을 정수로 뽑아낸 소설입니다. 특히 조선시대는 플룽타크 영웅전처럼 천재들이 많이 거쳐간 시기거든요. 그런 특별한 순간에 주목해 이야기를 풀어가는 직업이 소설가입니다. 그게 매혹적이어서 앞으로도 계속 소설가로 살고 싶습니다."
돌발질문 ㅣ 작가와 나누는 엉뚱문답
하루 중 글이 가장 잘 써지는 시간은 언제인가요?
1999년 교수생활 할 때부터 지키는 규칙입니다. 매일 오전 7시~11시 정도까지 원고지 15~25매를 써요. 오전에 할 일을 끝내면 오후부터 시간 조절하기 좋더라고요. 낮에는 빈둥거리고 저녁엔 책이나 영화를 봅니다. 단순한 삶이 좋아서 책이나 영화 둘 중 하나만 봐요.
‘정성’. 정성을 다한다는 말 참 좋아해요. 최근에 방송 《마스터 셰프 코리아》를 보면서 그 단어를 새삼 다시 느꼈어요. 짧은 시간 동안 엎치락뒤치락하다 마지막 남은 1분에 초능력을 발휘하잖아요. 끝나면 훌훌 손 털고 일어나고. 소설가도 그래요. 주어진 시간 안에는 노력을 무한정 들이붓고 데드라인을 지켜야죠. 저는 출판사가 정해준 기한은 꼭 지키는데, 정성을 다하는 작가로 살고 싶기 때문이에요.
커피를 마셔요. 글 쓸 때는 의식도 깨어 있지만 손도 깨어있어야 하는데 커피가 상당한 도움이 되죠. 『노서아 가비』 이후로 계속 커피 선물을 받고 있어서 모자랄 걱정은 없어요. 또 첼로 음악을 듣기도 하는데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특히 좋아합니다. 1년 내내 다른 음악 안 듣고 첼로만 들은 해도 있었어요.
『파리의 조선 궁녀, 리심』, 『나, 황진이』에는 시대의 편견에 맞서는 강인한 여성이 등장합니다. 실제로도 그런 여성상에 관심이 있냐고 물었습니다.
"글쎄, 그런 여자를 만나보고 싶은가 보죠. (웃음) 정치나 문화적 환경에서 억압되어 있었지만 한계를 뚫고 전진했던 여성들 삶이 참 드라마틱하다고 생각해요.
『열녀문의 비밀』도 나름 페미니즘 의식을 갖고 쓴 작품이고요.
내 딸들이 이렇게 강하게 자라줬으면 좋겠다는 마음에 첫머리에 '10년 후 예영, 문영에게'라고 썼지요.
그런데 이 녀석들이 제 책에는 관심이 없고 뱀파이어에 빠져있네요." (웃음)
- 글
- 김지현(디지틀조선일보 기자)
- 사진
- 이강훈(다큐멘터리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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