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책상

여성의 숨겨진 자아와 욕망을 대변하는 소설가 - 권지예 작가

여성의 숨겨진 자아와 욕망을 대변하는 소설가 권지예의 책상
책상(冊床) : [명사] 앉아서 책을 읽거나 글을 쓰거나 사무를 보거나 할 때에 앞에 놓고 쓰는 상. 
여성의 내면 속 깊은 욕망을 들추는 소설가 권지예. 그의 작품 속 인물들은 일탈을 꿈꾸고 시도함으로써 욕망을 채우며 자아를 완성해 갑니다. 때론 치열한 고난에 도전하고, 때론 은은한 삶의 향기를 사랑하는 그의 책상을 만나보세요.
삶의 여행에서 만난 따뜻한 인연, 글쓰기의 힘이 되다
소설가 권지예
대중문화가 '여성의 욕망'에 시선을 돌리고 있습니다. 지난 5월 인기리에 종영한 드라마 '밀회'는 40대 여성과 20대 남성의 격정적인 연애를 그렸고, 올해 초 개봉한 영화 '관능의 법칙'도 중년 여성들의 직설적인 성 담론으로 화제를 낳았습니다. 가정적이며 지고지순한 아내로만 그려졌던 여성들의 일탈, 욕망이 새롭게 주목 받고 있습니다.
소설가 권지예는 중년 여성들의 내면을 예리하게 포착하는 작가입니다. 등단 작품인 「꿈꾸는 마리오네뜨」, 각각 이상문학상과 동인문학상을 받은 「뱀장어 스튜」와 「꽃게 무덤」, 소설집 『퍼즐』, 『폭소』와 장편소설 『유혹』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여성의 목소리를 대변했습니다. 그의 작품 속 중년 여성들은 몸도 마음도 20대보다 더 뜨겁습니다. 여성의 욕망을 섬세한 필치로 그려온 작가의 은평구 자택을 찾았습니다.
작가의 집에는 책상이 많습니다. 프랑스에서 가져 온 1인용 노트북 책상, 앉은뱅이 책상, 원형 테이블, 배우 하정우가 남편(김종근 미술평론가)과의 인연으로 직접 만들어 선물했다는 거실 탁자까지. 다양한 책상을 사용하는 그가 소개한 물건은 무엇이었을까요?
소설가 권지예의 책상
첫 번째 작가의 물건꿈은 늙지 않는다 ? 여든 다섯 살 독자의 선물 '등(燈)'
"꿈에는 나이가 없다는 걸 깨달았어요.
나이가 들어서 새로운 도전을 하는
모습이 제게 큰 용기가 되었어요."
작가의 책상을 늘 밝혀 주는 고마운 존재가 있습니다. 팬으로부터 선물 받은 한지 등(燈)인데요. 단풍잎 압화(押花: 꽃잎 등을 눌러서 말린 것)가 하늘하늘 춤추듯 수놓아져 있습니다. 여든 다섯 살의 팬이 직접 만들었다는데 팬과의 인연이 아주 특별합니다.
"2년 전 선물과 손글씨 편지를 받았어요. 여든 살이 넘은 독자께서 꽃이랑 클로버, 나뭇잎을 말려 등이랑 부채를 직접 만들어 보내셨더라구요. 선물보다 더 감동적인 건 그 분 자체였어요. 여든 살이 넘어서 수필가로 등단하셨거든요. 저에게 '삶의 내면과 외면을 아우르는 글 솜씨가 멋지다'고 칭찬해 주셨는데 나이가 들어서 새롭게 도전하는 그 분이 오히려 제게 용기를 주셨죠."
이후 작가는 당시 연재하던 일간지 칼럼에 '꿈은 늙지 않는다'라는 제목으로 이 사연을 썼습니다. 팬과의 인연은 더욱 깊어졌고 서로를 격려하는 사이가 됐습니다. 이 팬은 최근 『꿈은 늙지 않는다』 (문예바다)를 낸 박기숙 씨입니다.
"무슨 일을 하기 앞서 핑계 댈 때가 많잖아요. '너무 늦어서 안 된다'든지 '이 나이에 무슨...' 하고요. 그 분을 보면서 꿈에는 나이가 없다는 걸 깨달았어요. 저를 좋아하던 팬이 등단의 꿈을 이루신 걸 생각하면 마음이 더욱 푸근해진답니다. 참, 압화가 순우리말로 '꽃누르미'래요. 단어가 참 예쁘죠?"
나란히 문학의 길을 걷게 된 팬과 작가. 책상 위 등불은 세대 차를 넘어 각별한 사이가 된 두 사람의 앞길을 비추고 있습니다.
두 번째 작가의 물건영혼만이 남았던 극한의 여행 ? 히말라야의 돌
"갑자기 글쓰기가 막막해졌어요.
마음가짐을 새롭게 하기 위해
히말라야를 가기로 했죠."
작가도 슬럼프에 빠진 적이 있습니다. 더 이상 새로운 소설을 쓰기 어려울 것 같았던 2007년, 내면을 남김없이 비워 보고자 모험을 선택했습니다. 히말라야로 떠난 것이죠.
해발 4천 미터. 끝없이 이어지는 고원은 너무나 추웠습니다. 눈발 섞인 바람 앞에선 햇빛의 온기도 소용 없었습니다. 일행 중 체력이 가장 약했던 작가는 정신력으로 버티며 오직 앞을 향해 걸어나갔습니다.
"그곳에서 저의 육체는 없었어요. 바람에 영혼만 실려가는 느낌이랄까요? 계속해서 걷지 않으면 휙 날아갈 것 같이 거센 강풍이었어요. 죽을 힘을 다해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죠."
도중에 만난 계곡에서 발길이 멈췄습니다. 오래 전 바다였다는 그 곳에는 무수한 돌이 널려 있었습니다. 동행한 가이드는 “여기선 어떤 돌을 깨어도 다 화석”이라고 했습니다. 추위의 고통도 잠시 잊고 돌을 줍기 시작했습니다.
조개 모양의 암모나이트, 하트 무늬의 화강암, 반으로 갈라진 화석. 물 속의 돌들은 히말라야의 눈보다 더 반짝였습니다. "'이 돌은 수 만년 전 탄생했겠구나. 자연에 비하면 인간은 얼마나 미약한가'를 새삼 느꼈죠. 그 순간을 잊지 않기 위해 돌을 모아 가져왔어요."자연의 일부를 가져오는 것조차 욕심으로 느껴졌는지, 그는 "계곡에서 몰래 훔쳐 왔다"고 말했습니다.
3주간의 히말라야 여행은 다시 펜을 들게 해 줬습니다. 한국에 돌아와 한 달 만에 원고를 쓸 수 있었죠. 히말라야의 돌과 바람 이야기는 단편소설 「바람의 말」에 그려져 있습니다. 추위 속에서 자신의 영혼에 가장 가까이 맞닿았던 그 때를 돌들이 말해주고 있습니다.
세 번째 작가의 물건언젠가 책 표지가 될 초상화 ? 故김흥수 화백의 선물
"언젠가 소설책 표지로 실어주었으면
좋겠다고 하시면서 선물해 주셨어요.
이 그림을 보면 김 화백님을
떠올리게 되요.
아흔다섯 살이신데도 하루에 몇 시간씩
그림을 그리시는 것을 보면서
저도 많은 에너지를 받죠."
미술평론가 남편 덕분에 집 안은 그림으로 가득합니다. 그 중 작가의 방에 걸린 그림은 자신의 초상화인데요. 담담하게 앞을 응시하는 작가의 모습을 파란 바탕이 감싸고 있습니다. '한국의 피카소'라 불리는 원로 화백 故김흥수의 작품입니다. 김 화백은 추상과 구상을 한 화폭에 담은 '하모니즘'을 창시한 올해 아흔다섯 살의 현역 화가입니다.
김 화백은 작가 부부와 인연이 깊습니다. 작가의 남편과는 30년 지기로 미술계 선후배 사이죠. 화백은 1950년대 프랑스에서 미술가로 활동했고 작가 부부도 프랑스에서 8년간 유학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예전엔 평창동 이웃사촌으로 식사도 자주 했고, 작가의 2005년 「꽃게 무덤」동인문학상 시상식에도 와 주었습니다.
4년 전 화백은 각각 파란 바탕, 빨간 바탕에 부부의 초상화를 그렸습니다. "언젠가 소설책 표지에 이 초상화를 실어 주면 영광이겠네"라며 건넨 선물이었습니다.
100세를 바라보는 노장의 그림은 작가에게 힘을 실어 줍니다.
"화백님의 열정은 나이를 잊은 것 같아요. 지금도 실험적인 미술을 추구하시고 하루에도 몇 시간씩 그림을 그릴 만큼 건강하시죠. 그 에너지가 어디서 나올까 가끔 생각해 봐요. 늘 빨간색 웃옷을 입고 계시는데 그래서 정열적이신지도…(웃음). 언젠가 제가 에세이를 쓰면 이 초상화를 표지로 쓸 생각이랍니다"
故김흥수 화백은 인터뷰 진행 이후, 지난 6월 9일 별세하셨습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꽃을 참 좋아해요. 그래서 예전에 평창동에 살 때는 직접 흙도 만지고 식물도 키웠어요. 사람이든 식물이든 모든 생명과 교감할 때 가장 행복해요.'
인연을 아끼고 사랑하며, 그로부터 창작의 힘을 얻는 권지예 작가. 글쓰기에 지칠 땐 집에 놓인 꽃 화분을 바라보며 마음을 치유합니다.
"예전 평창동에 살 적엔 마당에서 채소와 꽃을 기르는 것이 낙이었어요. 내 손으로 흙을 만지고 식물을 가꾸면서 평안을 얻었죠. 식물이 제 손길에 반응하며 움직이고 자라나는 걸 보았어요. 그 때 꽃과 벌레를 관찰한 것이 소설 「붉은 비단보」의 모티브가 됐네요. 사람이든 식물이든, 모든 생명과 교감할 때 가장 행복합니다."
꽃
돌발질문작가와 나누는 엉뚱문답
과거로 돌아가는 것, 미래를 볼 수 있는 것 중 하나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어떤 것을 선택하시겠어요?
미래를 보고 싶어요. 소설 『4월의 물고기』에도 이런 장면이 나와요. 주인공이 점쟁이에게 가서 '내가 어떻게 죽는지'에 대해 물어보는 거죠. 앞으로 내 운명이 어떻게 펼쳐질지 궁금하네요.
지난 삶에 대해선 후회가 없어요. 뭔가를 포기함으로써 더 큰 걸 얻었거든요. 결혼 당시엔 남편이 시간강사라 주위 반대를 무릅쓰고 사랑을 선택했죠. 운 좋게도 결혼 후 남편이 미술관 관장이 되었어요. 프랑스로 유학 갈 땐 안정적인 교사 생활을 관둬야 했지만 박사 학위도 받고 등단도 했죠. 과거에는 미련이 없네요.
가장 좋아하는 단어는 어떤 것인가요?
'자유로움'. 마치 쟁취해야 할 것 같은 '자유'보다 부드러워서 좋아요.
주부와 작가 생활을 병행하다 보니 한 가지에 몰두할 수 없어 답답한 적이 많았어요. 그래선지 제 작품에 자유를 희구하는 여성상이 주로 그려진 것 같아요. 영혼의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외유내강'도 좋아하는 단어예요. 보드라움이 딱딱함보다 힘이 세다고 생각해요. 겉은 여유롭고 속은 단단한 사람이고 싶네요. 작품에서도 그런 여유가 묻어났으면 좋겠고.
가장 최근 크게 웃었던 적은 언제인가요?
제가 워낙 방향 감각이 없어요. 지하도 이용할 때도 분명 저쪽으로 예상하고 나와보면 엉뚱한 데로 와 있고.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어요.
취재 때문에 한학자를 만났어요. 남자 분인데 머리도 길러 묶으시고 까만 개량한복을 입은 도인이었죠. 멀리서 봐도 범상치 않은 묘한 분위기가 풍겼어요. 빨리 저희 집에 모셔야 하는 상황이라 냅다 달려 택시를 탔는데, 그 분이 조수석에 타고 제가 뒷자리에 앉자마자 운전사가 '꺄악!'하고 비명을 지른 거예요. 알고 보니 택시 앞에 있는 일반 승용차에 탄 거 있죠. 30대 여자 운전자였는데 웬 도인 같은 분이 차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니 얼마나 놀랐겠어요? 저도 너무 당황해서 미안하다고 싹싹 빌고 줄행랑을 쳤죠. 그 생각 하면 아직도 민망하고 웃음이 나네요.
에필로그
작가는 예전에 자식들에게 '스무 살 전에는 엄마 소설 읽지 말라'고 당부했답니다.
이제 사회인이 된 딸, 사진학과 대학생인 아들은 작가의 소설을 보면서 나름대로 의견을 말해 줍니다.
딸은 소설 『4월의 물고기』를 보고 너무 슬퍼 울었다고 하네요. 고등학생 때부터 쪽지에 시를 적던 아들은 더 재미있게 써야 할 부분을 지적하기도 하고요.
"늘 곁에서 동조하거나 반대해 줄 누군가가 있다는 게 참 좋아요. 자식들이 나를 지켜주는 보험이자 영원한 애독자랍니다."
아이들이 자라서 제 책을 읽고 눈물도 흘릭 의견도 주고... 자식들이 제 최고의 애독자에요.
김지현(디지틀조선일보 기자)
사진
이강훈(다큐멘터리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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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4-07-28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