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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책상

나이 들수록 아름다워지는 시인 - 신달자 작가

나이 들수록 아름다워지는 시인, 신달자의 책상
책상(冊床) : [명사] 앉아서 책을 읽거나 글을 쓰거나 사무를 보거나 할 때에 앞에 놓고 쓰는 상. 
삶의 아픔을 다독이는 '엄마'같은 시인 신달자. 힘겨운 젊은 시절을 보냈지만 그 경험은 시의 밑천이 되었습니다. 따뜻한 위로와 추억이 묻어나는 그의 책상을 들여다 보세요.
'빛'을 통해 '힘'을 얻고, '울림'을 통해 '꿈'을 키우다
시인 신달자
'고독하다'는 말이 유행처럼 된 시대. 어떤 이는 우울증을 앓고, 누군가는 스스로 삶을 포기하기도 합니다. 물질은 예전보다 풍족해졌지만 마음은 오히려 가난해진 이들이 많습니다.
시인 신달자는 젊은 시절에 유난히 고생을 많이 한 사람입니다. 23년간의 남편 간병, 시어머니 병 수발, 세 딸의 육아를 홀로 해 내면서 생계를 이어야 했습니다. 세상을 원망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그때마다 시와 에세이로 오히려 독자들을 위로하며 힘을 냈습니다. 최근 시집 《살 흐르다》(민음사)로 다시 독자들에게 치유의 힘을 전하는 그를 자택에서 만났습니다.
그의 집은 대모산 아래 위치한 서울 수서동의 아파트입니다. "취재진이 점심 못 먹었을까 봐 준비했다"며 딸기, 바나나, 과자, 두유 등이 식탁에 가득 차려져 있었습니다. 생각지 못한 대접에 놀란 우리를 보며 시인이 빙그레 웃었습니다.
"혼자 사는 집이라 손님 오면 이렇게 대접하는 게 낙이에요. 여기서 11년째 살고 있는데 주위 공기가 맑아 참 좋아요. 집 앞에는 세종고가 있어서 매일 운동도 하러 가고, 손연재 선수가 이곳 출신이라 운 좋은 날은 가끔 봤지요."(웃음)
첫 만남부터 넉넉한 미소로 손님을 맞이한 신달자 시인. 그의 책상에는 어떤 물건이 놓여 있을까요?
신달자 시인의 책상
첫 번째 작가의 물건'시의 밑거름이 되어준 또렷한 빛' 등잔
"인생 중 가장 찬란하다는 30~40대 때 나는 참 힘들었어요.
하지만 내가 행복한 환경에서만
성장했다면 이런 시를 쓸 수 있었을까요?
그렇지 않다고 봐요.
고통이 내 시를 더 단단하게 키웠어요."
시인의 방 창가에는 작은 등잔들이 모여 있습니다. 전깃불을 쓰는 시대에 등잔이라니 조금 의아합니다. 알고 보니 시인의 대표작 중 하나인 '등잔'의 모티브가 됐다고 하네요.?
[아버지의 빛 - 등잔 中] (문학세계사, 2012)
인사동 상가에서 싼 값에 들였던
백자 등잔 하나
근 십 년 넘게 내 집 귀퉁이에
허옇게 잊혀져 있었다
어느 날 눈 마주쳐 고요히 들여다보니
아직은 살이 뽀얗게 도톰한 몸이
꺼멓게 죽은 심지를 물고 있는 것이
왠지 미안하고 안쓰러워
다시 보고 다시 보다가
기름 한 줌 흘리고 불을 켜보니
처음엔 당혹한 듯 눈을 가리다가
이내 발끝까지 저린 황홀한 불빛
아 불을 당기면 불이 켜지면
아직은 여자인 그 몸
시인은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활활 타오른 등잔을 여자에 비유했습니다. 30대 때부터 23년간 남편을, 9년간 시어머니의 병 수발을 들며 젊은 날을 희생했던 경험에서 비롯했다고 합니다.
"인생 중 가장 찬란하다는 30~40대 때 나는 참 힘들었어요. 어릴 때 유복하게 자랐고 대학생 때는 촉망 받는 신인 작가로 순탄한 길을 걸었지만, 결혼으로 삶이 완전히 바뀌었죠. 하지만 내가 행복한 환경에서만 성장했다면 이런 시를 쓸 수 있었을까요? 그렇지 않다고 봐요. 고통이 내 시를 더 단단하게 키웠어요."
창가에 놓인 등잔들?
힘든 시기를 추억하는 시인의 얼굴이 행복해 보였습니다. 웃을 때 고운 곡선을 그리는 눈매와 입이 마치 아기 부처의 표정 같습니다. 지난 날 고생했던 흔적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온화하고 평화로운 미소였습니다.
"늙으면 추해진다고 하죠? 내 생각은 달라요.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아름다워져요. 인생이란 세상의 진면목을 경험해 가면서 자기 것을 축적하고 배설해 가는 거니까. 나는 사람의 가장 큰 가치가 고통을 이겨내는 힘이라고 봅니다. 그걸 얻은 사람은 나이가 들어 더 아름답게 살아갈 수 있어요."
시인은 가끔 등잔에 불을 켜 놓고 시상을 떠올립니다. 새벽 5시 반, 아직은 어둑어둑할 때 일어나 간단히 아침식사를 하고 작업에 몰두합니다. 등잔처럼 어둠 속에서 또렷한 빛은 시의 밑거름입니다. 새벽에만 볼 수 있는 푸른 빛은 이번 시집 『살 흐르다』를 쓰는 영감이 됐다고 합니다.
'늙으면 추해진다고 하죠? 내 생각은 달라요.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아름다워져요. 나는 사람의 가장 큰 가치가 고통을 이겨내는 힘이라고 봅니다. 그걸 얻은 사람은 나이가 들어 더 아름답게 살아갈 수 있어요.'
두 번째 작가의 물건'삶을 지탱하는 울림' 종(鍾)
"여행을 다니면서 한 종류의 물건을 사 모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각국의 종을 사 모으기 시작했죠.
가끔씩 종을 흔들어 보는데 소리가
참 맑아요. 그 울림앞에 마음이 정갈해지기도 하고요."
"돌아가신 어머니가 내게 당부한 것 세 가지가 있었어요. '평생 공부해라, 돈을 벌어라, 행복한 여자가 되어라'. 어머니가 생전에 다 이루지 못한 것들이죠. 남편과 시어머니를 간병하고 세 딸을 키우는 역할을 감당할 수 있었던 건 그 꿈 덕분이었어요."
시인은 나이 쉰에 박사학위를 따고 대학 교수가 되어 쉼 없이 시를 써 왔습니다.
진열되어 있는 종들
여성의 사회 진출이 활발한 지금은 시인의 어머니 세대와 분명 다릅니다. 하지만 시인은 "여성이 바쁜 시대일수록 자기 계발과 꿈을 놓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어머니는 하루 20시간 정도 가사노동을 하셨어요. 요즘은 여성의 하루 가사노동 시간이 4시간 정도라고 해요. 그럴수록 자기 계발에 투자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너무 무기력하게 지내는 것 같아서 '산에라도 가 봐라'고 했더니 '산에 가면 뭘 하나요'라고 하더군요. 사회 활동만이 자기 성장이 아니에요. 아이 키우는 것, 집안 일을 하고 여가를 즐기는 것 모두 자기 계발입니다. 사람들이 내일은 더 나아질 수 있다는 믿음, 그 꿈을 안고 살아갈 수 있으면 좋겠어요."
'어떤 사람이 너무 무기력하게 지내는 것 같아서 '산에라도 가 봐라'고 했더니 '산에 가면 뭘 하나요'라고 하더군요. 사람들이 내일은 더 나아질 수 있다는 믿음, 그 꿈을 안고 살아갈 수 있으면 좋겠어요.'
햇살이 환한 거실로 나오자 시인이 직접 쓴 붓글씨가 보였습니다. 큰 여백을 남기고 가운데에 쓴 글이 눈에 들어옵니다.
남의 마음을 잘 알아주는 사람이 되자
"남의 마음을 잘 알아주는 사람이 되자".
단순한 문구지만 시인의 겸손한 마음이 느껴집니다. 무슨 이유로 이 글을 벽에 붙였을까요?
"시인의 기본 마음가짐은 남을 이해하는 거예요. 내가 어느 정도 유명한 작가가 됐지만 자기 할 말만 하는 시인은 되고 싶지 않아요. 내 글을 읽어주는 사람들과 따뜻한 소통을 하고 싶죠. 그래서 낮은 자세로 남의 마음을 잘 살펴보자고 다짐합니다."
시인은 '누구에게나 고통이 있다'는 것을 늘 기억합니다. 남편을 간병하던 시절, 온갖 약 냄새를 숨기느라 진한 향수를 뿌리고 다녔는데 그 때문에 '화려하게 멋 부리는 사람'으로 오해 받았던 경험 때문입니다. 그때는 오해 받는 것이 억울하게 느껴졌지만, 이제는 남들의 숨겨진 아픔을 알아보는 마음을 갖게 되어 감사하다고 합니다.
돌발질문작가와 나누는 엉뚱문답
과거로 돌아가는 것, 미래를 볼 수 있는 것 중 하나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어떤 것을 선택하시겠어요?
젊고 싱싱했던 20대로 돌아가라고? ‘노 땡큐’예요.
연애하고 애 낳고 살림하는 것, 이미 다 아는 건데 다시 하라면 순수한 마음으로 못 하잖아요. 뻔뻔하고 능글능글할걸요(웃음). 나이 일흔이 넘은 지금이 훨씬 행복해요. 처녀 때처럼 남에게 굳이 사랑 받으려고 애쓰지도 않고요.
미래를 보는 것은...글쎄, 내 삶이 얼마 안 남았는걸. 현재를 누리는 것에 만족해요.
가장 좋아하는 단어는 무엇인가요?
고마워.
내 책 중에 『미안해 고마워 사랑해』가 있어요. 가족에게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이었죠. 에세이집 『엄마와 딸』에는 돌아가신 어머니와 내 딸들에게 쓴 편지가 있는데, 쓰고 보니 ‘미안해’밖에 할 말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고마워’에 더 애착이 가요. 하루하루가 귀하고 감사하죠.
최근 가장 크게 웃은 기억은 언제인가요?
우리 손자가 대학생인데 여자친구가 있어요. 둘이 맛있는 식사하라고 레스토랑 쿠폰을 줬지요. 며칠 후에 손자 여자친구가 ‘할머님 감사합니다’하고 전화를 해 왔어요.
  속으로 ‘그럼, 나한테 당연히 고마워 해야지’하고 생각했다가 전화를 끊고 눈물 나도록 웃었어요. 내가 벌써 손자의 여자친구에게까지 전화를 받는 나이가 됐나? 싶어서. 둘이 하는 짓도 귀엽고.
에필로그
시인의 집 대문 앞에는 분홍 백합 세 송이가 꽂혀 있었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생화를 손수 구입해 장식한다고 합니다. 집 안도 아니고 집 밖에 꽃병을 놓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 집이 1층인데, 이쪽 아파트 호수를
방문하는 모든 사람들이 내 집 앞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것 아니에요?
그래서 그들에게 선물 주는 마음으로 늘 꽃을
놓아 둬요. 기분 좋게 집에 들어갈 수 있을 테니까."

시인이 백합같이 환한 미소로 웃었습니다.
'남의 마음을 잘 알아주자'는 시인의 다짐은
이처럼 작은 습관에서도 빛났습니다.
선물 주는 마음으로 늘 꽃을 놓아 둬요. 기분 좋게 집에 들어갈 수 있을 테니까.
김지현(디지틀조선일보 기자)
사진
이강훈(다큐멘터리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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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4-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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