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책상

사라진 것들을 문학으로 되살리는 공간 - 김주영 작가

사라진 것들을 문학으로 되살리는 공간 소설가 김주영의 책상
책상(冊床) : [명사] 앉아서 책을 읽거나 글을 쓰거나 사무를 보거나 할 때에 앞에 놓고 쓰는 상. 
‘길 위의 작가’로 불리는 김주영 소설가는 토속적인 정취, 궁핍한 삶의 희로애락을 감칠맛 나게 묘사하는 작가입니다. 역사 속에서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약자, 서민의 이야기를 되살려 왔지요. 고난과 상처를 작품으로 승화시킨 그의 따뜻한 힘을 느껴보세요.
아픔 많았던 유년기, 서민의 눈물 닦는 문학이 되다
소설가 김주영
소설가 김주영은 지난해 그의 ‘객주’ 시리즈를 10권으로 완간 했습니다. 지난 1984년 9권을 낸 지 30여 년 만입니다. ‘객주’는 조선 말기 전국을 유랑한 보부상들의 삶과 애환을 담은 대하소설입니다.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이 수감 중 애독한 것으로 유명하고 구자경 LG 명예회장 등 대기업 총수들이 작품 속 상인정신을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객주’ 10권은 작가가 울진 십이령 고개의 보부상 비석을 우연히 발견하면서 쓰기 시작했습니다. 9권 완성 당시, 완간에 대한 희망 때문에 주인공 천봉삼을 살려둬 소설을 이어나갈 수 있었습니다.
“이제야 나와의 약속을 지켰네요. 완결에 대한 부담이 늘 숙제처럼 남았었는데...무거운 짐을 비로소 벗은 기분입니다.”
주름진 얼굴로 푸근하게 웃는 그는 자신의 소설 속 서민을 닮았습니다. 가난한 옛 시절의 이야기를 주로 써 온 그의 책상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서울 논현동에 있는 그의 집필실을 찾았습니다.
첫 번째 작가의 물건‘어린 시절 내 모습’ 턱을 괸 예수상
예수상 사진
"이런 예수상, 처음 보죠?
그 흔한 십자가나 나무지팡이 하나 없고. 또, 예수의 표정을 봐요. 고뇌하면서 우는 듯한 표정이잖아요.
인생의 힘겨움을 말해주는 것 같아요. 내 어린 시절도 언제나 울음투성이였죠."
집필실은 서울 도산대로에 위치한 파라다이스 문화재단에 있습니다. 그가 오랫동안 이사장을 맡았고 지금은 고문으로 있는 곳이지요.
“내 고향이 경북 청송인데 출세한 셈이죠, 허허. 이런 사무실은 꿈도 못 꿀 만큼 가난하게 자랐는데, 내 사주팔자를 보면 남들 도움을 많이 받는대요. 그래선지 인복은 있는 것 같아요.”
그의 서재에는 작고 앙증맞은 장식품이 많았습니다. 그 중에서 작가는 나무로 된 예수 조각상을 제일 먼저 집어 듭니다. 그런데 조각상이 좀 독특합니다. 예수의 얼굴이 유난히 크고 비스듬히 턱을 괸 채 앉아 있는 모습입니다. 거룩하기보다 친근하고, 아프리카의 토속적인 조각물 같기도 합니다.
“10년 전쯤 지인인 수녀가 사준 선물이에요. 이런 예수상, 처음 보죠? 그 흔한 십자가나 나무지팡이 하나 없고. 또, 예수의 표정을 봐요. 고뇌하면서 우는 듯한 표정이잖아요. 인생의 힘겨움을 말해주는 것 같아요. 내 어린 시절도 언제나 울음투성이였죠.”
예수상과 석가모니상 사진
소년 김주영의 어린 시절은 늘 서러웠습니다.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그는 유달리 가난했지요. 초등학교 6년 내내 기성회비 한 번 못 내고 교과서도 없이 학교에 다녔습니다. 과묵하고 몸이 약했던 그를 또래들도 놀리기 일쑤였습니다. 소풍날은 더 눈물 나는 날로 기억됩니다. 어머니가 남의 집에서 도시락 통을 빌려다 밥을 싸주었는데, 짓궂은 아이들이 그 도시락을 몰래 빼서 축구공 삼아 차버린 것입니다. 모래 반 밥 반이 돼버린 도시락에 서럽고, 혼자 도시락을 껴안고 울다가 선생님께 혼나 또 서러웠지요. 훗날 그는 이 이야기를 자전적 소설 ‘잘 가요 엄마’에 담았습니다.

“내 문학의 기반은 나의 어린 시절 이야기예요. 그 때의 궁핍함이 오히려 나를 일어서게 한 거죠. 넋 놓고 울고 있다 보니, 세상에 울고 있는 또 다른 것들이 보이더군요. 모진 바람에 누웠다 일어섰다 반복하는 갈꽃 같은 것 말이에요. 예쁘고 잘난 것들이 아닌 그것과 소통하기 시작했죠.”
감수성 풍부한 소년은 상처에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10대 때 시를 쓰기 시작하면서 그의 아픔은 문학이라는 꽃을 피워냅니다.
'내 문학의 기반은 나의 어린 시절 이야기예요. 넋 놓고 울고 있다 보니, 세상에 울고 있는 또 다른 것들이 보이더군요. 예쁘고 잘난 것들이 아닌 그것과 소통하기 시작했죠.'
두 번째 작가의 물건‘현장 기록만이 답’ 아날로그 사진 필름
"좋은 글과 기록은 뗄 수 없는 관계예요.
나는 보부상의 행적을 찾아 발이 부르트도록 걸어 다니며 언어를 채집했지요. 내 소설에 맞는 토속적인 말을 따기 위해 고성능 녹음기를 늘 갖고 다녔어요.지금도 오지에서는 쓰이는 말들이죠."
여느 작가들의 책상에는 없는 물건이 보입니다. 사진 촬영에 관련된 전문 도구인데요. 아날로그 카메라 필름이 기계 위에 놓여 있습니다. 기계의 조명을 켜자 재래시장의 모습이 필름에 드러납니다.
작가는 사진 전문가로도 유명합니다. 1980년대 ‘객주’를 쓰면서 자료 고증을 위해 시작한 사진이 지금은 베테랑 수준입니다. 무거운 카메라를 들고 전국 곳곳은 물론, 아프리카 및 동남아 오지, 북한까지 다녀왔습니다. 그 기록물들은 수 십 권의 앨범으로 정리돼 그의 방 한 켠을 채우고 있었습니다.
“좋은 글과 기록은 뗄 수 없는 관계예요. 나는 보부상의 행적을 찾아 발이 부르트도록 걸어 다니며 언어를 채집했지요. 내 소설에 맞는 토속적인 말을 따기 위해 고성능 녹음기를 늘 갖고 다녔어요. 지금도 오지에서는 쓰이는 말들이죠.”
아나로그 필름
그의 소설 속 경상도 토박이 말을 어려워하는 독자들도 있습니다. 이에 대해 작가는 “국어사전에서 찾으면 다 나오는 말들”이라고 답합니다. 현장에서 채집한 말이라도 사전에 나오지 않으면 안 쓴다고 합니다. 향토적 정서가 춤을 추는 듯 역동적인 문체를 구사하는 그는 일부 문학에 대해 쓴 소리를 던졌습니다.

“어떤 소설은 꼭 논문 같아요. 드라이(dry) 하다는 거지. 살아있는 글은 맛이 있고 온기, 습기도 있어요. 소설은 그것이 지향하는 정서에 맞게 ‘축축해야’ 해요. 향수가 아닌 땀 냄새가 나야죠. 때론 고린내가 나거나 질퍽하고, 다양한 감정을 껴안을 수 있어야 독자들의 마음에 와 닿는 거죠.”

그의 작품도 이와 비슷합니다. ‘고기잡이는 갈대를 꺾지 않는다’는 눈물 범벅이었던 유년 시절의 기억이지만 이웃들과 함께한 기쁨과 웃음이 돋보입니다. 슬픈 일만 많았을 것 같은 그가 어떻게 재치와 유머를 갖게 되었을까요.
“어릴 땐 늘 우울한 감정에 매몰되어 있었죠. 그러니 사물을 늘 삐딱하게 보는 ‘사시’로 자랐어요. 그 때문에 세상을 올바르게 보지 못한다는 걸 알게 됐어요. 사람이 성숙하려면 긍정도 웃음도 있어야 하는데 난 그게 없어 스스로 외톨이가 된 거죠. 그래서 20대 이후 마음을 고쳐먹었어요. ‘세상의 밝은 면을 보고 내 시선을 바로 잡자’고.”
편견을 고치면서 세상을 보는 시야가 넓어졌다는 고백이었습니다. 훗날 그가 카메라를 잡은 이유는 기록뿐이 아니라 ‘구도를 바로 잡는 일’의 연장이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떤 소설은 꼭 논문 같아요. 드라이(dry) 하다는 거지. 살아있는 글은 맛이 있고 온기, 습기도 있어요. 소설은 그것이 지향하는 정서에 맞게 ‘축축해야’ 해요. 때론 고린내가 나거나 질퍽하고, 다양한 감정을 껴안을 수 있어야 독자들의 마음에 와 닿는 거죠.'
세 번째 작가의 물건영원한 안식을 맞이한 망자(亡者)의 그림
"액자 뒤엔 1943이라고 쓰인 걸 보니 그 때 그려진 모양이에요. 앞에는 화가의 서명도 있고요. 좀 무서울지 모르지만 나에게 위안이 되는 그림이에요. 나도 언젠가는 죽어 없어질 존재인데, 이 그림을 보면 그에 대한 두려움에서 잠시 벗어날 수 있거든요."
작가가 ‘가장 아끼는 그림’이라며 목탄화를 들어 보였습니다. 30여 년 전 유럽의 한 벼룩시장에서 샀다는데요. 이 그림도 독특합니다. 스스로 목을 매단 망자(亡者)를 그렸는데, 죽은 자의 표정은 평온합니다.
“이것도 참 희귀한 그림이죠? 액자 뒤엔 1943이라고 쓰인 걸 보니 그 때 그려진 모양이에요. 앞에는 화가의 서명도 있고요. 좀 무서울지 모르지만 나에게 위안이 되는 그림이에요. 나도 언젠가는 죽어 없어질 존재인데, 이 그림을 보면 그에 대한 두려움에서 잠시 벗어날 수 있거든요.”
망자의 그림
‘사라짐’은 늘 그의 작품 속 화두였습니다. ‘홍어’는 가족의 부재(不在)를 중심으로 씌어졌습니다. 아버지, 삼례, 어머니가 차례로 사라지며 홀연히 각자의 길을 떠납니다.

작가는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애착이 누구보다 큰 사람입니다. 현대 문학에서 사라져간 옛말을 부활시킨 노력을 봐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객주’는 작가 자신의 ‘발과 땀으로 만들었다’고 말할 만큼 철저한 조사와 고증을 거쳤습니다. 역사책에 언급되지 않은 민초들, 상인들의 이야기가 그대로 사라지면 안 되겠다는 위기 의식 때문이었죠.

그의 나이는 올해 일흔 여섯. 인생의 말년이라고 볼 수 있는 나이에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작업이 또 있습니다. 그의 고향 청송에 들어선 객주문학관입니다. 약 8천 평의 대지에 세운 이 시설은 오는 6월 정식으로 문을 엽니다.
“내가 알기론 전국에 있는 문학관 중 규모가 가장 커요. 폐교된 중학교 건물로 강당, 운동장, 숙소가 다 있어서 숙식도 가능합니다. 인문학과 생태 체험이 어우러진 복합 문화시설로 운영할 계획이에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문학가의 예술세계도 맛보고, 바로 옆 장터 길도 체험하며 역사와 환경에 대한 소중함을 깨닫는 교육의 장이 될 겁니다.”
넉넉지 않았던 유년기, 작가가 되지 못해 방황했던 청년기를 겪었던 그에게 마지막으로 젊은이들에게 던지는 조언을 물었습니다.
“고난에 고개 숙이지 마세요. 그리고 스스로 개척해서 일어설 때까지 남에게 아부하지 마세요. 나는 어려운 시절 높은 사람에게 아부하지 않았고 지금도 교만하지 않으려 노력합니다. 세상이 만만치 않지만 올곧게 살아가는 힘만은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상처도 언젠가 꽃이 되겠지요.”
'고난에 고개 숙이지 마세요. 그리고 스스로 개척해서 일어설 때까지 남에게 아부하지 마세요. 세상이 만만치 않지만 올곧게 살아가는 힘만은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상처도 언젠가 꽃이 되겠지요.'
가난했던 시골 소년에서 한국 문학계의 대표 작가로 우뚝 선 김주영 소설가. 자신의 객주문학관에 대해 말할 때는 유난히 해맑게 웃었습니다. 30년 만에 이룬 전집 완성, 그것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꿈의 시작이었습니다.
에필로그
소설가 김주영은 소문난 애주가입니다.
“담배는 끊어도 술은 못 끊겠다”고 할 정도로 술자리의 즐거운 분위기를 좋아한답니다. “내가 내 소설처럼 마냥 진지할 것 같나요?
술 모임에선 ’구라(거짓말)’도 잘 치고 사람들도
많이 웃겨요.“(웃음) 그가 살짝 처진 눈을 찡긋 감으며 배시시 웃었습니다.
“젊은 시절엔 이런 일도 있었죠.
문학 행사 때문에 파리에 갔는데 안주도 없이 양주를 얼마나 먹었는지, 술에 취해 아무 택시나 잡아타고 ‘요금 2배 줄 테니까 잠실 가자’고 했다니까요. 운전사가 얼마나 황당해 했을지…”(웃음)
내가 내 소설처럼 마냥 진지할 것 같나요? 술 모임에선 구라도 잘 치고 사람들도 많이 웃겨요.
김지현(디지틀조선일보 기자)
사진
이강훈(다큐멘터리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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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4-02-24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