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상(冊床) : [명사] 앉아서 책을 읽거나 글을 쓰거나 사무를 보거나 할 때에 앞에 놓고 쓰는 상.
문학평론가에서 시대와 문명에 대한 비평까지 예술과 인문학, 아날로그와 디지털, 생명과 자본의 경계를 아우르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석학이자 인문학자인 이어령 교수의 책상을 살펴봅니다. 가족을 잃은 아픔, 병상의 시련마저 넘어선 고학자의 창작열을 그의 공간에서 함께 느껴보세요.
‘생명’의 화두(話頭)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말의 해’가 시작됐습니다. 힘차게 달리는 말은 역동성, 생명의 상징이지요. 때로 눈을 가리고 달리는 말은 한계와 두려움을 모르고 먼 곳까지 힘차게 내달립니다.
80대의 나이에도 여전히 활기찬 생명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시대의 대표 인문학자인 이어령 전 이화여대 교수입니다. 그는 학자, 문화비평가, 전 문화부 장관 등으로 왕성하게 활약하면서 ‘사람이 무엇인가’에 대한 화두를 놓지 않았는데요. 최근 ‘생명이 자본이다’ (마로니에북스)로 삶을 이야기한 그를 만났습니다.
“21세기는 생명을 품은 여성의 시대”
그는 서울 평창동 영인문학관에 삽니다. 방 안에는 나무 향기가 그윽한데요. 유리창으로 햇빛이 쏟아지는 가운데 병풍 같은 나무문이 거대한 서재를 열어놓고 있었습니다. 조각, 그림, 장식품으로 가득 찬 서재는 마치 미술관 같았습니다.
수 많은 조각 가운데, 그는 어머니가 자식을 따뜻하게 안고 있는 하얀 조각상을 제일 먼저 가리킵니다.
첫 번째 작가의 물건 l 생명을 품은 어머니… 조각가 유영교의 모자상(母子像)
"21세기는 여성의 시대입니다.
여성이 어떤 존재인가요? 생명을 품은 어머니예요.
‘살림살이’라는 말이 있지요. 집안의 쓸모 없는 것들을 쓸모 있게 만들어 가족에게 생(生)을 불어넣는 것이 살림살이입니다.
그래서 이 조각은 나에게 특별하지요."
△ 故 유영교 작가의 모자상
모자상은 고(故) 유영교 조각가의 작품입니다. 생전에 이 교수와 친했던 고인은 가족의 사랑을 묘사한 흰 대리석 작품으로 유명합니다. 작품 속 모자가 닮은 얼굴로 웃고 있습니다. 교수도 빙그레 미소를 짓습니다.
어머니에 대한 교수의 애정은 작품 활동 곳곳에서 드러나는데요. 2010년엔 ‘어머니를 위한 여섯 가지 은유’ 라는 책을 내기도 했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돌아가신 그의 어머니는 작고하기 전 아들에게 줄 귤을 병실에 남겨 놨다는 안타까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지금도 귤을 보면 가슴 시리게 어머니가 생각나지요. 어머니 제사상에는 꼭 귤을 놓고요.” 그의 얼굴에 옅은 회한이 비쳤습니다.
이번 책에도 그는 어머니를 향한 시를 썼습니다.
”참새는 추운 밤에 어디서 자지?”
당신의 증손자가 물으면 어머니가 내게 하신 말씀처럼 “얘야! 그렇게 묻는 네 가슴속에서 잠을 잔단다.” 대답하렵니다.
어머니 이것이 천년의 추위에도 떨지 않는 사람들의 생, 사랑의 양식/어머니의 겨울 이야기입니다. <생명이 자본이다/생명의 시 - 추위에 바치는 노래> 中
생명의 상징으로 그는 ‘금붕어’를 꼽습니다. 이야기는 50년 전 그의 단칸방 신혼생활로 거슬러 올라가는데요. 유난히 추웠던 겨울날, 키우고 있던 금붕어 세 마리가 얼음 속에 갇혀 버렸습니다. ‘어떻게든 금붕어를 살려야겠다’는 간절한 마음에 그와 부인은 어항에 더운 물을 부었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천천히 얼음이 녹는가 싶더니 금붕어가 부챗살 같은 꼬리를 꿈틀거렸습니다. 화석처럼 박혀 버릴 줄 알았던 금붕어는 다시 힘을 내 헤엄쳤습니다. 이 때 그는 깨닫습니다. “내가 금붕어를 사랑하기 때문에 이 녀석들의 생명을 구한 거구나.”
은은한 조명이 빛나는 창조의 공간
서재 옆 집필실은 또 다른 창조의 공간인데요. 환한 햇살이 들어오는 서재와 달리 집필실에는 조명이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평생 왕성하게 활동한 그의 집중력이 느껴졌습니다.
두 번째 작가의 물건 l 쉼 없이 희망의 문장을 토했다… 손 조각상
60여 년간 수많은 상을 받아온 그의 방에는 ‘트로피’가 없습니다. 대신 펜을 쥐고 있는 그의 손과 꼭 닮은 조각이 눈에 들어옵니다. 조각상 밑에 새겨진 문구는 그가 지었습니다.
△ 이어령 교수의 손을 석고로 떠서 똑같이 만든 저술 50주년 기념 손 조각상
1956년 ‘우상의 파괴’로 등단한 교수는 지금까지 200여 권의 저서를 냈습니다. ‘축소지향의 일본인’, ‘디지로그’, ‘지성에서 영성으로’ 등 쉼 없이 저술 활동을 해 왔는데요. 두 시간의 인터뷰 동안 이야기를 그야말로 ‘토해’낼 만큼 지금도 할 말이 많았습니다. 다작(多作)의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요?
그 원동력은 모국어에 대한 갈망에서 출발했습니다. 그가 초등학교를 다니던 1940년대는 교육에서 조선어가 금지된 때였는데요. 심지어 ‘아이쿠머니!’라고 외치는 것도 ‘아이쿠’와 ‘어머니’가 합쳐졌다는 이유로 금기시될 정도였답니다. 어린 이어령은 우리말에 대한 애착과 지적 호기심으로 늘 목이 마른 아이였습니다.
세 번째 작가의 물건 l 팔순의 청춘, 디지털로 아날로그를 품다
그의 집필실은 단순히 ‘글만 쓰는 곳’이 아닙니다.
지식과 창조력이 융합되는 공간입니다.
컴퓨터 데스크톱 6대와 스마트폰, 태블릿PC,갤럭시 기어, 전자책 기기 등 10여 종이 넘는 최신 디지털 기기가 가득합니다.
△ 각종 디지털 기기로 가득한 이어령 교수의 책상
80대 노학자의 스마트 기기 다루는 솜씨는 아주 능숙합니다. 전자책 하나 제대로 볼 줄 모르는 기자가 부끄러워질 정도였지요.
“사용법? 어렵지 않아요. 수만 권 책 분량의 정보를 자유자재로 저장하고 쓸 수 있으니 얼마나 편해요. 디지털이 발전했지만 아직 완벽하게 융합이 안 됐어요. 그럴 땐 아날로그 식으로 인쇄해서 보죠.”
지난해 12월에 열린 그의 팔순 잔치도 ‘융합의 장’이었습니다. 초대 문화부 장관, 88 올림픽과 2002 한일월드컵 기획 등 문화계 주요 분야를 두루 거친 그는 사회 각 분야의 사람들을 한자리에 모았습니다.
교수는 사회가 분리한 두 개념을 섞어 왔습니다.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융합한 ‘디지로그’로 디지털 만능주의를 비판했고, ‘생명이 자본이다’로 시장경제 체제에 사랑, 생명의 개념을 합쳤습니다. 대립한 것의 합일을 이뤄내는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요?
마지막으로 2014년 새해를 맞아 이어령 교수의 신년 메시지는 무엇인지 물어보았습니다.
“말띠 해인만큼 질주하는 말의 기상을 닮아가길 바랍니다. 지금은 말이 경마와 같은 자본주의의 도구로 쓰이고 있지만 그것에 함몰되면 안 되죠. 그리고 패권주의가 아닌 순환주의의 아시아가 되어야 합니다. 한ㆍ중ㆍ일은 반도ㆍ대륙ㆍ해양인데 각기 다르니 가위 바위 보에 비유할 수 있죠. 싸움의 승자도 패자도 없는 평화의 시대,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는 시대가 오리라 믿습니다.”
여든 둘의 지성은 나이를 잊은 듯 보였습니다.
인터뷰 내내 “아직도 할 일이 많다”며 생명에 대해 끝없이 이야기했지요. 바쁜 일상을 사는 그에게 가장 행복한 순간이 언제인지 물었습니다.
“내 행복과 괴로움은 같은 데서 출발해요.
바로 글 쓸 때지요. 힘든 과정을 거쳐 글이 세상에 나왔을 때는 말할 수 없이 행복해요.
하지만 원고 마감이 임박했을 땐 고민스럽죠.
그나마 도망간다고 찾는 곳이 화장실인데… (웃음)”
- 글
- 김지현(디지틀조선일보 기자)
- 사진
- 이강훈(다큐멘터리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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