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상(冊床) : [명사] 앉아서 책을 읽거나 글을 쓰거나 사무를 보거나 할 때에 앞에 놓고 쓰는 상.
어린이에겐 책상은 놀이 공간, 학생에겐 공부하며 미래의 꿈을 키우는 곳이죠. 작가에겐 더욱 특별한 장소가 됩니다. 작가는 자신의 체험과 생각, 상상력을 텍스트로 세상에 내놓는 존재죠. 책상은 작가의 가치관이나 상상력이 돌아다니는 놀이터이자, 독자들과 만날 준비를 하는 태초의 장소인 셈입니다. 책상 위에 있는 책이나 연필과 액자 등 소품들은 작가의 세계관을 보여주는, 꽁꽁 감춰 놓은 창작의 비밀을 알려줄 단서가 될 수 있겠죠. ‘작가의 책상’에선 멋진 작품이 태어나는 태초의 공간, 상상력과 창작이 노니는 작가의 책상을 통해 우리 시대 작가들의 삶과 가치관을 들여다보고자 합니다.
감춰진 역사가 찬란한 내일로 바뀌는 공간
소설가 김진명의 책상
가을 하늘이 무척이나 높고 파란 날, 서울을 빠져나와 2시간쯤 달려 충청북도 제천에 도착했습니다. 역사소설가 김진명 작가와 그의 책상을 마주하기 위해서입니다.
소설가 김진명 작가는1993년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로 데뷔, 《황태자비 납치사건》 《가즈오의 나라》 《몽유도원》와 최근 《천 년의 금서》 《고구려》 까지 그간 발표한 책의 누적판매 부수가 1,300만 부에 달하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역사소설가입니다. 그가 전 세대를 아울려 큰 사랑을 받아온 이유는 역사와 현실을 넘나드는 소재로 한민족의 자긍심과 역사 속 인간의 가치에 대해 이야기해왔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제천으로 향하는 마음은 가을 날씨만큼 쾌청하지 않았습니다. 역사를 다루는 소설가의 책상은 작품에 관련한 지식, 그리고 역사에 대한 고민, 문제의식을 그대로 짊어지고 있을 것이기에 어려운 문제집의 첫 장을 펼쳐야 하는 기분이었습니다.
역사를 다루는 소설가의 책상 어려운 역사 문제집을 펼치는 기분
서재 문을 여는 순간 제 걱정은 기우로 드러났습니다. 책상 위에 어려운 문제집 대신 눈 부신 햇살이 가득했습니다. 복잡한 자료도, 두꺼운 책도 없이 책상 위는 단출했습니다. 그러나 벽이 아닌 넓은 창을 마주한 책상의 배치는 특별했습니다. 책상 위는 깨끗했지만, 책상 앞에 앉으면 눈 앞으로 우뚝 솟은 용두산이 펼쳐졌고, 아래로는 사람들의 삶과 맞닿아 있었습니다.
“사료(史料)가 가득할 것 같은데 심심할 만큼 깨끗한 역사소설가의 책상”
첫 번째 물건 ㅣ 광개토대왕비 모형
"이 모형은 <가즈오의 나라>를 쓸 때
중국으로 취재를 갔다가 산 거에요. "
심심하다 할만큼 단순한 책상 위에, 눈에 띄는 물건이 하나 있습니다. 고구려 광개토대왕비 모형입니다. “이 모형은 《가즈오의 나라》를 쓸 때 중국으로 취재를 갔다가 산 거에요. 글을 쓸 때 필요한 자료는 머릿 속에 다 넣어 놓기 때문에 책상 위에 자료를 올려놓거나 하진 않아요. 하지만 광개토대왕비 만큼은 자주 보기 위해 책상 위에 올려놓았죠.”
그의 현재고민이 무엇인지를 엿볼 수 있는 소품이었습니다. 그는 현재 집필중인 《고구려》외에도 《가즈오의 나라》에서도 고구려 역사를 담았습니다. 고구려 광개토대왕비는 작가에게 떼려야 뗄 수 없는 소재일 것입니다. 그는 사실 고구려뿐 아니라 대한민국 국호의 생성과정, 명성황후 시해 사건의 실체, 일본의 한반도 침략 등 대한민국의 모든 역사에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왜 역사소설이라는 장르에 깊이 마음을 둔 건지 궁금했습니다.
“소설은 인류가 발명한 위대한 장치입니다. 작가는 마음껏 상상력을 펼치며 감춰진 진실을 이야기 할 수 있죠. 제가 역사 소설을 통해 말하고 싶은 것이 바로 이런 진실입니다. 현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가치를 역사를 통해 찾아가는 거죠. 역사는 ‘세상을 보는 시작’입니다. 역사소설을 통해 말하고 싶은 건 이 시대의 질서와 가치, 가치 있는 인간에 대한 이야기죠. 역사적으로 보면 가치 있는 사람은 돈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어요. 가치를 만드는 사람들이었죠. 꿈은 깨지기 마련이고 실패는 인간의 본질인데, 오늘날의 현실은 돈 많은 이들이나 성공한 사람이 아름답다고 포장을 하고 있어요.”
그는 역사 소설을 통해서 인간의 삶과 진정성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다고 강조했습니다. 역사 소설이지만 근본적인 주제는 ‘어떤 인생을 살 것인가?’ ‘성숙한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의식을 담고 있습니다. 작가의 역사소설이 역동적이고 힘이 있으며 다양한 문제의식을 담고 있는 이유입니다.
“작가로서 제 장점은 세상을 읽는 힘이라고 생각해요. 사회를 읽는 야수적인 본능이 있죠. 역사소설 장르를 통해 오늘날의 현실을, 감춰진 강자의 이야기를 마음껏 할 수 있어요. 많은 분이 제 소설을 읽는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 물건 ㅣ 경계가 없는 책들
"지금의 나를 만든 건 책이에요.
어렸을 때부터 가리지 않고 책을 읽었죠."
작가의 책상 오른쪽 벽은 책으로 가득합니다. 책들은 글 쓰는 데 필요한 역사서나 사료가 대부분일 거라고 예상했지만 의외였습니다. 해리포터, 안중근 의사 일대기, 과학 서적, 로맨스 소설, 철학과 사상서 등 다양한 장르의 책들이 꽂혀있습니다.
작가가 되기 전 그의 삶은 다소 엉뚱해 보였습니다. 책을 통해 세상과 자신을 마주하게 된 그는 취업대신 다른 이의 시선을 이기는 법을 연습을 했습니다. 직장을 다니지 않으니 가난과 궁핍이 따라 올 터. 미리 낡은 옷을 입고, 구멍 난 파라솔을 쓰고 다니며 앞으로 다가올 ‘가난과 궁핍’ 그로 인한 사람들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 대비했다고 합니다.
그림을 바라보던 시인의 시선이 모니터의 우측 아래로 향합니다.
시인은 살포시 웃습니다. 그 미소 끝은 새 모양의 돌조각과 청동으로 만든 당나귀 조각이 닿아 있습니다.
책을 통해 인간이 얼마나 작은 존재라는 걸 배웠고, 세상에 대해서도 배웠죠. 그때 깨달았습니다. 조직생활이나 타협, 적당한 거짓말을 못하는 나는 취업을 할 수 없겠구나. 그렇다면 가난하게 살겠구나 하고요.”
그에 예상대로 그의 삶은 ‘취업’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읽은 책은 그의 삶은 풍성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결과가 바로 36세에 발표한 첫 소설집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입니다.
“첫 책을 쓰기 전까지만 해도 소설을 쓰겠다는 생각도, 단 한 번도 습작을 해보지도 않았어요. 책을 읽으며 인간의 본질, 삶의 자세를 고민하며 자연스럽게 소설을 쓰게 된 거죠. 지금 쓰는 소설도 그때 읽었던 독서가 큰 원동력이 되고 있어요. 그래서 전 독서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책은 사람을 가난에 머무르게 하지 않죠. 책은 사람에게 의식이 열리도록 돕고, 세상을 제대로 바라보게 만들어요. 그리고 창의적인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돕죠.”
책상 주변을 살피던 눈길이 책상 위 노트북으로 향합니다. 묵직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 노트북. 작가가 현재 작업중인 《고구려》의 새 원고가 들어 있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아니요. 지금 노트북 속에 있는 건 《고구려》가 아니에요. 다른 작업을 하고 있어요” 라고 허허 웃었습니다.
그의 노트북은 《황태자비 납치사건》의 중국 버전을 품고 있었습니다. 2002년 세상에 나온 《황태자비 납치사건》은 일본의 새 역사교과서 편찬을 둘러싼 역사왜곡과 일제의 침탈에 대해 그린 책입니다.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관련해 진실을 밝히기 위해 일본의 황태자비를 납치한다는 내용입니다.
“한국과 중국은 역사적으로 같은 상흔을 갖고 있어요. 명성왕후의 시해나 난징 학살, 독도 문제와 센가쿠 섬 같은 문제. 그런데 일본은 그 모든 걸 부정하고 있고요. 제대로 인정하고 반성해야 합니다. 역사란 은폐한다고 덮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부끄러운 것은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부인하는 것이죠. 제대로 반성을 해야 오늘을 사는 사람들이 바른 내일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 바람은 제가 앞으로도 꾸준히 역사소설을 써야 하는 이유기도 하고요.”
세 번째 물건 ㅣ 노트북
"지금 노트북 속에 있는 건
중국판 소설입니다."
중국어 판은 주인공이 한국인이 아닌 중국인이라고 합니다. 그가 굳이 이 책의 중국어 판을 쓰는 이유는 ‘한국과 중국은 일본의 제국주의 때문에 생긴 역사적 상처가 있다’는 공통점에 주목했기 때문입니다. 일본국은 1938년 중국 난징에서 집단 학살과 강간을 자행, 30만명의 사상자를 낸 것으로 알려집니다.
작가를 만나기 전 인터넷으로 검색을 하며 “조금은 엄한 분이실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공개된 사진 대부분이 잔뜩 심각한 표정, 뭔가를 꿰뚫을 것 같은 눈빛이었기 때문입니다.
인터뷰를 가기 전 미션으로 “김진명 작가의 웃는 얼굴을 담아 보자”를 정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미션이 무색할 정도로 따뜻한 미소를 짓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마도 지금까지 검색했던 사진은 역사소설이라는 진지한 장르에 어울릴 법한 사진을 실은 게 아닐까 싶습니다.
완벽해 보이는 작가에게도 아쉬움은 있다고 합니다.
바로 연애소설 입니다.
“나는 연애소설을 잘 못써요. 제대로 써 보고 싶은데 그게 안돼요.
내 인생의 가장 큰 좌절은 연애 소설인 거 같아요”라며 웃습니다.
연애소설은 잘 못쓸 지 몰라도 연애만큼은 멋지게 해내신 듯 합니다.
작가 옆에는 소녀처럼 사랑스러운 부인이 계십니다.
“대학에 들어간 후 (법)학과 공부는 안하고 책에만 파묻혀 살았어요.
연애 한번 못해 봤었죠. 세상에 모든 책은 다 읽었다 생각 했을 때 연애를 하고 싶은 마음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학교(한국외대) 교문에 며칠 동안 앉아 있었어요. 책 속에는 늘 답이 있죠. 관상이나 역학에 관한 책을 많이 봤기 때문에 한 눈에 (아내를) 알아 봤어요. 지금 생각해도 최고의 선택이죠.
제 아내는 정말이지 성인(聖人)이거든요.”
- 글
- 문미영(동화작가·기자)
- 사진
- 김은경(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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