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책상

고독을 예술로 꽃피우는 시인 - 문정희 시인

작가의 책상 문정희 시인 편
책상(冊床) : [명사] 앉아서 책을 읽거나 글을 쓰거나 사무를 보거나 할 때에 앞에 놓고 쓰는 상.
어린이에겐 책상은 놀이 공간, 학생에겐 공부하며 미래의 꿈을 키우는 곳이죠. 작가에겐 더욱 특별한 장소가 됩니다. 작가는 자신의 체험과 생각, 상상력을 텍스트로 세상에 내놓는 존재죠. 책상은 작가의 가치관이나 상상력이 돌아다니는 놀이터이자, 독자들과 만날 준비를 하는 태초의 장소인 셈입니다. 책상 위에 있는 책이나 연필과 액자 등 소품들은 작가의 세계관을 보여주는, 꽁꽁 감춰 놓은 창작의 비밀을 알려줄 단서가 될 수 있겠죠. ‘작가의 책상’에선 멋진 작품이 태어나는 태초의 공간, 상상력과 창작이 노니는 작가의 책상을 통해 우리 시대 작가들의 삶과 가치관을 들여다보고자 합니다.
고독을 예술로 꽃피우는 곳
시인 문정희의 책상
시인은 몸은 고독하고 정신은 자유로워야 된다고 생각해요. 그 과정에서 시가 탄생하는 거죠.
문정희 시인을 만나기 위해 서울 장충동 현대문학관을 찾았습니다. 햇살로 가득 찬 작업실에 앉아 시인을 기다리는데 창 밖에서 낯익은 소리가 들립니다. ‘매앰~ 매앰~’ 매미 울음소리. 그러고 보니 문정희 시인은 매미와 인연이 있습니다. 2010년 스웨덴 시카다상, 일명 매미상을 받으며 주목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시카다상은 스웨덴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해리 마르틴손 탄생 100주년에 제정된 세계적 권위의 문학상입니다.
비단 매미상이 아니더라도 시인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여류 시인입니다. 시인은 진명여고 시절 20여 개 문학상을 받으며 고교생 신분으로 유일하게 시집 《꽃숨》을 발표했습니다. 1969년 《월간문학》으로 등단 한 후 《오라, 거짓 사랑아》 《양귀비꽃 머리에 꽂고》 《다산의 처녀》 등 시집과 《지금 장미를 따라》 《문학의 도끼로 내 삶을 깨워라》등 다수의 산문집을 내며 현대문학상, 소월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육사문학상 등을 수상했습니다. ‘콩’ ‘물의 처녀’ ‘머리를 감는 여자’ 등 대표작을 통해 여성의 삶, 갈등, 생명력을 경쾌하고 정열적인 시어로 그려내며 45년 동안 독자들과 소통하고 있습니다.
문정희 시인의 책상에는 과연 어떤 물건들이 있을까요?
문정희 시인의 책상
문정희 시인 책상의 첫인상은 “소박하다”입니다. 컴퓨터와 최근 읽고 있는 책들이 어지러이 놓여 있는 책상은 주인의 명성과는 달리 평범합니다. 하지만 조금 더 세밀하게 주변을 살피니 이내 이색적인 소품이 눈에 들어옵니다.
첫 번째 물건 어둠과 싸우는 여인
첫 번째 물건 어둠과 싸우는 여인

한 여인이 방패와 칼을 들며 무언가와 싸우는 그림 입니다. 김원숙 화백이 문정희 시인을 생각하며 그린 이 그림은 시인이 항상 곁에 두는 소품입니다.

그림 뒤에는 ‘fighting the darkness’(어둠과 싸우는 여인)라는 글이 쓰여 있습니다. 그림 속의 여인과 그림의 제목이 문정희 시인과 꼭 닮았습니다.
“이 그림은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김원숙 화백이 그려준 거예요.
그림 속 인물이 나와 닮았다고요? 외모가 비슷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제가 가진 면면이 그림 속 여인과 닮았어요. 저는 지금껏 살아오며 매번 통로가 막힌 상태, 즉 아포리아(그리스어 벽)를 만나곤 했어요. 그 벽을 넘어서며 싸우는 과정에서 제 시가 탄생했죠. 그림 속 여인처럼 저도 어둠과 전쟁을 하고 있네요.”
시인은 자신의 삶을 투쟁의 연속이었다고 말합니다. 가장 치열했던 투쟁은 뉴욕 유학입니다. 시인은 32세에 뉴욕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5대 독자 장손과 결혼해 두 아이를 둔 새댁, 1970년대 후반이라는 시대적 배경을 생각하면 분명 쉽지 않은 결정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남편이 힘은 돼 주었지만, 다른 사람이 보기엔 제정신이 아닌 걸로 보였죠. 하지만 제겐 계기가 필요했어요. 아내, 엄마가 아닌 나 자신으로 서는 시간요. 힘들게 뉴욕으로 떠난 후에도 고생이 말도 못했죠. 뉴욕은 정말이지 엄청난 벽이었어요. 동양에서 온 나이 많은 여자 유학생. 게다가 영어도 못했고 초반엔 전공도 맞지 않았죠. 가난했고요. 결국 전공을 바꿨는데 논문을 못 써 졸업은 못했죠. 그때는 눈물을 달고 살았어요. 당시에 나를 제약하는 모든 상황이 어둠이었죠. 지금은 그때 거닐던 뉴욕의 뒷골목이 그리워요. 힘든 결정이었지만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선물을 받았죠.”
투쟁이 치열했던 만큼 결과물은 달콤했습니다. 졸업장을 받지는 못했지만 유학 후 <사랑에 그물을 던지리라>라는 수필집을 세상에 내놓았습니다. 수필집에 담긴 30대 여성의 사랑과 방황, 좌절과 성장은 30년이 지난 오늘도 독자들과 소통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시인은 유학을 통해 넓은 세계를 바라보는 안목을 선물 받았습니다. 시인이 세계 독자들과 소통할 수 있었던 기반을 뉴욕 유학에서 닦은 셈입니다.
문정희 시인의 책상
지금도 시인은 명성과 안락함이 보장된 한국 작업실을 떠나 혈혈단신으로 해외 창작촌의 가난한 시인으로 돌아갑니다. 고희를 바라보는 45년 차 시인의 에너지는 대단합니다.
“낯선 환경에 머무는 건, 반복한다고 해서 익숙해지는 건 아닌 것 같아요. 가족 생각에 힘들고, 외로움이나 문화적인 차이 등 다양한 문제 때문에 좌절하죠. 건강이 안 좋아 고생할 때도 있었죠. 2년 전에는 베네치아로 3개월 간 머물며 박사학위를 준비했어요. 그때도 문화나 환경 때문에 고생했는데 그 과정이 결국 예술적인 자극이, 소중한 양분이 됐죠.”
제가 걸어온 길엔 항상 보이지 않는 유리 벽이 있었어요. 쉬운 길이나 쉬운 선택은 없었죠.
두 번째 물건 올빼미와 당나귀
두 번째 물건 올빼미와 당나귀

그림을 바라보던 시인의 시선이 모니터의 우측 아래로 향합니다.
시인은 살포시 웃습니다. 그 미소 끝은 새 모양의 돌조각과 청동으로 만든 당나귀 조각이 닿아 있습니다.

“시를 열심히 쓰라고 말을 걸어주는 아이들이에요. 귀엽죠?”

시인의 시엔 유달리 유쾌하고 재미있는 시어들이 많습니다. 책상을 들여다보니 그 이유를 알 듯 합니다.

미네르바 박물관에서 구입한 새 모양의 조각은 ‘문학의 신’인 올빼미를 연상시켜서 충동 구매한 것이라고 합니다. 시인은 올빼미를 바라보며 환한 미소를 짓습니다.
“지치지 않고 열심히 쓰기 위해, 늘 가까이 두고 작업하고 있어요. 언젠가는 정말 문학의 신이 될 수도 있지 않겠어요?”
올빼미 옆에 자리한 당나귀 조각은 지난 3월 프랑스 시 축제를 방문했을 때 벼룩시장에서 샀다고 합니다. 시인은 자신의 몸짓만한 짐 두 개를 짊어지고 있는 당나귀를 애틋하게 바라봅니다.
“이른 아침 산책을 나왔다가 이 조각을 발견했어요. 보자마자 왠지 뭉클했어요. 당나귀 등에 있는 두 개의 빈 짐에 각각 ‘인생’과 ‘시’의 무게가 느껴졌거든요. 인생과 시에 대한 책임감이 느껴졌어요. 짐을 묵묵히 이고 가는 당나귀의 모습이 마치 삶과 시의 무게를 어깨에 이고 가는 제 모습 같았죠. 지금도 볼 때마다 마음이 찡 해요.”
당나귀 조각은 시인에게 많은 질문을 던져주는 중요한 모티브가 되었습니다. 삶과 시에 대해, 그리고 묵묵히 걸어가는 삶에 대해 생각하고 고민하고 됐다고 합니다.
문정희 시인과 그녀의 책상
“저는 굉장히 열정적이고 호기심이 많아요. 보헤미안 적인 자유로움이 있고, 때론 아나키스트적(억압의 힘을 부정하는 것)인 모습도 있죠. 유량기질이라고 하나? 시 쓰기엔 굉장히 힘든 기질이 있죠. 시인은 몸은 고독하고 정신은 자유로워야 된다고 생각해요. 그 과정에서 시가 탄생하는 거죠.”
“예전엔 나를 찾기 위해, 시를 쓰기 위해 밖으로 나갔어요. 하지만 지금부터는 안으로, 더 안으로 들어가려고요. 은자가 될 생각이에요. 의자에 궁둥이를 붙이고 앉아서 조용히 내면과 마주하려고요. 인생과 시, 내 어깨 위에 있는 두 짐을 확실히 책임질 수 있는 시인이 되고 싶어요.”
고독을 창작의 원료로 쓰고 있다던 시인. 그 책상 위에는 차별, 한계라는 어둠과 당당하게 싸우는 격투사가 있었고, 삶의 깊이를 고민하게 해주는 올빼미와 당나귀가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삶과 시가 주는 무게를 즐겁게 짊어지는 사람. 시인 문정희가 있었습니다.
에필로그
인터뷰를 마칠 시간, 선물로 들고 간 더치 커피를 보고는 “이 커피, 정말 좋아해요”라며 뛸 듯이 기뻐합니다. 알고 보니 커피는 시인에게 ‘천국의 끝자락’을 보여준 특별한 매개체였습니다.
수십 년 전 미국 아이오와 대학에서 공부할 때였습니다.
추운 겨울 이른 아침, 샤워하던 시인에 귀에 화재 경보가 들립니다.
시인은 알몸으로 코트만 걸치고 밖으로 뛰어 나왔습니다.
기숙사 안에 두고 온 여권과 시작노트가 눈에 아른거리고,
살을 에는 추위까지 정말 막막한 상황이었죠.
그때 기숙사 친구가 차를 가지고 나와 시인을 구출 해 인근
커피숍으로 향했다고 합니다.
시인은 “카페에 도착하니 따뜻한 온기가 온몸에 퍼지고
때마침 해는 솟아올랐어요. 그때 커피를 딱 마시는 순간 정말이지 천국이 따로 없더라고요. 전 종교가 없는데도 ‘하느님 감사합니다’라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였어요” 라고 회상했습니다.
카페에 도착해서 따듯한 온기가 온몸에 퍼지고 해는 솟아오르는데 그때 커피를 딱 마시는 순간 정말이지 천국이 따로 없더라고요.
문미영(동화작가·기자)
사진
김은경(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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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3-10-25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