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의 여로

『탁류』속의 군산, 군산 속의『탁류』

『탁류』속의 군산, 군산 속의『탁류』
정조(正租) 백만석이 부두(埠頭)에 쌓였더니
여름도 나기 전에 다 어디로 가았느뇨
산(山)머리 움막집에선 배고프다 울어라
앞엔 큰 강이요 뒤에는 바다라도
조개를 캐느냐 자사리를 뜯을느냐
한종일 돌이나 쪼겨 벌이한다 하더라

(이병기,「군산항」, 『동아일보』, 31.9.24)
벤야민의「역사철학테제」에 따르자면 우리가 추구해야 할 메시아적 표지는 미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있다. 저기 저 먼 시대에 인류가 도달할 수 있는 인류 역사 최대의 풍경이 있었다는 것. 한데, 이후 공허하고 균질적인 시간을 역사적 발전이라 참칭한 제도들이 생겨나고 인류의 역사를 지배하면서 인류 최대의 풍경은 단절되고 오히려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져 버렸다는 것. 이런 관점에 선다면 우리의 진정한 미래는 이 공허하고 균질적인 시간을 폭파시키고 과거에 현현했던 인류 역사 최고의 풍경으로 도약할 때, 우리는 메시아적 시간을 이어갈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과거는 우리가 도달해야 할 미래이다. 아니, 우리는 과거 속에서 끊임없이 현재의 상징 질서에 의해 은폐된 메시아적 표지를 찾아내고 그곳으로 호랑이처럼 도약해야 한다.
근대 이후 한국문학에도 이미 지나간 미래에 해당하는 작품들이 있다. 이 작품들은 이미 지나간 그 미래 속에서 상징적 질서를 맴돌고 있는 현 단계 문학을 끊임없이 자극하고 앞으로 문학이 갈 길을 지시한다. 한국문학이 풍요로운 것은 바로 이러한 작가와 작품들 때문이다. 이렇게 근대 이후 한국문학이 생산해낸 작품에도 어느덧 스스로 우리의 미래가 되어 당시의 문학은 물론 현 단계 문학까지를 풍요롭게 하는 소설들이 있으니, 그 중 하나가 『탁류』다.
채만식의 『탁류』는 군산 출신의 작가 채만식이 1934,5년 경의 군산을 배경으로 쓴 소설이다. 물론 이후 온양과 서울로 중심이 옮겨가나 『탁류』에서 ‘군산’이 차지하는 의미는 절대적이다. 아마도 근대 이후 급격하게 변모한 군산항이 없었더라면, 또 이 군산항을 통해 밀려들어온 ‘지역, 종교, 계급, 민족, 종교, 이데올로기의 모든 경계들을 넘어’서는 근대성의 거대한 소용돌이가 없었더라면, 사물은 물론 인간마저 사고파는 흉악한 교환경제가 없었더라면, 그리고 그 교환경제 속에서 상품 혹은 ‘인간기념물’로 전락해버린 식민지 민중들의 고통과 절망이 없었더라면 『탁류』는 씌어지기 힘들었을 것이다. 특히나 “조금치라도 관계나 관심을 가진 사람은 시장(市場)이라고 부르고, 속한(俗漢)은 미두장이라고 부르고, 그리고 간판은 ‘군산미곡취인소(群山米穀取引所)’라고 써붙인 XX도박장(XX賭博場)”이 없었더라면, 그리고 그 맞은편에 짝패처럼 서 있는 ‘조선은행’이 없었더라면, 씌어졌다 하더라도 지금「탁류」가 유지하고 있는 열도와 밀도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탁류』는 채만식 홀로 쓴 소설이 아니라 군산의 전 역사와 그곳에 살던 민중들의 고통과 염원이 써낸 소설이다.
『탁류』는 저 유명한 금강에 대한 묘사와 서술로부터 시작한다. “금강(錦江)…… 이 강은 지도를 펴놓고 앉아 가만히 들여다보노라면” 으로 시작하여 “여기까지가 백마강(白馬江)이라고, 이를테면 금강의 색동이다. 여자로 치면 세태에 찌들지 않은 처녀 적이라고 하겠다. / 그러나 그것도 부여 전후가 한창이지, 강경에 다다르면 장꾼들의 흥정하는 소리와 생선 비린내에 고요하던 수면의 꿈은 깨어진다. 물은 탁하다. / 예서부터가 옳게 금강이다”라는 구절을 거쳐 “이렇게 에두르고 휘돌아 멀리 흘러온 물이, 마침내 황해(黃海)바다에다가 깨어진 꿈이고 무엇이고 탁류째 얼러 좌르르 쏟아져 버리면서 강은 다하고, 강이 다하는 남쪽 언덕으로 대처(大處;市街地) 하나가 올라앉았다. / 이것이 군산(群山)이라는 항구요, 이야기는 예서부터 실마리가 풀린다”로 끝나는 금강에 대한 서술이 그것이다. 이 금강에 대한 서술은 매우 상징적이다. 상류의 순수함의 훼손된 탁한 도시 군산에서의 ‘슬퍼도 달코롬한 이야기는 못’되는 여인네의 이야기가 펼쳐질 것임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채만식 문학관에서 바라본 금강 하구
△ 채만식 문학관에서 바라본 금강 하구
군산내항에 있는 부잔교
△ 군산내항에 있는 부잔교
『탁류』의 핵심적인 이야기는 금강에 대한 서술이 끝나고 정주사가 소설의 무대에 나타나는 순간,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정주사가 미두장 앞에서 한 젊은이에게 멱살을 잡힌 채로 등장하는 순간 시작된다. 저 멀리서부터 금강의 물줄기를 따라내려 오다가 한 순간에 멱살 잡힌 정주사가 클로즈업되면서 『탁류』 의 이야기가 시작된다고나 할까. 하여간 『탁류』의 이야기는 이렇게 정주사가 ‘나이 배젊은 애송이한테 멱살을 당시랗게 따잡혀 가지고는 죽을 봉욕“을 당하는 장면으로부터 시작되거니와, 이 정주사의 봉욕 장면은 여러 가지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정주사가 봉욕을 당하는 곳이 바로 미두장 앞이기 때문. 정주사는 미두장 안으로 더 이상 들어가질 못하고, 미두장 앞에서 오후의 쌀 시세를 놓고 내기를 건다. 한데 지고 만 것. 그것까지야 아무 상관이 없는데 내기에서 진 정주사가 그만 돈이 없다고 나가떨어져 버렸고 끝내 나이가 배나 어린 젊은이에게 멱살을 잡혀 버린 것. 「탁류」는 이렇게 미두장 앞에서 시작된다. 이를 우리는 ’미두장 앞의 무대화‘라고 할 수 있을 터이며, 이는 작가 채만식이 미두장을 그만큼 식민지 자본주의 중핵으로 파악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홍수와 가뭄 등을 대비 쌀의 안정적 수급을 위해 고안된 장치이나 쌀의 시세 차익 때문에 일확천금이 가능했던 곳이 바로 미두장이다. 그러므로 미두장은 저 먼 곳(제국)에서의 정책이 곧 민중의 삶을 결정짓는다는 점에서, 모든 것을 돈을 매개로 교환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식민지 민중에게는 일자리의 절대적인 부족 때문에 일확천금의 도박이 오히려 유력한 선택지였다는 점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식민지 조선의 가장 핵심적인 사회 증상이라고 할 수 있다.
미두장터의 채만식 소설비
△ 미두장터의 채만식 소설비
舊조선은행 - 소설 속 고태수가 이곳에서 나와 봉욕을 당하던 정주사를 구해준다.
△ 舊조선은행 - 소설 속 고태수가 이곳에서 나와 봉욕을 당하던 정주사를 구해준다.
『탁류』 에는 크게 두 개의 몰락담이 있다. 정주사의 몰락. 나름대로 배웠고 노력했건만 몰락해서 미두장 앞을 어슬렁거리고 나이 어린 젊은이에게 멱살을 잡히는 존재로 전락한다. 정주사가 멱살을 잡혔을 때 이 봉욕에서 구해주는 존재가 바로 고태수다. 조선은행에 근무하지만 공금을 횡령하며 방탕을 일삼던 태수는 정주사의 큰 딸, 초봉이에게 연정을 품고, 끝내 ‘돈’을 조건으로 초봉에게 결혼을 제안한다. 정주사는 그 ‘돈’을 보고 초봉을 태수에게 보낸다. 초봉 또한 ‘돈’과 ‘가족’을 번갈아 보며, 은밀히 연정을 품었던 승재를 등지고, 태수에게 팔려(?)간다. 이렇게 교환경제의 시스템 속에 들어서면서 초봉의 몰락이 시작된다. 향락을 위해 횡령한 돈이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나 이제 스스로 죽는 것 외에 길이 없던 태수가 무참히 살해당하는 순간 초봉은 괴물 같은 형보에게 겁간을 당한다. 이미 교환경제에 오염되어 더 이상 순수할 수 없다고 판단한 초봉은 이후 철저한 교환주의자가 되어 자신을 상품화한다. 합의 하에 제중당 약국을 운영하던 제호에게 자신을 상품으로 팔아 넘기고, 끝내는 자신을 겁간한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괴물 형보에게도 돈을 조건으로 영혼과 몸을 판다. 물론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딸을 위협하는 형보로부터 딸을 지켜내기 위해 형보를 죽이는 것으로 이 질기고 질긴 교환관계를 청산하기는 하나 초봉은 끝내 교환경제의 늪에서 헤어 나오질 못한다.
소설 속 승재가 근무하던 금호병원 터
△ 소설 속 승재가 근무하던 금호병원 터
하지만 『탁류』에는 비극적인 몰락만 있지 않다. 정주사와 초봉이 비극적으로 몰락하는 그곳, 바로 그 ‘콩나물 고개’ 그리고 ‘금호병원’에서는 ‘구원의 힘’도 동시에 자란다. 바로 초봉의 여동생 계봉과 남승재, 그리고 그 둘이 만들어내는 증여적 관계가 그것이다. 특히 남승재는 그 지독한 교환 경제 속에서 말 그대로 대가 없이 순수증여를 행하는 인물로 그려져 있다.
그는 ‘버젓한 기술’을 가진, 그러나 처음에는 정식 의사가 아닌 의사보인 인물이다. 그러니 가진 것도 버는 것도 그리 넉넉하지 않다. 그럼에도 그는 자기보다 낮은 곳에 있는 인물이면 자신의 능력이 닿는 한에서는 무조건 돕고 본다. 누군가에게 선물을 주는 것, 증여를 하는 것에서 유일한 희열을 느낀다. 물론 그는 무조건 남에게 무언가를 주는 것이 자기 위안을 위한 것일 뿐 당사자를 비주체적인 존재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수시로 반성한다. 또 자기의 증여 행위가 이 타락한 세상을 개선시킬 것이라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는 자신의 거의 전 재산을 다 팔아서 색주가로 넘겨진 명님을 구해오려 하나 그가 명님을 구해오더라도 그런 증여가 종국적으로 ‘인류가 환장을 해서 동물로 역행하는 구렁창이’를 없애기는커녕 달랑 명님 한 명마저도 그곳으로부터 구해내기 힘들다는 것도 잘 안다. 하지만 그는 이 순수증여를 멈추지 않는다. 그러므로 승재는 생래적인 증여론자이면서 오로지 의무로서 실천하고 자기존재감을 느끼는 증여의 윤리를 지닌 자이기도 하다. 승재는 초봉이 떠나가자 활달하고 자기중심적이며 자기만의 도덕을 지닌 채 살아가는 계봉이와 사랑을 하게 되거니와, 이 둘이 맺어가는 증여의 관계는 『탁류』라는 혼탁한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는 강인한 생명줄이라 할 만하다.
채만식 생가 터
△ 채만식 생가 터
이처럼 『탁류』는 근대 이후 군산 역사, 더 나아가 한국사 전반을 상징하는 핵심적인 장소를 가로지르며 전개된다. 그 과정에서 『탁류』는 교환경제라는 늪이 얼마나 집요하게 당대의 식민지 민중을 고통스럽게 했는지를 밝히는 동시에 그것을 이겨나갈 수 있는 증여의 윤리를 발견해낸다. 이럴 정도의 혜안이라면 『탁류』는 현 단계의 문학, 아니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 모두가 뛰어들 과거 혹은 미래의 도약 지점이 아니겠는가.
『탁류』가 씌어질 무렵 한국 자본주의의 견인차 역할을 하던 핵심 영토였던 군산은 지금 현재 아주 어설픈 지점에서 시간이 멈춰버렸다. 『탁류』의 주 무대인 장소들은 구 조선은행을 빼고는 모두 잔여물만 흔적처럼 남아 있다. 미두장, 째보선창, 콩나물고개, 개복동의 한참봉 쌀가게, 제중당약국, 금호병원 등이 모두 그러하다. 그렇다고 한국 사회가 발전한 만큼 같이 발전해 충분히 현대화되었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1970~80년대 초반의 여느 도시의 풍경을 보는 듯하며, 그 안에 다른 지역보다는 좀 더 많은 식민지 시기의 주택들이 점점이 흩어져 있을 뿐이다.
그런데 최근 군산의 도심이 『탁류』의 풍경을 중심으로 재구성된다는 전언이다. 그런가 하면 채만식 생가를 복원하고 채만식 묘소와 말년의 집필가옥 등을 연계한 채만식 문학 공원화 사업을 계획하고 있는 모양이다. 군산이 『탁류』를 생산하더니 이제 『탁류』 가 군산의 풍경을 바꿔가는 형국이다. 나쁘지 않은 일이다. 다만, 이 일이 『탁류』 에 대한 의미 있는 계승이 되기 위해서는 「탁류」가 그토록 힘겹게 찾아낸 ‘증여의 윤리’가 살아 숨 쉬는 거리로의 회귀가 필수적이다. 그래야 하지 않겠는가.
채만식 만년의 집필실
△ 채만식 만년의 집필실
채만식의 묘
△ 채만식의 묘
채만식 탁류
자본의 수렁에서 허우적거리는 식민지 조선의 부조리한 현실을 그린 채만식의 장편소설.
돈에서 시작돼 걷잡을 수 없이 파국으로 치닫는 과정을 하류에 이르면서 흐려지는 금강에 비유한 명작이다.
류보선_1962년생. 군산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계간『문학동네 편집위원』』
저서 『경이로운 차이들』, 『또 다른 목소리들』, 『한국근대문학의 정치적 (무)의식』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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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4-09-11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