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그 후 이야기

다섯 번째 이야기, 「헤살」

기획특집 황순원 탄생 100주년 기념 소나기 그 후 이야기
올해 탄생 100주년을 맞은 소설가 황순원에게 그의 제자와 후배 소설가 들이 바치는 「소나기」 오마주. 「소나기」의 감동과 여운을 이어갈 소년과 소녀의 다섯 가지 이야기가 펼쳐진다. 기획특집 : 「소나기」 그 후 이야기 5 헤살 - 구병모
꿈속에서 꽃 냄새가 났다.
알싸한 무 냄새에 마른 풀 냄새도, 이어 비 냄새도 났다.
많은 냄새가 한꺼번에 코끝에 몰려들어 섞이더니 곧 눈에 뵈지 않는 고리를 그리며 춤을 추었다.
그예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는다고 느꼈다.
비단조개가 손가락에 닿는가 싶더니 어느새 조개의 감촉이 아닌 손바닥이었다.
부드러운데 누구의 손인지 알 수 없었다. 고개를 들어도 흐릿하여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자 한 무더기 갈꽃이 뺨을 할퀴었다.
눈앞이 온통 보랏빛 꽃 사태로 뒤덮였다.
허위허위 손을 저어 꽃 더미를 헤치자 그 자리엔 아무것도 없었다.
며칠을 까닭 없이 앓다 일어난 소년은 옆구리에 책보를 끼고 느지막이 집을 나섰다.
“다 늦어서 이제 학교 가니, 그만 하루 더 쉬었다 내일 가지 않고.”
어머니 목소리가 어깨를 흔들었다.
못 들은 체 어깨만 으쓱해 보이고 걸었다.
한쪽 주머니에선 호두알 몇 개가, 소년이 주무르는 대로 자기들끼리 몸을 부딪치며 바각바각 소리를 냈다.
조약돌이 한데 들어 있던 탓인지 껍데기에 금이 가고 종내는 깨어졌다.
몇 날을 그렇게 주머니에 쑤셔 넣고 비벼댔으니 껍데기가 얇아지고 말랑말랑해질 만도 했다.
손바닥에 울퉁불퉁한 호두 속살이 만져졌다. 기름기를 흠뻑 머금은 호두 속은 미끈거렸다.
문득 며칠을 품고 헤맨 꿈속에서 끝내 눈앞에 드러나지 않았던 얼굴이 떠올랐다.
알 수 없고 볼 수 없는 무언가에 분풀이라도 하듯 손가락 끝에 힘을 주자 호두 속은 맥없이 부스러졌다.
고소한 냄새가 올라와 콧속을 간질였다.
주머니 속 부스러기 하나를 꺼내 무심코 입으로 가져갔다.
근동에서 제일가는 덕쇠 할아버지네 호두에서 아무 맛도 나지 않았다.
이렇게 맛없는 걸, 까딱 주었더라면 좋지 않을 뻔했다. 줄 기회가 영영 없었던 게 차라리 잘됐는지도 몰랐다.
퉤퉤 하고 길섶에다 침에 젖은 부스러기를 뱉어버린다.
소년은 개울둑 앞에 우뚝 멈춰 섰다. 텅 빈 징검다리에는 물소리만 맑게 흘렀다.
가끔 텃새가 날개로 물을 훑고 지나가는 소리가 찰방, 울렸다.
그때마다 소년은 흠칫 놀라 소리 나는 쪽을 돌아보곤 했다.
그러다 마치 거기 누가 지키고 앉아서 길목에 훼방이라도 놓는 듯, 소년은 그 자리에 책보를 떨어뜨리곤 털퍼덕 앉아버렸다. 언제까지나 말없이 징검다리를 바라보았고, 빠르게 흐르는 물살이 돌에 부딪고 부서지는 소리만 들었다.
저녁노을이 익어갈 때쯤 하여 건너편에서 학교를 파한 아이들이 하나 둘 징검다리를 밟고 다가왔다. 오면서 한동안은 소년이 자기들 쪽을 노려보는 걸로나 알고 마주 눈을 흘겨주었다가, 스쳐 지나가는 내내 어딘지 모를 곳을 멍하니 앞만 바라보고 있다는 걸 알곤 얼굴을 찡그리며 소곤거렸다.
이튿날은 일찍 일어나 책보를 옆구리에 꼈다.
어머니는 전날 소년이 개울을 건너지 않고 그대로 앉았다가 어둑해져서야 돌아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어머니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저 빨랫줄에 넌 이불을 몽둥이로 치면서 등으로 다녀오렴, 했다.
또다시 개울이다.
학교를 가려면 이 징검다리를 건너야만 한다.
몇몇 아이들이 소년의 어깨를 치고 지나가선 편평한 돌들을 사뿐사뿐 밟으며 앞질러갔다.
소년은 한 발을 첫 번째 돌 위에 얹었다가 곧 뒤로 물러났다.
그러더니 배꼽 깊이에서 한껏 숨을 끌어올렸다.
다시 밟아본다.
하나, 둘, 세 번째 돌까지 밟았다가 무언가가 발목을 잡아당기는 무거운 느낌과 함께 주춤거리곤 뒷걸음질했다.
그러다 발뒤꿈치가 돌 아닌 무엇을 밟는 듯싶더니 등이 어딘가에 부딪치고 외마디소리가 났다.
마침 개울을 건너려던 다른 아이가 쏟뜨린 책보 옆에 주저앉아 이마를 문지르고 있었다.
그러나 소년은 손을 내밀어 일으켜주기는커녕 미안하다는 한마디 없이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아이는 몸을 일으키더니
소년의 어깨를 홱 밀치곤 지나갔다.
뒤통수에 눈이……
가는 길 훼방……
같은 퉁명스러운 욕지거리를
입으로 우물거리며 총총 사라졌다.
건강하고 활발한 뜀박질이었다.
밀친 대로 자빠져 개울둑에
엉덩이를 붙인 채 소년은 부예지는
아이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몸을 일으켜 다시 한 번 돌에 첫 발을 얹어놓을 마음이 나지 않았다.
설령 발을 붙인대도 곧 이어 찌르르한 느낌과 함께 휘청거리며 뒤로 물러나 앉았기를 되풀이할 것만 같았다. 징검다리는 늘 있던 그대로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전과 달라진 거라곤 한복판에 지키고 앉아 가는 길을 막고 개울물을 움켰다 뿌렸다 하는 사람이 거기 없다는 하나뿐이었다. 어째서 돌이며 개울이 어제와 같이 단단하게 빛나는지, 하늘은 왜 쨍 하는 소리와 함께 갈라지지 않으며 폭우는 왜 쏟아지지 않는지 소년은 알 수 없었다. 비는 와야 할 때를 모르고 꼭 오지 말아야 할 때 온다. 못된 비님.
아니 비놈이다.
쇠꼴을 베어다 외양간에 쌓아줄 생각도 않고 도로 방에 등을 붙인 지 몇 날이었다.
전에 없던 한기가 들어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갈마들며 웅크린 자식을 억지로 이불자락을 걷어다 이마를 짚어보고 수건을 갈았다.
머리맡에 자리끼를 채워놓고 요강을 비웠다.
“어째 열이 안 떨어지네…….”
“한 일주 넘어 쉬었나, 학교를.”
“오늘 밤만 지내보고 이걸 읍내 병원까지 실어다 나가 보나, 마나.”
“그저 둬보고 살피지 무얼 그런 정도를.”
수런거리는 목소리가 귓가에서 아득하게 멀었다. 그대로 까무룩 잠에 떨어지는가 싶었다.
물가도 아닌 집 안에서 퐁, 물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가 가깝지 않고 아슴아슴하니, 어머니가 정지에서 그릇을 부시다 대야에 숟가락이라도 떨어뜨렸나 보았다.
그러나 그 포……옹 소리는 바닥이 없는 듯 깊고 천장 없이 높다.
널찍하며 거의 무릎까지 차오르는 개울에 조약돌을 던졌을 때 나는 소리다.
이어 문득 와락 하고 귓전을 때리는 소리가 들렸다.
바보.
옆얼굴에 주먹이라도 맞은 듯 눈을 반짝 뜨고 윗몸을 일으킨다.
빈 방에 어스름이 이불처럼 개켜졌을 뿐이다.
머릿속은 어질했지만 잠은 다시 오지 않았다.
대신 조금 전까지 방에 누가 왔다 가기라도 한 듯 메밀꽃이며 갈꽃의 잔향이 맴돈다.
두 팔을 휘적거리며 일어나 앉았다. 목이 말라 머리맡을 더듬다 손끝으로 그릇을 쳐서 엎었다.
고르지 못한 바닥을 따라 물줄기가 길게 뻗어나갔다.
바닥이 이리도 울퉁불퉁했었나, 땅이 언젠가부터 비스듬해지기라도 한 듯 물줄기는 그칠 줄 모르고 방바닥을 가로질렀다.
물이 가 닿은 곳에 걸레인지, 어머니가 솜을 누비려 놔둔 바느질감인지 모를 것들이 두어 장 흐트러져 있었다.
그랬거나 말았거나 흘린 물이나 닦자고 집어 들어보니 여기저기가 터지고 해진 자기 저고리다. 흙물이 들어 더럽기까지 하다.
돌이켜보니 그날 입었던 저고리를, 어머니가 밭일이 쌓여 곧바로 빨아두지 못했다고 그랬다.
햇볕 들자 뒤늦게 암만 두드리고 비벼도 그 자리에 새겨지기나 한 듯 잘 지지 않더라고 중얼거렸던 기억이 난다.
하여 소년의 몸도 몰라보게 자라고 있으니 이참에 좀 더 시접을 꺼내 바느질을 새로 하자는 것이다.
지지 않는 자리는 다른 일로 다른 데다 쓰고 새 감을 대어 깁자는 것이다.
그러려고 꺼내는 놨는데 소년이 한동안 아프자 근심 때문에 솔기도 뜯지 못한 채로 놔둔 모양이다.
그러고 보면 근간에 옷고름을 여밀 때마다 숨이 차도록 옆구리며 겨드랑이 꽉 끼었던 기억도 났다.
그러나 엉성하게 이어놓은 수숫단 안에서 누군가의 어깨를 덮어주기엔 모자람이 없었더랬다.
소년은 저도 모르게 가장이가 촉촉이 젖은 저고리를 품에 넣고 이불 속으로 다시 미끄러져 들어갔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이불을 덮고 몸을 옹송그리는 동안 아까보다 한결 나아진 듯했다.
아무런 꿈도 꾸지 않았고 귓속을 호비는 소리는 다시 들려오지 않았다.
오늘도 안 나갔다간 한 학년을 고대로 다시 다녀야 할지 모르겠다며 어머니가 등을 떠밀었다.
정 힘들고 자빠지겠거든 선생님께 얼굴이라도 비치고 그만 돌아오라 일렀다.
소년은 어제보단 가벼워진 등줄기를 곧게 펴며 길을 나섰다.
어느새 바람이 사느랗게 부는 날로 계절은 제법 바뀌어 있었고, 저고리 위에는 조끼 한 겹을 덧입었다.
다시 문제의 개울가였다. 새벽부터 내려앉아 달아날 생각이 없어 보이는 물안개 때문에 징검다리 건너편이 잘 뵈지 않았다.
이 다리를 밟고 부연 안개 숲으로 스르르 빨려 들어간 끝에 다른 세상이 나오기라도 할 듯.
그러나 너머로 가야 할 일이었다. 소년은 한 발을 돌 위에 올려놓았다.
다음 그리고 다음.
네댓 번째, 예닐곱 번째를 가볍게 건너뛰어 기어이 그 자리에 섰다.
그 자리는 물을 움켰다 흩뿌리는 소리로 가득했다. 분홍 스웨터며 유난히 하얀 목덜미 같은 것들이 한데 어우러져 눈을 쏘아댔다.
소년은 부스러지고 눅눅해져 이제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호두 알맹이를 개울에 뿌렸다.
물살을 따라 어딘가로 춤을 추는 듯 떠내려갔다. 주머니를 까뒤집어 나오는 대로 뭐든 개울에 떨어뜨렸다.
말라비틀어진 대추 몇 알 하며 소녀의 목덜미처럼 흰 조약돌까지.
그런 다음 책보 매듭을 한 손가락으로 끄르곤 흔들었다.
책보에서는 숙제장이나 연필 대신 다만 저고리 한 벌이 스르르 떨어져 내렸다.
물에 펼쳐진 저고리는 만세를 부르는 모양을 하고 그 자리에서 흔들리기만 했다.
호두나 대추처럼 멀리멀리 사라지지 않고 물살을 움키듯 그 자리에서 맴돌았다.
옷이 무거운가 하여 슬쩍 손으로 밀어준다. 몇 발짝만큼 나아가다 징검다리 언저리에 걸려버린다.
한 번 더 손을 뻗어 툭 쳤지만 시원하게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얼마 안 있으면 옷이 물을 머금어 아래로 잠겨버릴 것 같다. 다급해져서 손으로 물살을 마구 일으키며 쳐낸다.
고작 개울이라 시원시원히 힘 있는 물살이 솟아오르지는 않지만 조금씩 움직인다.
얼룩이 든 저고리는 흠뻑 젖은 채 이윽고 물살을 따라 유유히 떠내려갔다.
소매가 너울거리는 모양이 손을 흔드는 것처럼 보였다.
그 모습이 개울 저편으로 많이 건너갔다고 생각 들 때쯤 내내 눈앞을 가렸던 물안개가 걷혔다.
얼마나 멀리 떠내려갔을까 싶었는데, 안개가 거둬가기라도 한 듯 저고리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리고 소년은 텅 빈 책보 끄트머리를 주머니에 찔러 넣곤 남아 있는 징검다리를 한 칸씩 디디기 시작했다.
조심스럽게 밟아 나아가는 동안 발목은 생각만큼 무겁지 않았다.
등 뒤에서는 언제까지나 흐르는 물결에 헤살을 젓는 소리가 경쾌히 들려왔지만 이 다리를 다 건널 때쯤 멀어질 일이었다.
작가 소개
구병모
구병모 (1976~)
소설가
소설 『고의는 아니지만』 ,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 『위저드 베이커리』 , 『아가미』 , 『파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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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5-09-10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