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그 후 이야기

세 번째 이야기, 「다시 소나기」

기획특집 황순원 탄생 100주년 기념 소나기 그 후 이야기
올해 탄생 100주년을 맞은 소설가 황순원에게 그의 제자와 후배 소설가 들이 바치는 「소나기」 오마주.
「소나기」의 감동과 여운을 이어갈 소년과 소녀의 다섯 가지 이야기가 펼쳐진다.

기획특집 : 「소나기」 그 후 이야기 3
다시 소나기 - 서하진
보름달이 뜬 밤이었다. 달은 구름 사이를 지나 천천히 산위로 올라 조용히 부드러운 빛을 뿜었다.
오솔길 초입에서 환은 신을 벗어들었다. 축축한 땅기운이 발바닥으로 스며들고 차츰 마음이 가라앉았다.
모퉁이를 돌자 작은 둔덕이 나타나고 곧 조그마한 무덤이 눈에 들어왔다. 상석도 빗돌도 없는 무덤이었다.
환은 밤이슬에 젖은 풀무더기를 가만히 쓸어보고 손에 들고 온 호두를 한 옹큼 내려놓았다.
잘 지내지? 환은 속으로 물었다. 거기에도 소나기가 내리니? 또 물었다. 주머니를 뒤진 환의 손에 마른 꽃 한줄기가 딸려 나왔다.
마타리꽃이었다. 무덤가에 노란 꽃을 내려놓고 환이 소리 내어 말했다.
“이제 곧 이 꽃도 다 질 거야. 추워질 텐데…….”
괜찮은 거지…… 거기서는, 웃기만 하는 거지…… 아프지 않은 거지……
가느다란 바람이 지나고 무덤 위 웃자란 풀들이 떨듯 흔들렸다.
괜찮아, 여긴 춥지 않아, 나는 괜찮아.
소녀가 대답하는 것만 같았다. 풀숲 어느 어름에서 밤새가 호르르, 울며 날아갔다.
“어딜 다녀오는 거냐? 밤이 늦었는데.”
안방 쪽에서 모습은 보이지 않은 채 어머니가 물었다.
발소리를 죽이며 마당을 지나던 환은 흠칫 놀라 그 자리에 우뚝 서고 말았다.
며칠 전 코뚜레를 꿴 송아지가 몸살을 앓고 있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저기, 그러니까, 외양간에, 송아지가, 우는 소리가 계속 들려서요.”
방문이 열리고 어슴푸레 어둠 속에 어머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버지 집 비우시는 밤마다 어딜 가는 거야? 어디, 친구들 모임이라도 있는 게야?”
환은 대답하지 못했다. 묻긴 했지만 위아래, 친구 집이라 할 만한 데가 없다는 걸 어머니가 모를 리 없었다.
무슨 말을 할 듯 환을 바라보던 어머니는 손을 저어보이며 방문을 닫았다.
“일찍 자지, 또 첫차 놓칠라고.”
어머니의 혼잣말이 문틈으로 새어나왔다.
다음 날 아침, 교문 앞을 천천히 걸어 들어가는 환의 어깨를 툭 치는 손이 있었다. 늦었는데 뛰어, 얘, 라고 소녀는 말했다.
돌아보기도 전에 환을 지나쳐 저만치 뛰어가던 소녀는 교실 뒷문 앞에서 기다리다 문을 여는 환의 손을 불쑥 잡았다.
“좀만 있어 봐. 지금 들어가면 혼날 거 아냐. 기다리자, 담임 나올 때까지.”
잡힌 손을 떨쳐내고 소녀를 보던 환의 시선이 소녀의 시선과 얽혀 들었다. 환의 눈이 천천히 커졌다.
하얀 얼굴, 장난스레 웃는 입매, 당돌한 그 표정이 몹시 낯익었다. 환의 숨결이 거칠어지고 낯빛이 붉어졌다.
당황한 환은 소녀를 등지고 문을 왈칵 열었다. 아이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려 환을 바라보았다.
담임의 날카로운 눈이 환을 향해 날아왔다. 또 너냐, 하는 듯 화난 표정이었다.
고개를 숙이고 환은 창가 맨 끝, 자기 자리로 걸어 들어가 앉았다. 웅성거리던 교실이 조용해졌다.
“누가 앉으랬냐.”
담임의 목소리가 서늘했다.
“일주일 새 세 번째 지각이야. 김환, 복도로 나가.”
군 말 없이 복도로 나가던 환의 팔을 잡아 챈 건 문 뒤에 숨어있던 소녀였다. 소녀의 눈이 장난기로 반짝거렸다.
“잠깐만 있어봐, 내가 구해줄게.”
말릴 틈 없이 교실로 들어선 소녀가 큰 소리로 선생님을 불렀다.
“오, 윤희영, 너는 왜 또 인제 오냐?”
환을 대할 때와는 다른 목소리였다.
“선생님, 그게요, 김환이 저 때문에 늦었거든요. 버스에서, 사람 많아서 제 가방이 떨어졌거든요.
김환이 그거 주워줄려다가, 저랑 같이 버스 놓쳤거든요. 환이 아니었으면 저 크게 다칠 뻔했어요.”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소녀가 말했다. 아이들 중 누군가 휘이, 휘파람을 불었다.
조용히들 안 해, 소리를 지른 담임이 둘을 째려보았다.
“둘 다 자리에 가서 앉아라. 김환, 너 한 번만 더 지각하면 한 학기 동안 변소 청소다.”
첫 수업이 끝날 때까지 환의 눈길은 소녀의 등에 꽂혀있었다. 환의 시선을 느낀 듯 문득 소녀의 등이 꼿꼿해졌다.
“그거, 고마워서 그러는 거지?”
쉬는 시간이었다. 환의 책상 앞에 다가온 소녀가 불쑥 물었다. 환은 대답하지 않았다.
수업 시간 내내 쳐다본 걸 들켰다는 사실보다 이렇게 묻는 소녀가 더 당혹스러웠다.
“하긴 학기 내내 변소 청소, 보통 일은 아니잖아. 그래서 말인데, 너 이 은혜를 어떻게 갚을 거니?”
소녀가 얼굴을 바짝 들이밀며 물었다. 소녀에게서는 알 수 없는 향기가 났다. 환은 어지러웠다.
눈에 잔뜩 힘을 주고 환은 소녀를 노려보았다. 저 말투, 저 표정. 대체 이 이 아이는 누구인가.
어째서 이토록 닮은 얼굴을 하고 있단 말인가. 숨을 고른 환의 입에서 나온 말이 이랬다.
“저리 비켜. 정신 사납게.”
소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지만 소녀는 곧 야무지게 쏘아붙였다.
“인간이라면 모름지기, 은혜를 알아야지, 말이야.”
네 말대로라면 크게 다칠 뻔한 걸 구해줬다며? 라고 환은 말하지 않았다. 어차피 학교를 계속 다닐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았다. 환의 아버지는 말했다. 중학 마치면 됐다, 더 배우면 농사짓기 힘들다.
그래도 자식이라고 하난데…… 아버지의 눈치를 보던 어머니가 아니었다면 고등학교 진학은 가능하지 않았을 거였다.
환으로서는 어느 쪽이든 상관없는 일이었다.
아버지처럼 대추농사를 짓고 송아지를 돌보는 일을 하거나 어머니의 바람처럼 읍내 우체국 직원이 되거나.
진학을 결심한 이유는 단순했다. 세 시간 통학 거리의 학교가 있는 그곳, 양평.
“뭐라고 말 좀 해봐, 얘.”
소녀가 말끄러미 환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도무지 기가 죽지 않는 아이였다. 문득 환은 생각했다.
이제 학교에 계속 다녀야할 이유가 생겨난 것인가.
“이것 봐. 이빨을 몽땅 드러내고 웃는 것 같지 않니?”
점심시간, 옥수수를 불쑥 내밀며 소녀가 물었다. 배시시 웃는 얼굴이 영락없는 윤 초시네 손녀였다.
대체 저 아이는 어디서 나타났을까. 왜 저 얼굴을 단박에 알아보지 못했을까. 환의 미간에 주름이 짙게 잡혔다.
“옥수수 싫어하니?”
소녀가 또 물었다.
“무서운 거 본 듯이나 얼굴은 빨개지고…….”
말끝에 소녀가 꺄르르 웃었다. 가만히 바라보던 환은 휙 돌아서서 빠르게 걸었다.
얘, 잠깐만, 뭐라 소리치던 소녀의 웃음소리가 환의 뒤를 따라왔다. 곧 낭랑한 수업 종소리가 울렸다.
다음 시간수업은 국어였다.
“오늘은 시를 한 편씩 써보자.”
국어교사는 백묵을 들고 칠판에 ‘갈대’ 두 글자를 썼다.
시인이라는 별칭을 가진 나이든 국어교사가 종종 수업 시간에 하는 일이었다. 에이, 또야. 학생들 틈에서 볼멘소리가 들렸다.
시 쓰는 법 같은 건 배운 적이 없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시를 짓게 하는 날, 품평을 하는 것 까지는 참을 만했지만 그 뒤에 이어지는 시의 의미. 시인으로서 자세까지도 참을 수 있었지만 등단한 경력과 지루한 자기자랑, 이 시대 시인의 궁핍함에 대한 통탄이 반복되는 수순이 아이들에게는 고통이었다.
“갈대를 뭐 어쩌라고요, 선생님. 여자의 마음은 갈대와 같다, 그런 거요?”
한 아이가 투정부리듯 물었다. 와그르, 웃음이 터졌다.
“곧 갈대 천지가 될 거 아니냐. 늘 거기 있다 지나치는 사물이라도 다른 시선으로 보는 연습.”
교사는 짧게 설명을 마치고 창가에 서서 운동장 쪽을 바라보았다. 체육 교사의 구령에 맞춰 아이들이 운동장을 돌고 있었다. 가을볕이 아이들의 등에 따갑게 내리 꽂히고 아이들의 발길마다 푸석푸석 먼지가 일었다. 저 아이들, 그리고 교실을 메운 오십 여명의 아이들, 그들 중 누군가는 큰 도시로, 대학으로 가겠지만 대부분은 학교를 떠나면 이 소도시의 작은 기업에 자리를 잡을 것이었다. 더러는 과수원에서, 밭에서, 흙을 묻히며 살 것이고 학교를 떠나면 평생 시라는 것은 잊고 살 것이었다.
“다 썼으면 맨 뒤부터 앞으로 넘겨라.”
주섬주섬 수거한 종이를 들추던 교사가 그 중 하나를 빼들었다.
흠흠, 헛기침을 한 교사가 잘 들어봐, 하고는 시를 읽었다.
“별을 세느라 머리가 세었소.”
교실이 조용해졌다. 학생들은 가만히 기다렸다. 교사는 은근한 눈으로 학생들을 죽 훑어보았다.
“어떠냐?”
교사가 물었다.
“그게 다예요?”
한 아이가 물었다.
“뭐가 더 필요하냐?”
교사가 또 물었다. 에이, 하는 아이도 있었지만 대개는 조금 멍한 표정이었다.
그 중 가장 멍해진 아이, 환이었다. 갈대는, 꼭 머리 하얀 할매 같아. 떠나간 소녀가 했던 말이었다.
“윤희영.”
교사가 소녀의 이름을 불렀다. 소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네가 장원이다.”
아이들이 일제히 박수를 쳤다. 소녀는 수줍은 듯 웃으며 고개를 까딱했다. 환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교문을 지나 언덕 끝에 환은 서 있었다. 재잘거리며 걸어오는 여학생들, 땀 냄새 풍기는 남학생들이 환을 지나쳐 갔다.
그들 하나하나가 저마다 낯설었다. 그 아이들에게도 그럴 것이었다. 한 학기가 지나도록 말을 섞은 아이가 손에 꼽을 정도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삼년, 그 아이가 떠난 이후 환의 세상에 머문 것들은 기억과 흔적이었다. 징검다리를 건널 때면 환은 돌 한가운데 앉아 물장난을 치는 소녀를 보았다. 큰물이 져 사납게 흐르는 개울을 건너던 날, 정강이에 차오르던 물줄기가 이제는 겨우 무릎을 넘볼 만큼 키가 자라났지만 여전히 소녀를 업은 듯 환의 등이 무출해졌다. 가만가만 발등을 핥는 파도처럼 다가왔다 사라지는 기억과 흔적들을 그저 버려둔 채 환의 시간이 흘러가는 동안 소녀의 웃음소리, 소녀의 음성이 서서히 희미해져갔다.
그럴 때면 환은 홀로 밤을 더듬어 분홍 스웨터를 입은 채 잠들어 있는 소녀를 만나러 갔다.
몇 알의 호두,
몇 알의 대추,
혹은 작은 조약돌을 품고서.
이따금 꽃을 꺾어 간 날은 미처
알려주지 못했던 꽃 이름을
작은 소리로 들려주었다.
이건 방울꽃이야. 방울처럼 생겼잖아.
이 하얀 건 냉이꽃인데, 냉이도 종류가 많아.
갯냉이, 물냉이. 말냉이, 나도 냉이,
그냥 냉이도 물론 있지.
소나기 삽화
맨드라미, 이건 닭벼슬 같다고 네가 그랬지. 한 무더기 수국을 놓고 왔던 날, 꿈에 수국 사이에서 웃는 소녀를 만나기도 했다. 꼭 한 번, 그믐밤, 괴괴한 그늘이 지는 날에는 커다란 소리로 노래를 불러준 적도 있었다.
“저 산 너머 물 건너 파란 잎새 꽃잎은 눈물짓는 무울망초.”
음악시간에 배운 노래였다. 소녀가 들었다면 좋아했을까. 에이, 시시해, 조약돌을 던졌을까. 환은 알 수 없었다.
희미해진 기억과 흔적을 선명히 되돌린 소녀가 저만치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환은 윤희영을 향해 마주 걸어갔다.
“어머나, 나를 기다린 거야?”
소녀가 반색을 했다.
“그 거, 무거워 보인다.”
환이 소녀의 가방을 가리켰다.
“일단 가방 들어주는 걸로 시작하겠다는 거야?”
소녀가 배시시 웃었다. 양 손에 가방을 든 환의 곁에서 소녀는 의기양양한 걸음으로 꺼떡꺼떡 걸었다.
언덕을 지나자 큰 길이 나왔다.
“저기 버스 온다. 뛰어.”
교복 자락을 펄럭이며 소녀가 달려갔다. 달음박질친 환은 막 버스에 오르려는 소녀를 잡았다. 소녀의 눈이 둥그레졌다.
“다른 차 타. 나랑.”
뒤미처 도착한 버스에 환이 먼저, 소녀가 올랐다. 환의 집으로 가는 버스였다.
한 시간 가량 버스가 달리는 동안 어디 가는 거냐 묻던 소녀는 버스에서 내리자 조용해졌다.
환은 앞장서서 터덜터덜 걸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어디서부터, 어찌 시작해야 할지 환은 알 수 없었다.
“너 혹시 내 이름은 아니?”
논두렁을 지나 오솔길의 초입에 들어설 무렵 소녀가 물었다.
“윤희영.”
환의 대답이 짧았다.
“오늘 국어시간에 들어서 안 거지, 그거.”
환의 귓불이 붉어졌다.
“나는 전학 온 첫날부터 너 알았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환은 묻지 않았다. 맨 뒷자리, 수업 중에도 쉬는 시간에도 기척이 없는 자신을 어찌 알았을까.
“그날 너 지각했잖아. 다음 날도. 주제에 잔뜩 폼 잡고 들어오더라.”
말끝에 소녀가 까르르 웃었다.
“그런데, 너…… 전학 언제 온 거야?”
“그것도 몰랐단 말야?”
소녀의 웃음이 멎고 눈매가 사나워졌다.
“아니…… 나는 그러니까…….”
걸음을 멈추고 환을 노려보던 소녀가 길 옆 아카시아 잎사귀들을 훅 뜯어 날렸다.
“너 대체 뭐니?” 소녀가 물었다. 환이 묻고 싶은 말이었다. 너 정말 누구니? 정말 뭐니? 환은 우뚝 서서 소녀를 노려보았다.
화가 난 듯, 슬픈 듯 가늠하기 어려운 표정이었다. 나무둥치에 앉아있던 다람쥐 한 마리가 서슬에 놀라 달아났다.
“저기 좀 앉자. 다리 아프다.”
소녀가 먼저 둥치에 걸터앉았다. 아이, 땀난다, 하던 소녀가 손수건으로 목덜미를 훔쳤다. 흰 팔뚝, 보랏빛 수건을 든 손을 환은 바라보았다.
“이건 마치 초롱불 같네.”
풀섶 사이 꽈리열매를 가리키며 소녀가 말했다. 환의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이 초롱불엔 불나방이 꼬이지 않네, 떠난 소녀가 했던 말이었다.
“일어나, 가자.”
환이 소녀의 팔을 잡아끌었다. 마음이 급해 도무지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대체 어딜 가는데 그러는 거냐 투덜대면서도 소녀는 환의 뒤를 바짝 따랐다. 상수리나무 군락지를 지나고 침엽수들이 나타났다. 이제 모퉁이를 돌면 소녀의 무덤이 보일 것이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던 소녀가 문득 환의 팔을 잡았다.
“잠깐, 잠깐만 있어 봐.”
환의 발걸음이 멎었다.
“나 여기 와 본 적 있어.”
환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너…… 너……”
환의 목소리가 떨려나왔다.
“너…… 누구니?”
소녀는 말없이 환을 바라보았다. 숨을 멈추고 환은 그 눈을 마주 바라보았다. 소녀의 눈이 붉어지고 천천히 물기가 차올랐다.
“아버지가 그러셨어. 누군지 무덤에 다녀가는 것 같다고. 그게 너였어…… 김환.”
아버지? 그 아이가 윤 초시네 유일한 손녀가 아니었나? 환의 눈에 다시금 의혹이 서렸다.
“가자. 가서 얘기 하자.”
환을 뒤로 한 소녀가 무덤 쪽으로 걸어갔다.
무덤가에는 다람쥐들이 미처 가져가지 못한 마른 호두 알갱이 두 개가 남아있었다. 소녀가 호두 알을 집어 들었다.
“언제 또 왔었네.
”어제 밤.”
환이 먼저, 소녀가 무덤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밤에? 무섭지 않아?”
환은 고개를 저었다. 소녀를 보러오는 밤에는 언제나 부드러운 바람이 불었다.
“내가 누구냐 물었지? 나는 윤희영, 희수 사촌이야.”
소녀가 말했다. 사촌이라…… 어쩐지 거짓말처럼 들리는 말이었다.
“희수랑 무척 친했어, 뭐든 다 얘기 하고, 큰집이 이사 간 뒤에도 편지하고 전화하고, 동갑내기라 쌍둥이처럼 자랐지.”
쌍둥이처럼…… 그것 역시 믿어지지 않았다. 환에게서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큰집에, 희수 가고 나서 적적한 집에 양녀로 왔어. 지난여름에. 우리 집에는 오빠도, 언니도 있거든.”
말하다말고 소녀가 하늘을 가리켰다.
“저것 좀 봐, 새다.”
솔개 한 마리가 허공을 돌고 있었다.
“소리개야.”
환이 말했다.
“나는 말이야. 어릴 적에는 희수가 부러웠어. 큰집에서 희수는 공주님이었거든.
큰 아버지, 지금은 아버지라 부르지만, 큰 아버지는 희수를 보기만 해도 웃으시고…….”
“네게는…… 안 그러시는 거야?”
환이 소녀를 돌아보았다. 소녀는 배시시 웃었다. 환의 가슴 한가운데 깊은 통증이 일었다.
“내게도 그러셔, 그런데…… 그 웃는 모습을 보면 슬퍼…….”
소녀의 음성이 잦아들었다.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솔개가 사라진 하늘 저쪽에 짙은 먹구름이 떠있었다. 비가 오면 좋겠다, 소나기가 내리면 좋겠다, 흠뻑 젖으면 좋겠다, 환은 생각했다.
“희수랑 정말 친했었나봐?”
소녀가 물었다. 환은 대답하지 않았다.
“갑자기 잃는 것과 갑자기 얻는 것…… 어느 쪽이 더 힘이 들까.”
소녀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너는 어떠니?
환은 묻고 싶었다.
소녀가 떠난 자리, 기억이 머물렀던 그 자리에서 그것들을 밀어내고 다른 누군가를 들인다면……
나는 행복해질까…… 힘이 들까……
여전히 보랏빛 손수건이 들려 있는 소녀의 손을 환은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 때였다. 차가운 것이 툭, 환의 이마에 떨어졌다.
“어머, 비 오나봐. 어떡해.”
소녀가 화들짝 자리에서 일어났다. 후두둑 떨어지던 빗방울이 금세 거센 줄기로 변해갔다.
“이거.”
환이 가방을 내밀었다.
가방을 우산삼아 머리에 이고 환과 소녀는 왔던 길을 거슬러 달리기 시작했다.
작가 소개
서하진
서하진 (1960~)
소설가 ·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소설 『책 읽어주는 남자』, 『사랑하는 방식은 다 다르다』, 『라벤더 향기』, 『비밀』, 『요트』, 『다시 사랑한다 말할까』, 『나나』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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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5-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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