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의 여로

울기 위해 여수로 가는 그녀들 - 한강,「여수의 사랑」

울기 위해 여수로 가는 그녀들
여수, 그 앞바다의 녹슨 철선들은 지금도 상처 입은 목소리로 울어대고 있을 것이다. 여수만(灣)의 서늘한 해류는 멍든 속살 같은 푸릇푸릇한 섬들과 몸 섞으며 굽이돌고 있을 것이다. 저무는 선착장마다 주황빛 알전구들이 밝혀질 것이다. 부두 가건물 사이로 검붉은 노을이 타오를 것이다. 찝찔한 바닷바람은 격렬하게 우산을 까뒤집고 여자들의 치마를, 머리카락을 허공으로 솟구치게 할 것이다.

- 한강,「여수의 사랑」(『여수의 사랑』, 문학과지성사, 1995) 첫 부분
존재론적 의미에서, 여행은 상처받고 버림받은 자들의 것이다. 혹은 상처받고 버림받은 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온전한 존재 방식의 하나는 여행이다. 떠나지 않으면, 끊임없이 떠돌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자들. 이들에게 여행은 상처를 지우면서 확인하는 일이고, 버림받은 기억을 세상에 흩어져 있는 무량한 시간과 장소에 말없이 하소연하며 돌려주는 일이다. 자신이 떠도는 새로운 시간과 장소, 사물과 사람들이 자신을 ‘낯선 존재’로 호명하는 순간, 그는 생의 어둠에서 나와 다시 태어나는 기쁨을 누린다. 여행의 종착지는 그가 탄 차의 목적지가 아니라, 그의 존재와 내면의 재탄생인 것이다.
자신의 기원을 향해 떠나는 여행도 다르지 않다. 하기는 자신의 기원을 찾는 것이 여행의 본질일진대, 그 기원이 상처투성이라면 여행은 더더욱 존재론적인 것이 된다. 한강의 「여수의 사랑」에 등장하는 ‘자흔’과 ‘나’(정선)의 경우가 그렇다. 여수가 고향인 ‘나’(정선)와 여수가 고향이라고 믿는 ‘자흔’. 이들은 여수를 떠나와 다시 오랜 시간을 들여 여수로 향한다. ‘나’와 ‘자흔’에게 ‘여수’는 남해의 아름다운 항구도시인 여수(麗水)이자, 여행자의 외로움과 향수를 뜻하는 여수(旅愁)이다. 더불어, 함부로 버려져 자신의 기원의 바깥에 유폐 당한 이들은 존재와 생의 가련한 여수(女囚)들이다.
자흔이 혼자 여행한 오동도에서 본 여수항과 그 사이를 잇는 다리
△ 자흔이 혼자 여행한 오동도에서 본 여수항과 그 사이를 잇는 다리
여수들! 나와 자흔은 자신의 뼈아픈 기원과 존재 자체, 불행한 의식에 갇혀 있다. 이로 인해 ‘나’는 세상 자체를 깨끗이 씻어내려는 듯 지독한 결벽증과 구토를 앓고, 반대로 ‘자흔’은 한없는 자기 방기와 자상(自傷)의 욕망에 대책 없이 몸을 던진다. 표면적으로 달라 보이는 두 사람의 이상(異常) 심리와 행위는 모두 존재론적 감금의 같은 증상들이다. 그 증상에 두 사람은 ‘집요하게’ 시달리고 있으며, 거의 들러붙어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녀는 얼굴을 닦는 동작에 너무도 몰입해 있어서 이를테면 마치 이목구비까지, 더 나아가 고유한 존재까지도 손바닥으로 닦아내버리려는 것처럼 보였다. 흡사 들지 않는 칼날로 단단한 과일의 내피(內皮)를 도려내려는 것 같은 집요한 손놀림이었다. (p. 19)
이 증상을 치유하기 위해서라도 이들은 떠나야 한다. 자신이 피 흘리며 떠나왔던 곳으로 ‘태생의 몸’이 아닌 ‘여행자의 육체’를 갖고 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 곳에 ‘온전히’ 도달했을 때, 비로소 이들은 상처 받고 피 흘린 ‘태생의 몸’을 원형 그대로 되찾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소설 「여수의 사랑」이 궁극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여행자의 육체를 얻음으로써 태생의 몸에 찍힌 사회적 낙인을 지우고, 태생의 몸을 순수한 상태로 회복하려는 자의 기나긴(실은 거의 불가능한) 여정이라고 할 수 있다. 서울-여수 간 기차 안에 버려진 후 고아원과 양부모의 집을 거쳐 많은 도시를 전전하던 자흔이 여수의 한 작은 마을에 이르렀을 때, 그 아름다운 광경에 넋을 잃고 원시적인 제의에 가까운 기괴한 몸부림을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 마을이 자신의 고향이라고 온몸과 마음으로 느끼고 외치는 자흔의 모습은 연민을 넘어 처절함마저 느끼게 한다.
마을 아래를 내려다보니까 둥그런 만(灣)과 다도해 섬들이 파란 바다를 둘러싼 모양이 꼭 가느다란 푸른 실 하나하나를 촘촘히 엮어놓은 것 같이 잔잔했어요. 그런데 이상하지요…… 그냥 ‘아름답구나’하고 생각하면서 다시 길을 내려오는데 갑자기 눈물이 쏟아지는 거예요. (…) ……바로 거기가 내 고향이었던 거예요. (…) 죽는 게 무섭지 않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어요. 저 정다운 하늘, 바람, 땅, 물과 섞이면 그만이었어요…… 내 외로운 운명이 그렇게 찬란하게 끝날 거라는 것이 얼마나 기뻤는지, 얼마나 큰 소리로 그 기쁨을 외치고 싶었는지, 난 그때 갯바닥을 뒹굴면서 마구 몸에 상처를 냈어요. 더운 피를 흘려 개펄에 섞고 싶었어요. 나를 낳은 땅의 흙이 내 상처난 혈관 속으로 스며들어오게 하고 싶었어요…… (pp. 51~52)
‘나’의 월세방에 세든 ‘자흔’이 성심을 다해 돌보는 물고기들의 ‘어항’은 이 아름다운 여수의 바다를 은유하는 동시에, 여수를 떠나와 도시에 갇힌 자흔 자신을 상징한다. ‘어항’ 속에서 어항의 삶을 산 자흔이 찬란하게 펼쳐진 ‘개펄’에 이르렀을 때, 몸에 마구 상처를 내 “더운 피를 흘려 개펄에 섞고 싶었”던 것은 이 어항을 부수는 상징적이며 실제적인 제의에 해당한다. “나를 낳은 땅의 흙이 내 상처난 혈관 속으로 스며들어오게 하”려는 자흔의 갈망은 자흔이 잃은 것이 무엇인지, 그녀의 ‘태생의 몸’이 어떤 방식으로 회복될 수 있는지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여수의 사랑」은 자흔의 이야기를 한 축에, ‘나’의 이야기를 다른 한 축에 둔다. 외형상 이 소설은 짧은 여로형의 소설로, ‘내’가 ‘자흔’의 몫까지 대신해 서울에서 여수까지 기차를 타고 가는 몇 시간 동안에 둘의 슬프고 위태로운 삶의 여정을 압축한다. 자흔의 이름자인 기쁠 흔(欣)자처럼 기쁠 수는 없는 이 여정을 우울하면서도 섬세하게 그려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나’와 ‘자흔’은 본질적으로 다른 사람이 아니다. 이 둘은 상처의 쌍생아이며, 세계로부터 내쳐진 불행의 소울 메이트이다. 이들은 소설에서 각기 다른 인물로 설정되었을 뿐, 한 존재 안에 공존하는 두 개의 자아라고 해도 무방하다.
바다를 향한 절벽 위에 세워진 향일암 앞의 그림 같은 마을 풍경,
△ 바다를 향한 절벽 위에 세워진 향일암 앞의 그림 같은 마을 풍경,
‘나’와 자흔이 떠나왔고 다시 돌아가는 여수의 문턱, 여수역
△ ‘나’와 자흔이 떠나왔고 다시 돌아가는 여수의 문턱, 여수역
그녀를/들을 찾아 5월의 햇살이 투명한 여수역에 내렸을 때, 초고속열차 KTX의 선전 플래카드를 두른 현대식 역사는 ‘자흔’과 ‘나’의 여수와는 아주 먼 곳에 있는 듯했다. 때마침 불어온 신록빛 산들바람이 비릿한 갯내음을 실어다 주지 않았다면, 녹슨 철선들이 상처 입은 목소리로 울어대는 항구 도시 여수의 비애를 실감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약간의 과장을 동원한다면, 여수가 실제의 공간으로 내 앞에 펼쳐졌을 때 ‘자흔’과 ‘나’와 나는 따로 구별 없이 한 몸 안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기차 안에 버려진 ‘자흔’과 아버지의 동반자살에 희생될 뻔한 ‘나’의 목소리가 그 밝고 현대적인 풍광 속에서 불현듯 흘러 나왔기 때문이다.
……세상에 있는 모든 물은 바다로 흘러가고, 그 바다는 여수 앞바다하고 섞여 있어요.
오동도에 가봤어요? 오동도의 동백나무들은 언제나 나무 껍질 위로 뚝뚝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 같아요……
……여수가, 여수가 울고 있는 것 같아요. (pp. 27~28)
세상의 모든 물이 흘러드는 바다와 섞인 ‘여수 앞바다’의 강한 흡인력은 소설 곳곳에 드리워진 말줄임표를 따라 여수항에 정박한 철선들 사이에서 요동치고 있었다. 눈부신 에메랄드빛 하늘 아래 물결은 얼어붙은 듯 잔잔했는데도, 거기에는 자흔의 눈빛처럼 “형언할 수 없는 쓸쓸함이 아득하게 배어 있었고, 여수가 통째로 소리 없이 울고 있는 형국이었다. 관광객들 사이에서 여수를 고향이라 상상하며 홀로 오동도의 동백나무 숲길을 걷고 있는 자흔의 모습이 아른거렸고, 아버지에 의해 집어던져진 바닷속에서 정신없이 짠물을 들이켜고 있는 어린 ‘나’의 고통이 목 안에서 뻑뻑하게 느껴져 왔다. 자흔이 처음으로 사랑한 대학생이 좋아한 책의 한 구절도 어디선가 들려왔다. “사랑이여, 그대는 내 영혼이 애타게 갈망하는 모든 것……”.
자흔이 매일 「하바네라」(가곡 『카르멘』 중)를 들으며 견딘 것은 대상을 잃은 사랑의 무한한 슬픔과 공허였다. “천 년이나 이천 년쯤 온 세상을 떠돌아다닌 사람처럼 외로워하”는 자흔이 “모든 것에 지쳤으나 결코 모든 것을 버리지 않은 것 같은 무구하고도 빛나는 웃음”을 짓는 것은 이 슬픔과 공허에서 기인한다.
만일 그대가 날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도 나는 그대를 사랑하오.
하지만 만일 그대가 날 사랑한다면 지금 이 순간 나에게 달려와주오!
세상에서 처음으로 사랑한 남자마저 다른 여자를 사랑하고 있는 현실에 부딪친 자흔이 “천 년이나 이 천 년을 산 것”처럼 지친 표정을 갖게 된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매일 똑같은 음악을 틀어대는 것을 질려하는 ‘나’에게 자흔은 겨우 이렇게 맞설 뿐이다. “……여수로 가면, 나한테도 음악 같은 건 필요 없어요”.
한강의 「여수의 사랑」의 마력은 아무런 잘못 없이 버려진 자들, 세상으로부터 사랑 받지 못한 자들의 아픔을 치명적일 정도로 끝까지 드러내는 데 있다. 자흔에게서 “스물다섯 살의 나이로 세상을 등진 어린 어머니의 아련한 품속”을 느끼며, “수천 수만의 물고기 비늘들이 떠올라 빛나는 것 같던 봄날의 여수 앞바다처럼 자흔의 가슴은 다사롭고 푸근하다”고 생각하는 ‘나’는 자흔에게 떠나지 말라고 애원하지만, 자흔은 끝내 떠나고 만다. “그래요, 가지 않을게요”라는 약속을 가차없이 저버리고.
하여, 여수를 향해 떠나는/돌아가는 것은, 그리하여 마침내 이 소설을 완성하는 것은 자흔이 아닌 ‘나’의 몫이 된다. 자흔 역시 어디에선가 여수를 향해 하염없이 떠나고/돌아가고 있을 터이지만 말이다.
여수, 마침내 그곳의 승강장에 내려서자 바람은 오래 기다렸다는 듯이 내 어깨를 혹독하게 후려쳤다. 무겁게 가라앉은 잿빛 하늘은 눈부신 얼음 조각 같은 빗발들을 내 악문 입술을 향해 내리꽂았다. 키득키득, 한옥식 역사의 검푸른 기와지붕 위로 자흔의 아련한 웃음소리가 폭우와 함께 넘쳐흐르고 있었다.

- 한강,「여수의 사랑」, 끝 부분
여수에 가면, 그녀들을 대신해 울어주는 ‘눈부신 얼음 조각 같은 빗발’이 내리꽂힌다. 오월의 연둣빛 햇살 속에서도 예외는 없다. 오동도의 동백나무 숲길에서도, 대웅전 앞마당이 안개와 섬들의 바다인 향일암에서도, 여수만을 따라 펼쳐진 그림 같은 마을들에서도 내내 그러하다. 그 중에 어느 곳인가가 그녀들의 고향일 것이며, 그 곳에 이르러 그녀들은 비로소 온몸의 상처를 내려놓고 끝까지 무너져 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처럼 온전히 무너지기에 여수는 더할 수 없이 완벽한 곳이다. 이 완벽함이 아름다움의 다른 이름임을 덧붙일 필요도 없이.
여수의 사랑-한강
떠나고, 버리고, 방황하고, 추락하고,
이 세상에 없는 것들을 그리워하는 인물들을 통해
존재의 ‘살아 있음’을 일깨운다.

외롭고 고단하고 슬프면서도 아름다운 삶을 그려냈다.
글과 사진
김수이 _평론가, 경희대 교양학부 교수. 1968년생.
평론집『환각의 칼날』, 『풍경 속의 빈 곳』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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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4-08-05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