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대 달문의 숨은 조선사

과거를 돕는 사람, 거벽

광대 달문의 숨은 조선사 8. 과거를 돕는 사람, 거벽
8.과거를 돕는 사람, 거벽 보름달이 휘영청 뜬 밤중에 지친 표정의 달문이 길을 걷고 있는 중이다. 달문 : (한숨을 쉬면서) 지친다. 지쳐! 오늘은 또 어디서 머물지? 이리저리 둘러보던 달문은 커다란 기와집 대문 앞에 선다. 달문 : 잠시만 실례하겠습니다! 달문이 외치자 대문이 살짝 열리면서 집사 같은 이가 고개를 내민다. 집사 : (위아래로 살펴보면서) 뉘슈? 달문 : 지나가는 과객인데 밤이 어두워져서 신세를 질까 하오만... 집사 : 아니! 여기가 무슨 여관인줄 아슈? 냉담하게 쏘아붙인 집사가 쾅 소리가 나도록 대문을 닫아버린다. 굳게 닫힌 대문을 본 달문이 한숨을 쉬고 돌아서는데 갓과 도포차림의 젊은 선비가 말을 건넨다. 선비 : 혹시 머물 곳을 찾으십니까? 달문 : 그렇습니다. 먼 길을 걸어서 배도 고프고 지쳤는데 어디 쉴 곳이 없습니다. 그려. 달문의 하소연을 들은 선비가 조심스럽게 말한다. 선비 : 누추하지만 제 집으로 가시겠습니까? 달문 : (눈을 반짝거리면서) 어딥니까? 장면이 바뀌고 좁고 허름한 방 안에서 달문이 허겁지겁 밥을 먹는 중이다. 선비가 웃는 표정으로 말한다. 선비 : 반찬이 형편없어서 죄송합니다. 달문 : 시장이 반찬이지요. 달문이 포만감에 가득한 표정으로 숟가락을 내려놓자 선비가 다정한 표정으로 말한다. 선비 : 맛있게 드셨습니까? 그럼 푹 쉬십시오. 달문 : 아이고, 감사합니다. 선비가 나가고 혼자 남은 달문은 바닥에 벌렁 눕는다. 달문 : 청나라에 국서도 전달했고, 이제 임금한테 아버지의 행방만 알면.... 깊은 밤, 문 밖에서 어떤 여인이 흐느껴 우는 소리가 들린다. 귀가 번쩍 뜨인 달문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다. 뒤뜰에서 홀로 우는 늙은 여인을 본 달문이 조심스럽게 다가간다. 달문 : 무슨 일로 한 밤중에 그리 슬피 우십니까? 그러자 깜짝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돌린 늙은 여인이 한숨을 쉰다. 여인 : 잠을 방해했군요. 아무 일도 아닙니다. 들어가 쉬십시오. 달문 : 울음소리가 하도 슬퍼서 나와 봤습니다. 혹시나 도울 수 있는지 모르니까 사연을 들려주시지요.
광대 달문의 숨은 조선사 8.왕의 공간, 규장각-2
그러자 여인이 불이 환하게 켜진 방을 바라보면서 입을 연다. 방문으로는 글을 읽는 선비의 실루엣이 보인다. 여인 : 아들이 내일 과거 시험을 보러갑니다. 아비가 일찍 세상을 떠나고 온갖 고생을 하면서도 글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지요. 달문 : 심성이 착하고 영특하니 반드시 과거에 합격할 겁니다. 여인 : (왈칵 울면서) 그래야 하는데... 달문 : 저녁도 대접 받고 하룻밤 신세를 졌으니 제가 도와드리고 싶습니다. 과거 시험 날 아침, 달문이 갓과 도포 차림으로 떠날 차비를 한 선비 앞에 선다. 달문 : 어머님에게 얘기를 들었습니다. 거벽 노릇을 해야 한다고요? 선비 : (힘없이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저도 과거를 봐야 하지만 심 대감의 뜻을 거스를 수가 없어서요. 옆에서 지켜보던 여인이 와락 눈물을 흘린다. 그러자 달문이 선비의 손을 잡으면서 말한다. 달문 : 제가 도와드릴 테니까 염려 마십시오. 선비 : (의아한 표정으로) 어떻게 돕는다는 말씀이십니까? 달문이 선비의 모습과 똑같이 변신하고는 히죽 웃는다. 달문 : 선비님은 따로 시험을 보십시오. 심 대감 아들한테는 제가 가겠습니다. 어안이 벙벙한 표정의 여인과 선비를 뒤로 한 채 달문이 싸리문 밖으로 나선다. 다음날, 시끌벅적한 과거시험장 앞에서 어제 달문을 문전박대한 집사가 초조한 표정으로 왔다 갔다 한다. 그때 멀리서 선비가 달려온다. 집사 : (짜증이 난 표정으로) 왜 이렇게 늦었느냐? 선비 : (고개를 조아리면서) 밤늦게 까지 글공부를 하느라 늦었습니다. 집사 : 얼른 따라오게 선비 : 알겠습니다. 선비가 집사를 따라 과거시험장 안으로 들어간 직후 같은 얼굴을 한 선비가 나타난다. 시장바닥 같은 과거 시험장에는 멍청해 보이는 부자 집 도련님이 앉아있다. 선비를 데리고 온 집사가 굽실거리면서 말한다. 집사 : 도련님. 거벽(巨擘)을 데려왔습니다. 거벽 : 원래는 학식이 높은 전문가라는 뜻이지만 과거시험장에서 응시자 대신 답안지를 지어주는 사람을 지칭하기도 한다. 도령 : (심드렁한 표정으로) 그래? 그럼 어서 답안지를 적어서 사수(寫手)에게 넘겨주어라. 사수 : 거벽이 지은 글을 옮겨 적어주는 사람 그렇게 선비가 열심히 도령 옆에서 글을 적는 사이 또 다른 선비는 멀찌감치 자리를 잡고 앉아서 과거에 응시중이다. 선비는 붓을 잡고 종이에 글씨를 써내려간다. 한편, 선비로 변신한 달문도 열심히 글씨를 써서 사수에게 건넨다. 그 사이, 심 대감 아들은 코를 드르렁거리면서 졸고 있었다. 달문 :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이런 작자들이 관직에 오르니까 임금이 애를 써도 나라가 이 모양이지. 며칠 후, 관청의 담벼락에 과거합격자 명단이 붙는다. 사람들이 시끌벅적하게 떠드는 가운데 선비와 여인, 달문이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명단을 살펴본다.
광대 달문의 숨은 조선사 8.왕의 공간, 규장각-3
달문 : (손가락으로 명단 중간을 가리키면서) 저기 있네요. 명단에서 이름을 확인한 여인과 선비가 와락 끌어안고 펑펑 운다. 그때 허겁지겁 달려온 심 대감의 집사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다. 집사 : 아니, 우리 도련님 거벽 노릇을 한 자네가 어떻게 과거 시험을 본 건가? 그러자 달문이 썩 나선다. 달문 : 귀신이 대신 시험을 쳐줬나 보지요. 아무튼 여기 계신 선비님은 과거에 합격한 몸이니 함부로 말하지 마시구려. 집사 : (뒤통수를 긁으면서) 그, 그렇긴 하지. 아무튼 축하하네. 집사가 꽁지가 빠지게 도망치자 선비가 달문의 손을 와락 잡는다. 선비 :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달문 : 열심히 공부하고 착한 사람이 당연히 과거에 합격해야 하는 법이지요. 이제 한양에 올라가서 책문(策問)을 봐야 하지요? 저도 한양에 가는 길이니 같이 올라가시지요. 책문 : 과거시험의 마지막 단계로 임금이 제시한 문제를 직접 답변하는 방식으로 치러진다. 선비 : (감격한 표정으로) 길동무까지 해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그렇게 한양으로 올라온 선비는 정조 앞에 나선다. 선비가 올린 답안지를 본 정조가 흡족한 표정을 짓는다. 정조 : 과인의 마음을 이리 잘 헤아리다니 나라에 큰 인재를 얻었구나. 그나저나 너를 도와준 사람이 달문이라고 했느냐? 선비 : 그렇사옵니다. 대답을 들은 정조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거린다. 그러자 곁에 서 있던 박제가가 봉투를 선비에게 건넨다. 정조 : 달문에게 이 봉투를 전하여라. 그리고 그와 함께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그대에게 관직을 내리겠노라. 봉투를 받아든 선비가 조심스럽게 묻는다. 선비 : 무슨 일이옵니까? 정조 : 그의 아비를 찾는 일이다. 우리 전하께서 임어(臨御)하신 이래 선비들의 추향(趨向)을 바루고 과장(科場)을 엄히 하는 것을 급선무로 삼고 있습니다만, 세상에서 일컫고 있는 거벽(巨擘)의 폐단을 모두 혁신시키기를 보장하기는 어렵습니다. (중략) 연전(年前)에 홍술해(洪述海)가 반시(泮試)를 주관할 적에 글로써 뽑지 않고 먼저 사람을 물색(物色)하여 뽑았으므로 피선(被選)된 사람이 반은 글도 모르고 글씨도 못 쓰는 사람들인데, 입에서 아직도 젖내가 나는 어린아이인 윤태연(尹泰淵)의 사위도 모두 외람되이 합격되었으니, 홍술해가 고관(考官)으로 있었던 반상(泮庠)637) 의 두 번 시험은 일체 아울러 삭방(朔榜)시켜야 합니다. 정조 1년 (1777년) 1월 29일자 조선왕조실록 기록 중
정명섭
그림
철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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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5-11-25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