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왕의 공간, 규장각 창덕궁 후원의 규장각이 보인다. 규장각 안에서 홀로 앉아있던 박제가가 책을 읽고 있는데 문이 열린다. 곤룡포를 입은 정조였다. 그러자 그가 황급히 책을 덮고 일어난다. 박제가 : 전하. 기별도 없이 어인 일이십니까? 박제가 - 조선 후기 실학자. 청나라에 여러 차례 다녀왔으며 [북학의]를 쓴 저자로도 유명하다. 정조의 명으로 규장각에서 검서관으로 일했다. 정조 : (빙그레 웃으며) 과인이 객래불기(客來不起)라 하였거늘 어찌 일어난단 말이냐? 객래불기(客來不起) 손님이 와도 일어나지 말라는 뜻 정조 - 조선의 22대 임금.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죽음을 딛고 임금의 자리에 올라 선정을 베푼다. 개혁정책을 통해 조선을 부강하게 만들려고 애쓴다. 박제가 : (고개를 조아리면서) 상감마마를 어찌 손님과 같이 생각하겠습니까? 가볍게 웃은 정조가 맞은 편 의자에 앉자 박제가도 따라서 앉는다. 따라온 내관이 문을 닫고 나가자 안에는 두 사람만 남는다. 책이 가득 쌓인 규장각을 둘러본 정조가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정조 : 과인이 즉위하자마자 규장각을 세운 뜻을 알고 있는가? 박제가 : 선대 임금의 글들을 모아놓기 위해 만드신 곳입니다. 하지만 그런 뜻만 있었다면 창덕궁의 후원에 두실 리가 없으셨지요. 정조 :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과연 초정(楚亭 : 박제가의 호)이로군. 이 공간은 짐에게는 특별한 곳일세. 조정은 당파 싸움으로 어지럽네. 다들 자기 이익에만 눈이 멀어있을 뿐 나라의 운명에 관해서는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지. 박제가 :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정조 : 사람을 뽑으려고 해도 임금보다는 당파를 먼저 생각하지 않나. 그래서 당파에 휘둘리지 않는 젊고 참신한 인재를 뽑아서 법고창신(法古創新) 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네. 법고창신(法古創新) 옛 것을 본받아 새로운 것을 만들어낸다 정조 : (규장각 내부를 둘러보며) 이 곳이라면 가능하리라 생각했고, 그래서 자네를 이곳에 데려온 것일세. 박제가 : 부족한 신을 아껴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정조 : 그리고 이곳에 규장각을 세운 이유가 또 하나 있지.
정조가 잠시 과거로 돌아간다. 늙은 영조의 손을 잡고 규장각이 있던 자리에서 연못인 부용지를 내려다보던 어린 정조가 눈물을 흘린다. 어린 정조 : (흐느껴 울면서) 아버지. 그러자 늙은 영조가 고개를 돌린다. 영조 : 아버지 생각이 나느냐? 어린 정조가 영조의 눈치를 보다가 어렵게 고개를 끄덕거린다. 그러자 영조가 한숨을 쉰다. 영조 : 정말 미안하구나. 나도 아들이 보고 싶어질 때면 이곳에 와서 실컷 울고 간단다. 그러니 너도 이곳에 와서 실컷 울고 가거라. 영조의 얘기를 들은 어린 정조가 털썩 주저앉아서 목 놓아 아버지를 부른다. 현재로 돌아온 정조의 눈가는 촉촉이 젖어있다. 정조 : 과인이 쓸데없는 얘기를 했군. 박제가 : 아니옵니다. 신도 전하께서 사도세자 저하를 얼마나 그리워하시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저하(邸下) 조선시대 왕세자를 높여 부르는 말 정조 : 이 공간은 조선에게도 그리고 과인에게도 뜻 깊은 곳일세. 그러니 자네도 이 나라를 위해서 애써주게. 박제가 : 중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서자인 소신을 규장각 각신으로 삼아주신 것을 잘 알고 있사옵니다. 정조 : 참, 과인이 이곳에 온 것은 자네와 상의할 일이 있어서라네. 박제가 : 하명하시옵소서. 정조 : 듣자하니 청나라 북경에 서양의 천주교 신부들이 많이 활동한다고 들었네. 박제가 : 그렇습니다. 명나라 때 들어온 탕약망(湯若望)이 역법으로 이름을 떨쳤습니다. 돌아가신 소현세자 저하께서도 북경에 계실 때 그를 만났다고 들었습니다. 탕약망(湯若望) 독일의 예수회 선교사 아담 샬의 중국식 이름 정조 : 서양의 기술은 청나라보다 우월하다고 들었네. 그 기술을 받아들인다면 우리 백성에게도 큰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 박제가 : (주저하다가) 그렇긴 합니다만 중신들이 가만있겠습니까? 정조 : 과인도 그게 걱정이네. 일단 청나라에 사람을 보내서 그들과 연락하는 것이 좋겠는데 적당한 사람이 있겠느냐? 박제가 : 신이 갔다 오겠습니다. 청나라에 이미 여러 번 갔다 왔습니다. 정조 : (고개를 저으며) 자네는 이곳에서 할 일이 많네. 거기다 공식적인 사신단이 아니기에 따로 보내야 하는데 자넬 보낼 수는 없지.
박제가 : (말끝을 흐리면서) 그럼.... 그때 책 더미 건너편에서 달문의 목소리가 들린다. 달문 : 뭘 그렇게 고민하십니까? 제가 갔다 오겠습니다. 정조와 박제가 : (깜짝 놀란 표정으로) 누, 누구냐! 그러자 달문이 책 더미 너머에서 얼굴을 쏙 내민다. 달문 : 저 말씀이십니까? 재주면 재주, 만담이면 만담, 풍자면 풍자! 못하는 게 없는 조선 최고의 광대 달문입지요. 달문이 이리저리 재주를 부리다 뿅하고 정조 앞에 나타난다. 그리고는 살짝 시크한 표정으로 말한다. 달문 : 이곳 후원의 풍경이 좋다고 해서 놀러왔다가 낮잠을 자러 들어왔습지요. 정조 : 네가 바로 달문이로구나. 소문은 많이 들었다. 그래 청나라로 가주겠다고? 달문 : 조선 팔도에 안 다녀본 곳이 없습니다. 심심하기도 하고 슬슬 해외 진출을 해볼 때도 된 것 같아서 말입니다. 달문의 말을 들은 정조의 눈빛이 반짝거린다. 정조 : 옳거니, 광대라면 아무도 왕명을 받고 움직인다고 생각하지는 않겠지. (박제가를 돌아보면서) 자네 생각은 어떤가? 질문을 받은 박제가도 같은 생각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거린다. 박제가 : 신도 같은 생각입니다. 범상치 않은 재주를 가진 자가 제 발로 찾아왔으니 하늘이 도운 것이 틀림없습니다. 정조 : (흡족한 표정으로 소매에서 봉투를 하나 꺼낸다) 이걸 북경의 서양 선교사에게 건네주어라. 봉투를 받은 달문이 묻는다. 달문 : 안에 뭐가 들어있습니까? 정조 : 서양의 기술을 배우고 싶다는 뜻을 전하는 내용이니라. 이걸 건네주고 답장을 가지고 돌아오면 과인이 큰 상을 내릴 것이다. 달문 : (봉투를 건네받으면서) 상은 필요 없고, 대신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정조 : 뭐든 들어주겠노라. 달문 : 제 아버지를 찾습니다. 옥자 춘자를 쓰시는데 전옥서에 계셨다가 어디론가 사라지셨습니다. 정조 : (표정이 어두워지면서) 옥춘이라... 달문 : 제가 광대가 된 것도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아버지를 찾기 위함입니다. 제 청을 들어주실 수 있으신지요. 달문의 채근에 정조가 대답한다. 정조 : 그리하겠노라. 달문 : (헤벌쭉 웃으면서) 그럼 얼른 다녀오도록 하겠습니다. 달문이 재주를 넘으면서 책 더미 너머로 사라져버린다. 그러자 박제가가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 박제가 : 전하. 옥춘이라는 자를 아십니까? 정조 :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안다고도 할 수 있고, 모른다고도 할 수 있지. 일단 달문이 돌아온 다음에 얘기해도 늦지 않네. 끝
- 글
- 정명섭
- 그림
- 철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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