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의 여로

태양의 저쪽, 밤의 이쪽 - 헤밍웨이 소설의 공간들

태양의 저쪽, 밤의 이쪽, 헤밍웨이 소설의 공간들 : 시카고, 킬리만자로, 아바나, 파리
태양의 저쪽, 파리에서 시카고에 이르는 길
디트로이트에서 시카고행 비행기에 오를 때까지만 해도 그의 고향집을 찾아가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파리에서 뉴욕으로 건너가 두 달 여 체류하던 중, 열흘 동안 오대호 연안의 디트로이트와 앤 아버, 그리고 시카고를 돌아보는 여정에 올랐다. 이들은 오대호 연안의 도시들이지만 앞의 두 도시는 미시건 주에 속했고, 뒤의 시카고는 일리노이 주에 속했다. 헤밍웨이는 프랑스에서의 발자크와 위고처럼, 어디를 가나 우연찮게 맞닥뜨리곤 하는 역동적인 인물이었다. 19세기 작가 발자크와 위고의 족적이 파리와 프랑스 권역에 국한되어 있다면, 20세기 작가 헤밍웨이의 그것은 세계를 무대로 펼쳐져 있었다. 나는 여러 해 동안 유럽과 아메리카, 그리고 아프리카에 갈 때마다 헤밍웨이를 만났고, 그것은 그대로 그의 소설 속에서 연장되곤 했다. 어느 곳은 의도적으로 찾아갔고, 어느 곳은 우연히 눈에 띄어 발견한 곳이었다. 우연한 발견이라고는 해도 내 행동 반경이 그의 영역을 벗어나지 않았으므로 그와의 만남은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헤밍웨이의 공간을 찾아가려고 처음 마음에 품은 것은 2006년과 2009년, 뉴욕에 머물던 여름이었다. 플로리다 마이애미에서 배를 타고 키웨스트에 가고자 했다. 그러나 그 즈음 멕시코에 닥친 조류독감과 태풍으로 계획은 번번이 불발되었다. 이듬해 여름 문학심포지엄 참석차 아프리카 케냐에 갔고, 킬리만자로의 산록에 이르렀다. 암보셀리는 헤밍웨이가 몇 차례 머물던 장소였고, 그의 「킬리만자로의 눈(雪)」의 무대였다. 그리고 지난 해 겨울, 역시 문학행사의 일환으로 멕시코와 쿠바를 방문했다. 아바나에서 『노인과 바다』의 무대인 코히마르라는 자그마한 어촌과 근처 작가가 살았던 핑카 비히아(전망 좋은 목장이라는 뜻)를 둘러보았다. 아바나 시내의 집필실이었던 암보스 문도스 호텔과 그의 단골 술집 보데기타 데 메디오에 발을 들여놓았고, 멕시코 만류와 대서양, 카리브해의 물결이 어우러지는 마리나 헤밍웨이에 머물면서 쿠바에서의 헤밍웨이의 행적을 뒤쫓았다. 킬리만자로와 아바나는 헤밍웨이와 그의 소설을 대표하는 장소, 그러나 일반 여행자로서는 쉽게 도달할 수 있는 지역이 아니었다. 이 두 곳을 다녀왔기에 파리와 유럽에 퍼져 있는 그의 족적들에 잠시 무심해져 있었던 것일까. 두 곳에 대한 스케치를 글과 사진으로 발표했던 터라, 나는 잠시 헤밍웨이로부터 벗어나 있었다. 이때 내 앞에 새롭게 등장한 것이 시카고의 오크파크였다.
창공을 가로질러 미시건 호수를 건너다
디트로이트에서 앤 아버를 거쳐 암트랙(기차)을 타고 시카고까지 갈 수 있었으나, 광대한 미 대륙에서의 기차 여행에 익숙하지 않았던 나는 앤 아버에서 디트로이트 공항으로 되돌아와 시카고행 비행기를 탈 수밖에 없었다. 포드와 지엠의 본사가 있는 디트로이트는 과거 미국의 5대 거대 도시 중의 하나였으나 내가 방문했던 지난 6월에는 파산 직전 암흑 도시로 변해 있었다. 거지와 실직자들이 유령처럼 떠도는 디트로이트의 거리로 나가지 못한 채, 밤이면 호텔방 창문으로 디트로이트강과 그 너머 캐나다 온타리오주의 윈저시를 밝히는 카지노 불빛을 바라보곤 했다. 디트로이트에서 보낸 나흘은 안타까움과 두려움, 그리고 서글픔이 교차하는 묘한 시간이었다. 복잡미묘한 감정에 너무 휘둘린 나머지 디트로이트에서 우여곡절 끝에 앤 아버행 암트랙에 올라탔을 때에는 어떤 안도감마저 느꼈다. 암트랙으로 한 시간 여 거리였으나 미시건대학 캠퍼스로 이루어진 앤 아버는 디트로이트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유럽의 한 구역을 옮겨놓은 듯한 다운타운의 식당가에서 오대호(Great lakes)에서 자라는 화이트피쉬로 저녁식사를 했다.
하늘에서 본 미시간 호수
△ 하늘에서 본 미시간 호수
오대호는 미시건호와 휴런호를 비롯 다섯 개의 호수로 이루어진 거대 호수, 내가 맛본 화이트피쉬가 미시건호에서 잡은 것인지 휴런호에서 잡은 것인지 확실하지 않았다. 바닷가에 살고 있을 뿐 아니라 여러 대양의 생선 맛을 기억하고 있는 내게 화이트피쉬는 담백할 뿐, 깊은 인상을 주지 못했다.

디트로이트 공항에서 시카고까지 암트랙으로는 5시간, 비행기로는 한 시간 거리였다.
그것은 미시간 호를 건너는 시간과 거의 일치했다. 나는 기내 창으로 호수를 내려다보았다. 그것은 호수라기보다 대양(大洋)이었고, 거대한 파랑의 세계였다. 곧 착륙한다는 기내 방송이 울렸고, 나는 공항에서 찾아갈 미시간 호수 근처의 숙소를 떠올렸다. 그때 헤밍웨이의 짧은 단편 한 편이 뇌리에 스치듯 지나갔다.

「미시건 북쪽에서」라는 작품이었다. 이 작품은 헤밍웨이가 《토론토스타》 특파원 자격으로 1921년 파리로 건너가 취재 일을 하며 작가의 꿈을 키우던 시절에 쓴 소품으로, 그의 첫 단편집 『우리 시대에』에 수록되어 있다. 나는 헤밍웨이가 평생에 걸쳐 쓴 70여 편의 단편들 가운데 이 작품을 좋아했다. 헤밍웨이가 이십대 초반 습작기에 쓴 이 작품은 어린 시절 가족 별장이 있던 미시건 호수 북쪽의 야생적인 자연을 무대로 삼고 있었다. 소품이지만 ‘진실한 문장 한 줄’ 쓰기를 글쓰기의 최고 덕목으로 삼았던 신인 시절의 작품답게 야성적 에너지와 절제된 문장이 발휘된 아름다운 작품이었다.
헤밍웨이 소설의 요람, 시카고 오크파크 빌리지 · 북 오크파크거리 339번지
북 오크파크거리 339번지 - 헤밍웨이 생가
△ 북 오크파크거리 339번지 - 헤밍웨이 생가
시카고 미시건 호숫가에 여장을 푼 지 나흘 째 되는 날 오후, 교외 열차를 타고 오크파크로 향했다. 단순한 여행으로 시카고에 간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주어진 취재를 수행하는 닷새 동안 호시탐탐 오크파크에 닿을 방법을 찾았다. 맨해튼의 마천루와 경쟁이라도 하듯 미시건 호를 따라 펼쳐지는 시카고의 빌딩들은 하나같이 건축 미학을 뽐내고 있었다. 마천루라는 개념이 시작된 곳이 시카고였다는 사실이 새삼 환기되었다. 떠나온 디트로이트의 암울한 환영이 시카고의 빛나는 유리빌딩에 투사되었다. 시카고에는 세계적인 다국적 기업의 본사가 여럿 있었고, 어디를 가나 창업을 향한 젊고 창조적인 분위기가 넘쳤다. 헤밍웨이와 파리시절을 공유하고, 한 발 앞서 스타 작가가 되었던 피츠제럴드가 『위대한 개츠비』에 등장시킨 시카고의 부호 톰 뷰캐넌만 보더라도 시카고의 경제적 위력을 가늠할 수 있었다.

시카고 시내에서 그린 라인을 타고 20여 분 달리자 오크파크(Oak Park) 역에 도착했다.
개찰구를 찾아 계단으로 내려가자 익숙한 얼굴이 기다리고 있었다. 헤밍웨이가 태어나고 자란 마을답게 그의 얼굴을 큼지막하게 확대하여 그의 생가와 함께 역사(驛舍) 벽에 홍보하고 있었다. 역사를 빠져나오자 6월임에도 한 여름 태양이 정수리를 뜨겁게 내리쬐었다.

헤밍웨이 박물관과 생가(339 N. Oak Park Av.)를 향해 북 오크파크거리를 걸었다. 역무원에게 주소를 보여주자 역에서 멀지 않은 거리에 있다고 했다. 도로 표지판 옆에 헤밍웨이 구역이라는 표시가 있었다. 가로수들은 울창했고, 넓은 정원을 거느린 이층 주택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헤밍웨이 사후, 유작으로 출간된 자전에세이 『파리는 날마다 축제(A Moveable feast)』에 따르면, 그가 태어나던 1899년과 청소년기를 보낸 1917년까지의 오크파크 빌리지는 시카고에서 14.5킬로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지만 1973년까지 레스토랑과 주류 판매가 금지되었을 정도로 매우 보수적인 마을이었다.
오크파크 빌리지 헤밍웨이 박물관
△ 오크파크 빌리지 헤밍웨이 박물관
헤밍웨이의 유년시절을 상상하며 북 오크파크 거리를 걷다보니 금세 헤밍웨이 문학관(200, N. Oak Park Av.)에 이르렀다. 연대기적으로 잘 전시되어 있는 문학관보다 작가가 세상에 처음 등장한 생가(生家)에 먼저 가보고 싶었다. 자원봉사자인 듯한 노인들이 문학관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빨간색 재킷으로 성장을 한 백발의 노부인이 마침 문학관에서 나오면서 작가의 생가를 알려주겠다며 앞장섰다. 문학관 건너편에 호텔이 있었고, 1층에 헤밍웨이 비스트로가 눈에 띄었다. 캐나다 출신의 노부인은 교사 출신으로 삼십년 째 그 마을에 살고 있으며 문학관을 자주 이용한다고 했다. 노부인의 이야기를 들으며 걷는 사이 339번지 헤밍웨이의 생가에 도착했다. 정원에 두 그루의 고목이 서 있는 하얀 페인트칠이 된 빅토리아풍 2층 목조 건물이었는데, 지붕 밑 공간까지 합치면 3층에 가까웠다. 문학관에서 연락을 받았는지, 노부인이 입구 안락의자에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다가 아주 느리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를 그리로 인도한 노부인보다 더 연로하셨고, 거동이 불편해 보였다.
헤밍웨이는 북 오크파크 거리 339번지에서 1899년 태어나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제1차 대전에 참전, 야전병원 지원병으로 1년간 이탈리아로 떠난 것을 제외하고 1920년 토론토로 떠나기 전까지 이 집에서 살았다.

이 집에서 내가 주목한 것은 1층의 응접실과 서재, 그리고 2층의 어머니와 아버지의 방이었다. 응접실에는 예술 애호가인 성악가 어머니의 취향이 드러나듯 피아노가 놓여 있었고, 의사인 아버지가 찍은 가족사진들이 벽과 피아노 위에 장식되어 있었다. 어머니는 헤밍웨이에게 첼로 레슨을 받게 해주었고, 예술에 눈을 뜨게 해주었다. 예술가 기질이 강한 어머니는 여성의 권리에 대해 일찍부터 교육받은 인물로 묘사된다. 전장에서 돌아온 스무 살의 헤밍웨이를 그녀가 집에서 내보낸 사건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녀는 아들에게 고등학교까지 물심양면으로 헌신적으로 지원했고, 이후 아들이 독립적인 삶을 사는 데 지나칠 만큼 엄격하게 대했다. 그러나 이 어머니가 아들의 행동이 무엇이든지 너그럽게 받아들이고 품에 끼고만 있었다면 오늘날의 헤밍웨이가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집은 외조부의 지원과 주도로 지어진 것이었다. 응접실에 이어진 식당 옆에 위치한 서재는 헤밍웨이 가족이 대단한 독서광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남북전쟁에 참전했던 전력으로 모험과 영웅심에 심취했던 인물로 저녁 식사가 끝난 뒤에는 헤밍웨이네 어린아이들을 모아놓고 전쟁담을 들려주곤 했다. 헤밍웨이 소설이 보여주는 예술지향성과 남성적인 모험담은 어머니와 외조부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2층으로 올라가면 어머니의 침실 옆 작은 방에 요람과 아이들 침대가 놓여 있다. 여섯 명의 자녀 중 네 명이 이 집에서 태어났고, 닥터 헤밍웨이가 직접 자신의 아이들을 받은 것으로 전한다. 어니스트가 입었던 아기 옷과 요람도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아버지의 침실에는 집도하는 장면의 사진과 의사 가운, 의료 기기들과 박제된 새, 인골과 해골이 놓여 있다. 아버지의 방에서 나와 2층 계단을 밟고 내려오다가 다시 올라가 아버지의 방으로 들어갔다. 헤밍웨이의 단편 「의사와 의사 아내」의 한 장면이 떠올랐던 것이다. 마치 취재를 덜 마친 형사의 눈으로 방안을 면밀하게 돌아보았다. 사냥총은 보이지 않았다. 의사와 의사 아내, 그리고 어린 아들 닉이 등장하는 「의사와 의사 아내」는 이들 가족의 일상을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고 엽총으로 끝난 부자(夫子)의 비극적인 최후를 예견하고 있어 섬뜩하다.
의사는 헝겊으로 조심스럽게 엽총을 닦았다. 그리고 탄창의 용수철에 대고 탄환을 도로 밀어 넣었다. 그는 엽총을 무릎에 얹어 놓고 앉아 있었다. 그는 이 총이 무척 좋았다. (……) 날이 무더운데도 숲 속은 시원했다. 닉이 나무에 기대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 「의사와 의사 아내」, 『우리들 시대에』
『우리들 시대에』에 수록된 몇몇 단편들에서 헤밍웨이는 오크파크와 미시건 북쪽 가족 별장이 있던 월룬 호수의 야생적인 자연과 인디언 부락 사람들의 에피소드를 다루고 있다. 이 단편들에 등장하는 아버지는 언제나 엽총과 함께 묘사된다. 「인디언 부락」에서 의사 아버지는 난산으로 죽어가는 인디언 아낙을 위해 어린 아들 닉을 데리고 인디언 부락으로 간다. 제왕절개 수술을 끝내고 나서 아들에게 의사로서의 능력과 보람을 전하는 중에, 뜻밖의 죽음과 맞닥트린다. 아내의 고통스러운 수술을 보다 못한 인디언 남편이 자살을 한 것이다. 아버지는 아들을 데리고 온 것을 후회한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누는 아들과 아버지의 대화는 1928년 엽총으로 자살한 닥터 헤밍웨이의 죽음관이 드러나 있다.
“아빠, 죽는 것은 어려운 일이에요?”
“아니, 꽤 쉬운 일인 것 같구나, 닉. 경우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두 사람은 배에 올라, 닉은 고물에 앉고 그의 아버지는 이물에 앉아 노를 젓기 시작했다. 해가 언덕으로 막 솟아오르고 있었다.

- 「인디언 부락」, 『우리들 시대에』
밤의 이쪽, 헤밍웨이 소설의 성소 · 파리 카르디날 르무안 74번지
헤밍웨이의 첫 번째 단편집 『우리들 시대에』는 파리에서 1924년 첫 출간되었고, 이듬해 미국에서 출간되었다. 이 책에 실린 단편들은 1921년 이후 파리에서 씌어진 작품들이다. 지난 2월 이후 내가 파리에 머무는 동안 내 발길이 주로 닿았던 거리와 서점, 공원과 카페들은 헤밍웨이가 파리 시절 즐겨 찾던 공간들이다. 그는 신문사 특파원이자 국외이주자로 1927년까지 파리에 거주하며 첫 단편집 『우리들 시대에』의 단편들과 첫 장편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를 집필하고, 출간함으로써 작가로서 첫발을 내디뎠다. 헤밍웨이는 파리에서도 라틴 구역이라 일컫는 팡테옹 언덕(생트 주느비에브 언덕) 주위의 5구와 노천 카페와 바들이 즐비한 생제르멩 데 프레의 6구를 좋아했다. 첫 집은 5구(카르디날 르무완느 74번지)에, 두 번째 집은 6구(노트르 담 데 샹 113번지)에 얻어 살았다. 미국 작가들의 대모 거투르드 여사를 만난 곳도, 가난한 그에게 책을 대준 실비아 비치의 셰익스피어앤컴퍼니가 있던 곳(당시 오데옹 거리 12번지)도, 한 살 위의 피츠제럴드를 만난 곳도, 참전 경험이 있는 아일랜드와 영국, 미국 국적의 젊은 작가들(통칭 길 잃은 세대)의 일원으로 술과 춤, 파티로 밤을 보내며 어울린 곳도 이 구역이다.
파리 5구 르무안 74번지 - 헤밍웨이가 파리에서 얻은 첫 집
△ 파리 5구 르무안 74번지
헤밍웨이가 파리에서 얻은 첫 집
이처럼 헤밍웨이의 족적을 특별히 쫓지 않아도 5구와 6구를 오가다보면 헤밍웨이의 이름과 자주 마주치게 된다. 그 중 하나가 팡테옹 언덕으로 올라가는 여러 갈래의 길 중 카르디날 르무안 거리 74번지이다. 그곳은 내가 자주 드나들던 콜레주드프랑스에서 몇 걸음 거리에 위치해 있어서 무프타르 골목의 식당가로 점심식사를 하러 갈 때면 어김없이 이 집 앞을 지나가게 되었다. 그럴 때면 나는 발길을 멈추고 4층 창문을 올려다보곤 했는데, 그곳은 헤밍웨이가 해들리와 결혼해 파리에 정착하면서 처음 세 들어 살던 작은 아파트였다.

파리의 미국인인 그가 그곳에 살면서 첫 번째 시도한 것은 시카고 오크파크 빌리지의 집과 자연, 그리고 사람들을 반추하고, 소설 속에 되살리는 일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곳은 파리에 별처럼 박힌 헤밍웨이의 수많은 족적들 중 내가 가장 기리는 곳이었다. 작가의 꿈을 안고 파리로 건너와 오직 ‘진실한 문장 한 줄’을 위해 나날을 바치던 작가지망생 헤밍웨이의 창작혼이 깃든 성소(聖所)이기 때문이다. 헤밍웨이는 자전에세이 「파리는 날마타 축제」에서 “파리, 내 청춘의 도시, 우리는 가난했지만 행복했다”고 술회하고 있는데, 이 문장은 카르디날 르무안 74번지 벽에 새겨져 있다.
파리의 장소들을 기념하는 협회에서 소개하는 다음과 같은 문구와 함께. “이 구역은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어디나 좋아하던 곳으로, 그의 작품과 문체가 탄생한 바로 그 공간이다. 그는 이웃들과 가깝게 지냈는데, 특히 근처 댄스홀 주인과 그러했다.”
* 이 글을 위해서 E. 헤밍웨이의 『우리들 시대에』(김성곤 옮김, 시공사); 『헤밍웨이 단편선집』(전2권, 김욱동 옮김, 민음사);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김욱동 옮김, 민음사); 『파리는 날마다 축제』(주순애 옮김, 이숲)을 참고했음을 밝힌다.
글과 사진
함정임_소설가, 동아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1964년생.
소설 『이야기, 떨어지는 가면』, 『동행』, 『행복』, 『당신의 물고기』, 『아주 사소한 중독』, 『버스, 지나가다』, 『네 마음의 푸른 눈』『춘하추동』
산문집 『하찮음에 관하여』, 『그리고 나는 베네치아로 갔다』, 『인생의 사용』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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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4-06-13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