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의 여로

대상 잃은 열정과 우울 - 현진건과 부암동

대상 잃은 열정과 우울 현진건과 부암동
자하문 너머, 현진건 집터
자하문 고개를 넘어 부암동 동사무소 옆 골목길로 한 이 백 미터쯤 오르면, 작은 비석이 하나 놓여 있다. 두 갈래길 사이에 놓인 비석 뒤로 누군가 버린 합판과 낡은 세발자전거가 비스듬한 담 사이에 끼여 있다. 반은 무너졌고 반은 담쟁이덩굴에 의지하고 있는 담 너머 그곳은 빙허(憑虛) 현진건 집터다. 무성한 잡풀과 질척질척한 모래더미, 식수로 사용했을 것 같은 산비탈 아래 작은 우물, 샘물이 흘러내리는 도랑을 따라가면, 연못도 하나 있다. 연못에는 누군가 심어놓은 스무 개의 벼이삭이 있고 거기에는 벌써 노란 꽃분이 피어 있다.
집터 표석
△ 집터 표석
현진건과 부암동.

사람이 살았던 빈 집터 만큼 쓸쓸한 풍경이 또 어디 있을까. 가만히 서서 이른 시간에 벌써 저녁 어스름이 내린 곳을 둘러본다. 마당 한 켠에 베어진 은행나무더미가 누렇게 말라있고 그 위에도 덩굴식물들이 자라있다. 어디쯤에 양계장이 있었던 걸까. 생계를 위해 양계를 했던 그는 찾아오는 문인들을 위해 닭을 잡았다고 한다.

그는 아마도 글을 쓰다가 이 시간 즈음에 마당에 서서 마주 보이는 삼각산 봉우리를 바라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산책 삼아 뒷문으로 걸어 나갔을 테고, 바로 옆 집 안평대군 이용의 별장으로 통하는 작은 계단을 서너 발짝 올라갔을지도 모른다. 세종대왕의 셋째 아들 안평대군의 별장이 현진건 집터의 뒷문과 연결된 통로에 있다는 걸 발견한 건 우연이었다. 역사의 현장으로 순간이동을 한 기분이다.
안평대군이 꿈 속 무릉도원자리에 정자를 세운 곳, 그곳이었다. 부암동 ‘무계정사’ 길은 안평대군이 바위에 새긴 ‘무계동’ 에서 비롯된 것이다.

감옥에서 출소한 뒤 동아일보 기자직도 해직된 현진건이 가족을 이끌고 이곳 부암동에 정착하여 역사소설을 쓰기 시작한 것은 필연이었을까. 식민지 말기라는 상황이 현실을 소재로 한 글을 더 이상 쓸 수 없게 만든 것도 이유였겠지만 말이다. 그는 어쩌면 안평대군의 답답함을 이해했을지도 모른다.
현진건은 1937년에서 1940년까지, 부암동에서 살았다. 4년 동안 현진건은 생계수단을 위해 이곳에서 양계를 하였다. 그리고 동아일보에 역사소설 『무영탑』 을 연재하였고, 신문연재를 했던 장편소설 『적도』를 간행하였고, 강제로 중단된 미완의 역사소설 「흑치상치」를 발표하였다. 현진건은 부암동에서 이전에 썼던 「빈처」, 「B사감과 러브레터」, 「운수좋은 날」 과 같은 사실주의 소설과는 다른 역사소설을 썼다. 그는 왜 부암동에서 역사소설을 썼을까. 그리고 그는 왜 부암동으로 이사하게 되었던 것일까. 문인들은 왜 그가 살았던 이전과 그 이후 집보다도 부암동 집을 기억하고 회고하였던 것일까. 부암동과 현진건의 인연에는 4년이라는 짧은 기간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식민지 말기의 시대 상황이 스며들어 있다.
현진건의 집터 가는 길
△ 현진건의 집터 가는 길
현진건은 동아일보 사회부장 재직 중에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말살사건’ 으로 근 6개월의 옥고를 치르고 출소하였다.
이후 동아일보 기자직에서 해직 당하여 생계를 위해 관훈동에서 부암동으로 이사를 왔던 것이다. 양계를 하였던 부암동 집터에는 문인들이 자주 드나들었다. 애초에는 양계 백 수로 근근이 호구지책을 할 수 있는 정도였으나 울적한 빙허를 찾아오는 술친구들로 인해 닭 머리가 점점 줄어드는 난경에 빠졌다 한다. 폭음을 말리는 춘해 방인근에게 “아니야 죽도록 먹어야 해, 술, 술이다” 라고 외쳤다던 그. 그는 울분과 싸우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춘원 이광수의 별장도 당대 친일 권력자들의 별장도 부암동 근처에 있었다. 부암동은 현진건에게 마흔의 고비를 넘기는 즈음에 시작된 새로운 삶의 터전이었다. 그에게 그곳은 별장이 아니었다. 중심에서 벗어나 중심을 바라보는, 중심을 새로이 상상하는 공간이었다. 장편소설『적도』의 주인공 여해처럼 대상 잃은 열정을 승화시키지 않는다면 악해지는 자신을 감당하지 못했을 것이다.
부암동은 그의 소설 속에 없다. 「희생화」의 누이가 사랑을 나누던 남산이나 사직골과 광화문의 어둠처럼, 「운수 좋은 날」의 김첨지가 인력거를 끌던 비 오는 남대문 정거장이나 인사동처럼 그의 작품 속 인물들은 부암동에 가지 않는다. 그러나 부암동에 살았던 그의 삶의 절박성을 조금이나마 느껴볼 수 있다면 그것은 장편소설 『적도』 일 것이다. 『적도』 는 역사소설을 제외하고 현진건이 쓴 마지막 소설이다. 『적도』 에서 현진건은 실패한 사랑의 열정에 대해 말하고 있다. 대상 잃은 열정만큼 처치 곤란한 일은 없을 것이다.

『적도』 는 경성의 부유한 실업가에게 첫사랑 영애를 뺏긴 여해가 5년 동안 억울한 옥살이까지 하고 출소하던 이른 봄날, 남산과 서대문 형무소 주변의 독립문 풍경에 대한 묘사로 시작된다.
무계정사길
△ 무계정사길
‘서울의 봄은 눈 속에서 온다’로 시작되는 『적도』 에는 마음의 정절을 지키며 독립운동가인 '백년낭군'을 기다리는 기생 명화, 실패한 사랑이 모욕이 되는 걸 지켜보는 영애, 여해의 복수로 희생되는 영애의 시누이 은주, 이들의 삼각관계가 식민지 경성을 중심으로 돌고 돈다. 그러나 『적도』 에도 부암동은 없었다. 『적도』 는 현진건이 독립운동을 했던 셋째 형 정건이 3년 옥살이 휴유증으로 사망하고 다음해 형수의 자살을 겪은 후에 쓴 소설이다. 기생 명화의 '백년낭군' 김상열은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하느라 폐병이 생겼고, 그들의 사랑을 위해 여해는 병든 상열을 대신하여 자신이 폭약을 가지고 경찰서에서 자폭한다. 식민지 청년의 순수한 사랑은 감옥에서 모두 썩어버렸고 대상 잃은 위험한 열정으로 변해버렸다. 그리고 그 열정은 스스로를 태우고 타인을 태우는 것으로 변질되지만, 여해의 우울한 열정을 두고 기생의 애인인 독립 운동가는 무쇠와 같은 열정을 개인의 감정에만 쓰지 말 것을 부탁한다. 식민지 청년과 기생의 성인식과 같은 장편소설『적도』이후 현진건은 현실을 소재로 한 소설을 더 이상 쓰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신라 경주를 부암동으로 옮겨온다. 동아일보에 연재되었던 『무영탑』은 당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현진건은 경주 불국사의 석가탑에 얽힌 당나라 석공과 누이의 이야기를 백제 석공과 아내의 애절한 사랑이야기로 바꾸었다. 역사소설에서 역사보다는 창작이라는 예술성에 의미를 둔 현진건은 미완으로 끝난 「흑치상치」 도 부암동에서 썼다. 백제 장군 ‘흑치상치’ 가 의병을 일으켜 당나라 장군 소정방에 항거하여 백제성을 회복했던 사실을 소재로 한 「흑치상지」 는 총독부 경무부의 말썽으로 게재 금지가 되었다.
부암동에서 현진건은 역사소설로 숨 쉴 길을 찾았지만 그 길은 이내 막히고 말았다.
현진건은 양계와 미두(米豆)사업실패로 부암동을 떠났다. 신설동을 거쳐 제기동에서 1943년 마흔 셋의 나이에 현진건은 장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현진건이 숨을 거두던 날 그의 친구 이상화도 숨을 거두었다. 1943년이 그들을 더 이상 살 수 없을 정도로 옥죄어 왔던 것일까. 현진건의 외동딸이자 월탄 박종화의 외며느리인 현화수 여사가 지켜보는 가운데 그는 너무나 젊은 나이 마흔 셋에 눈을 감았다.

부암동은 현진건에게 역사 속으로 들어가는 길을 열어준 곳이다.
창의문
△ 창의문
어둠이 일찍 내리는 부암동에는 카페들이 불을 밝힌다. 갤러리와 카페가 생활공간을 잠식해 들어오는 부암동에서 현진건 집터는 폐허다. 하루라도 빨리 현진건 집터가 복원되어 그의 체취를 느낄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자하문을 넘어 부암동을 떠난다.
부암동과 현진건의 인연의 시간, 4년…
식민지 말기의 시대상을 이곳에서 그려내었다.
부암동은 이제 카페들이 잠식해버렸지만, 마흔 셋의 젊은 나이에
세상은 떠난 현진건의 체취가 묻어있는 곳이다.
김윤미 : 극작가. 연세대, 동국대 강사. 1967년생.
희곡집『상자 속 여자』, 『달을 쏘다』, 『김윤미 희곡집』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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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4-05-16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