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의 여로

세상의 끝, 남태평양의 안개 속을 떠돌다.

세상의 끝, 남태평양의 안개 속을 떠돌다., 로맹 가리의「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리마 가는 길, 허구의 현실 속으로
"여기에서 8마일을 가면 쿠바입니다."
토론토 공항에서 이륙한 지 네다섯 시간 쯤 흘렀을까. 에어캐나다 AC080 기내 방송에서 기장의 안내 방송이 나왔다. 쿠바라는 단어가 귀에 닿자, 《부에나비스타소셜클럽》의 경쾌하면서도 애잔한 라틴 리듬과 카리브 해 연안 도시 아바나의 흔들리는 풍광이 눈앞에 떠올랐다.
그 속에 자크 레니에라는 마흔 일곱 살의 사내가 마지막으로 시에라 마드라에서 함께 임무를 수행했다는 카스트로라는 혁명가 이름도 명멸했다. 이제 비행기는 중남미를 통과해, 곧 네루다와 가르시아 마르케스와 보르헤스의 남미, 무엇보다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나라 페루로 진입할 터였다. 얼마나 많은 문학도들이 새들이 먼 바다를 날아와 생을 마감한다는 세상 끝 풍경을 상상하며 페루를 꿈꾸었던가.

아, 리마! 나는 몇 시간 후면 요술처럼 허구의 현실 속으로 들어갈 것이었다.
리마 시내 전경
△ 리마 시내 전경
나는 설레는 가슴을 지그시 누르며 눈을 감았다. 연 강수량 50미리 안팎의 남태평양 연안의 해안가 모래 절벽 위의 카페... 테라스에 나와 담배를 피워 무는 한 고독한 사내의 환영(幻影)을 마지막으로 비행기는 리마에 도착했다.
8일 간의 나의 페루 여정은 안데스 북동쪽 아마존 밀림지역을 제외한 리마, 나스카를 중심으로 한 남태평양 연안의 사막 유적지들과 3천4백 미터 고지의 쿠스코와 마추픽추의 잉카 유적지로 잡혀 있었다. 길잡이가 되어 줄 P씨가 버스에 올라타 반갑게 인사를 했다. 순박한 얼굴의 그는 컴컴한 전등 불빛 때문인지 목소리와 안색이 몹시 지쳐 보였다. 버스가 호텔로 이동하기 전 그는 페루에서 주의해야 할 몇 가지를 당부했다. 무엇보다 혼자 호텔 밖으로 나가 돌아다니지 말 것. 페루에서 소매치기 강탈 사건은 비일비재, 무비자국으로 총기 소지가 자유로운 나라이기 때문에, 또 가톨릭 국가라 사형제도가 없어 총살 사건이 종종 일어나기 때문에, 운이 나쁘면, 어이 없이 목숨을 잃을 수 있다는 것. 특히 한국인을 대상으로 삼고 있는 무장 강도들이 있다는 것. 실례로 해마다 성공한 한국인 사업가가 한 명씩 그들의 습격으로 죽어갔다는 것. 북미를 거쳐 총 23시간 가까이 날아 남미로 진입하자마자 듣기에는 험한 안내였지만, 그것은 여행자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는 그의 제일의 의무로 누구든 페루에 온 이상 페루 식 위험에 대처하는 법을 고취시켜야 하는 절박함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출발을 알리는 P씨의 신호와 함께 버스 안의 불이 꺼졌다. 관광객을 노리는 무장 강도들의 습격을 피하기 위해 페루에서는 야간 이동시 소등이 원칙. 버스는 공항로를 벗어나자 주택가 골목을 구불구불 우회했다. 30년 전 유년 시절에 보았던 서울 외곽 풍경을 연상시키는 캄캄한 길과 낮고 허름한 집들. 비몽사몽 낯선 어둠 속을 더듬는 동안 버스는 40여 분을 달린 끝에 리마 신도시 미라플로레스 구역의 미라마르 호텔 앞에 정차했다. 두세 시간 눈을 붙이는 둥 마는 둥, 모닝 콜 소리에 눈을 비비고 창가로 달려갔다. 같은 날 새벽 5시 30분. 흐린 하늘 아래 리마가 어슴푸레한 안개 속에 깨어나고 있었다.
새들은 모두 바예스타에 가서 깃든다
한 척의 쾌속선이 화살처럼 수면 위를 쏜살같이 날아가자 뿌연 해무(海霧) 속에 촛대 형상의 지상화(地上畵)가 눈에 잡혔다. 항공 전문 사진가 얀 아르튀스 베르트랑의 《하늘에서 본 지구》에서 보았던 모습이 아닌가. 페루 카라카스 반도의 ‘가지가 달린 촛대’, 통상 칸델라브라. 그러면 이곳에서 2백20킬로 떨어진 곳에 세계의 불가사의 나스카 지상화들이 펼쳐져 있을 것이었다.
칸델라브라를 지나자 전방 멀리 표면을 석회로 하얗게 씌운 듯한 작은 섬 하나가 시야에 들어왔다. 나는 뱃머리에 바짝 붙어 서서 혹시 로맹 가리의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의 무대를 아느냐고 P씨에게 물었다. 여행 일정을 들여다보아도 로맹 가리의 소설 무대에 대한 언급은 찾아볼 수 없었다. 11년째 페루에 살고 있으니 그라면 당연히 알 것으로 생각했다. 아니, P씨로부터 ‘바로 지금 가는 곳이에요!’라는 놀라운 대답을 듣고 싶었던 것인지도 몰랐다. 그는 처음 들어본다는 듯이 갸웃하더니 순박한 표정을 지으며 미안한 듯 웃었다. 나는 예상치 못한 반응에 당혹스러웠지만 이내 그처럼 머쓱하게 웃고 말았다. 일반 여행자들 중 소설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랴. 찰나적으로 스쳐가는 복잡 미묘한 나의 심사를 읽었는지 P씨가 애써 덧붙였다.
"저 섬은 물개섬으로 유명한데요, 그런데 새들도 아주 많아요. 펭귄도 있고, 예전에는 더 많았다는데, 요즘은 많이 떠나갔다네요."
비상하는 새들
△ 비상하는 새들
바에스타섬 근영
△ 바에스타섬 근영
새들이 떠나가는 이유에 대해, 그리고 그 새들이 어디로 가는지에 대해 물으려는 찰나 뒤에서 누군가, 고래다! 하고, 소리쳤다. P씨는 그제야 자신의 영역에 들어선 너그러운 표정으로 고래가 아니라, 물개라고 정정했다. 검은 등줄기를 살짝살짝 내보이며 물개들이 일렁이는 물결을 타며 배와 경주를 하듯 섬 쪽으로 날쌔게 내달리고 있었다. 섬에 다가가자 마중하듯 새들이 높이 날아올랐다.
"이 섬은 암벽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섬 벽을 자세히 보십시오. 맨 위의 흰 색은 무엇일 것 같습니까?"
펭귄 두 마리가 앉아 있는 모습에 카메라 앵글에 잡혔다. 그 뒤, 동굴처럼 뚫린 그늘 속에 물 개 두 마리가 휴식 중이었다. P씨의 말대로 섬 표면을 눈여겨보았다. 멀리에서 보았을 때 석회로 씌워놓은 듯 하얗게 빛이 났었다. 가운데로 배가 통과할 만한 크기의 큰 동굴과 몇 개의 작은 동굴을 거느린 섬은 이끼의 진녹색과 물젖은 감청색, 노을빛 연어색과 자갈의 암회색, 그리고 모래의 미색으로 이루어진 기다란 채석덩어리 같았다.
"새똥입니다. 얼마나 많은 새들이 이 섬에 모여 들었을지 상상이 가시죠?"
새똥으로 뒤덮인 섬…. 나는 전광석화처럼 로맹 가리의 소설 첫 장면이 떠올랐다. 새똥, 그러니까 조분석(鳥糞石)…. 나는 마치 사건의 실마리를 찾은 탐정처럼 탄성을 질렀다. 소설은 이렇게 시작했다.
그는 테라스로 나와 다시 고독에 잠겼다. 물가로 밀려온 고래의 잔해, 사람의 발자국, 조분석으로 이루어진 섬들이 하늘과 흰빛을 다투고 있는 먼 바다에 고깃배 같은 것들이 이따금 새롭게 눈에 띌 뿐, 모래언덕, 바다, 모래 위에 죽어 있는 수많은 새들, 배 한 척, 녹슨 그물은 언제나 똑같았다. 카페는 모래언덕 한가운데 말뚝을 박고 세워져 있었다.
-로맹 가리, 「새들은 모두 페루에 가서 죽다」, 김남주 옮김, 문학동네
휴식중인 새들
△ 휴식중인 새들
휴식중인 물개들
△ 휴식중인 물개들
로맹 가리와 그 소설과의 인연은 미처 닿지 않았어도 P씨는 이미 소설의 중요한 대목을 짚고 있는 것이 아닌가.
"지금은 겨울이지만, 여름이 되면, 이 섬은 물개떼들과 새떼들로 뒤덮입니다."
고독의 아홉 번째 물결이 지나간 자리, 그는 어디에도 없었다.
저기가 거기(일 거)라고 P씨는 해안가 모래 자갈밭을 가리키며 말했다. 차는 연인들의 ‘사랑 공원’을 지나 해변 교차로에서 우회전해서는 육교모양의 초록색 철제 다리 아래를 통과한 참이었다. 미라플로레스, 남태평양 연안의 꽃동네, 리마에서도 신도시로 해벽 위에 자리 잡고 있었다. 전망에 홀려 흘러 들어온 사람들은 잦은 해무(海霧)에 견디다 못해 떠나가고야 마는 동네.
무비자국인 페루는 세상의 온갖 도피자들의 천국. 서울에서든, 파리에서든, 아바나에서든 피치 못할 사정으로 몸을 숨겨야 하는 사람들이 은밀히 찾아드는 곳이 바로 안데스 산맥 아래 페루였다. 세계의 불가사의 지상화들을 새겨 놓은 사막의 나스카라인이며, 3천4백 미터 고지의 쿠스코와 마추픽추 산정에 삶을 부려야 했던 옛 잉카인들의 흔적을 더듬는 것은 경이보다는 슬픔 그 자체였다.
"자, 로맹 가리의 소설의 무대 리마 해안에 접어들었습니다."
한 척의 배와 관리인 승선기
△ 한 척의 배와 관리인 승선기들
리마 해안 모래 절벽
△ 리마 해안 모래 절벽
남태평양의 하늘과 바다는 잔뜩 습기를 머금은 채 흐렸다. 바다로 길게 뻗은 방파제 끝에 페루 국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바예스타를 방문했던 첫날 이후, P씨는 어디에서 로맹 가리의 소설을 읽은 것일까. 돌이켜보면 나스카, 쿠스코, 마추픽추, 빠짜까막, 학술대회, 문학의 밤… 숨 가쁜 여정이었다. 그는 어느덧 자신의 영역처럼 로맹 가리와 소설 무대를 안내하고 있지 않은가.
리마의 카니발에서 강도들에게 납치되어 몹쓸 짓을 당한 뒤 사나운 물결 속에 몸을 던지려던 한 여자가 있었다. 카페 테라스에 나왔던 남자는 우연히 여자를 발견하고 목숨을 구했다. 이름도, 나이도, 태생지도 모르지만 그는 자기의 보호막에 날아든 새처럼 가냘프게 파닥이는 그녀를 보살폈다. 날이면 날마다 날아와 모래밭에 떨어져 죽는 새들 중 그녀는 가장 아름다운 한 마리 새였다. 그는 고매한 명분이든, 여자든 알아 할 것은 모두 알아 버린 마흔 일곱 살의 은퇴한 혁명가였지만, 그녀를 안으며 세상의 끝에 자신과 머물게 함으로써, 종착점에 이른 자신의 삶을 성공적인 것으로 만들고 싶다’는 희망의 유혹에 순간적으로 몸을 떨었다. 희망도 잠시 그녀는 뒤따라온 늙은 영국인 남편과 그 일행에 이끌려 해안 절벽 너머로 떠나갔다.
"소설에는 리마에서 북쪽으로 10킬로미터라고 씌어 있을 뿐 정확히 어디라 밝히고 있지 않지만, 정황으로 보아서 저기가 맞을 겁니다."
과연 소설에서처럼 모래 절벽 아래 좁은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었고 그 옆으로 좁은 길이 뻗어 있었다. ‘모래언덕 한 가운데 말뚝을 박고 세워져’ 있다는 레니에의 카페를 얼른 눈으로 더듬었다. 해벽 위에 비죽비죽 솟구친 빌딩들과 절벽 아래 무질서하게 지어진 건물 몇 채가 눈에 띠었다. 그들 중 카페는 찾을 수 없었다. 바다 위를 비상하는 새들도, 모래밭으로 추락하는 새들도, 에메랄드빛 원피스에 초록색 스카프를 끌며 바다로 걸어 들어가던 여자도,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자갈밭에 널브러져 있던 리마 사육제의 광대들도 보이지 않았다. 해안 절벽 위를 산뜻하게 떨어져 내리는 청색 홍색 패러글라이더들과 파도치는 물결을 물개처럼 타고 노는 윈드서퍼들만이 2008년 7월 현재의 풍경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었다.
모래 자갈밭으로 다가가자 파도가 한 차례 휘몰아쳤다. 해변의 절벽 위에는 최신식 카페들과 쇼핑센터인 라르코 마르(Larco mar)가 들어서 있었다. 로맹가리가 이곳에 온 것은 1950년대 전후 외교관으로 세상을 떠돌던 시절이었을 것이다. 그때, 이곳에는 아마, 소설에서처럼 카페 한 채가 세워져 있었을까. 문득, 뒤따라 걸어오던 P씨를 부르기 위해 뒤돌아 섰다. 그의 추측이 옳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파도를 타기 위해 준비 중인 자갈밭의 소년들을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레니에는 그녀의 뒤를 따라 영원히 카페에서 사라졌지만, 세상의 끝에서 절망을 희망으로 건져 올리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하얗게 포말을 일으키며 부딪치는 파도 속에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기 직전 모래 언덕 꼭대기에서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 그를 찾던 그녀처럼 그 자리에 잠시 더 서 있었다. 고독의 아홉 번째 물결이 지나간 자리, 그는 어디에도 없었다.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세계의 끝, 페루의 외딴 바닷가로 새들이 날아와 죽는다. 때가 되면 새들은 죽기 위해 먼 길을 날아와 모래 위로 떨어진다. 로맹 가리의 단편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는 이렇게 홀로 그것을 바라보는 한 외로운 사내의 시선으로 시작된다.

세계와 인간 내면을 파고드는 작가의 독특한 해석으로 각별한 감동을 느낄 수 있다.
함정임 - 소설가. 동아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 1964년생.
소설『이야기, 떨어지는 가면』, 『밤은 말한다』, 『동행』, 『당신의 물고기』, 『버스, 지나가다』, 『아주 사소한 중독』, 『행복』, 『춘하추동』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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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4-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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