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콘텐츠는 bluehand99님이 《철학자의 편지 신청》에 작성해 주신 글을 바탕으로 제작되었습니다.
"저는 수다가 너무 많아요!"
흔히 어른들이 하시는 말 중에 "물에 빠지면 입만 동동 뜰 거다"는 표현이 있잖아요. 딱 저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최근에 심심하기도 해서 지역 커뮤니티 카페에 가입했거든요. 그런데 카페는 익명성이 보장되기도 하고, 자꾸 채팅을 하다 보니 편한 마음이 들어 제 개인적인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물론 카페 회원들 안에서 솔직하다고 좋아하는 분들도 계셨고, 별 말씀 안 하시는 분들도 있으시지만 그런 사적인 대화가 불편하신 분들도 있었을 거예요. 그래서 카페를 탈퇴를 하긴 했는데, 며칠 지나니까 막 입이 근질근질 하더라고요. 그래서 또 카페에 가입하고 말았습니다. 남 이야기, 내 이야기 가리지 않고 수다를 너무 좋아해서 걱정되고 특히나 공적인 곳에서 말실수를 할까 봐 너무 신경 쓰여요. 어떡하면 좋을까요?
"부끄러움을 아는 삶, 기개를 가지시오!"
많은 사람들은 매번 결심하고 매번 그만 두는 자신을 보고 자신의 의지가 왜 이리 약한지 괴로워한다오. 우리 철학자들도 그런 의지의 나약함에 대해 여러 가지 방식으로 답을 내놓았소. 그 답 중 나의 스승 소크라테스와 나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가 내놓은 답이 널리 알려져 있을 것이오. 의지의 나약함을 그리스말로 아크라시아(akrasia)라고 부르는데, 소크라테스는 아크라시아는 불가능하다고 주장했소. 예를 들어 누군가 학문에 정진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못 지켰다면 우리는 보통 공부를 해야 한다고 생각은 하지만, 의지가 약해서 실천하지 못 한다고 생각하지 않소?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그런 사람들은 애초에 공부를 해야 된다는 필요성을 알지 못한 것이라고 주장했소. 그에게서 안다는 것은 이미 삶에서 그 앎을 실천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지. 반면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알면서도 의지가 나약해서 실천하지 못함을 인정했다오. 학문에 정진해야 스스로 발전한다는 걸 알지만, 다른 부수적인 환경이 주는 순간적인 쾌락을 잊지 못 해서 그런 행위를 한다고 말이오.
여기서 나 플라톤은 이 문제를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고자 하오. 흔히 많은 철학자들처럼 우리의 영혼을 이성과 감정으로 두 가지로만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과 기개, 감정...이 세 가지로 구분하는 것이오. 영혼이라고 하니까 종교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 같지만, '영혼'은 우리 시대에 마음 또는 정신을 가리킬 때 자주 쓰는 말이오. 그대의 시대에 심리학자들이 사람들의 정신 활동을 연구하는 것처럼, 우리 시대의 철학자들도 철학적인 방법으로 우리의 정신 활동을 탐구했고 그 결과 나는 우리의 영혼, 곧 정신이 이성적인 부분, 기개적인 부분, 욕구적인 부분의 세 가지로 나뉜다고 생각했소.
우선 이성과 감정이 무엇인지는 잘 알 것이오. 이성은 무엇인가를 계산하고 배우고자 하는 능력을 말하고 반면에 감정은 식욕이나 성욕과 같은 욕구를 말한다오. 이렇게 이성과 욕구의 이분법이면 충분한데 왜 나는 거기에 기개를 집어넣어 영혼의 삼분법을 주장했는지 궁금하지 않소? 나의 기개가 무슨 뜻인지 설명하기 위해서 《국가》편에서 든 예를 봅시다. (내가 쓴 대화편들은 스승인 소크라테스가 등장하여 이야기를 하긴 하지만 《국가》편은 스승이 아닌 나의 사상인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게 맞소.) 좀 혐오스럽긴 하지만 관련이 있으니 들어 보시오.
그러나 언젠가 내가 들은 것이 있는데, 난 이걸 믿고 있네. 아글라이온의 아들 레온티오스가 피레우스로부터 북쪽 성벽의 바깥쪽 아랫길을 따라 시내로 들어가다가 사형 집행자 옆에 시체들이 누워 있는 것을 목격하고서는, 한편으로는 보고 싶어도 하고 또한 다른 한편으론 언짢아하며 외면하려 했다더군. 그래서 얼마 동안 마음속으로 싸우며,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네. 그렇지만 보고 싶은 욕구에 압도당하자, 두 눈을 부릅뜨고 시체들 쪽으로 내닫더니, '보려무나, 너희들 고약한 것들아! 그래, 저 좋은 구경거리를 실컷 들 보려무나' 라고 말하더란 이야기 말일세.
시체 애호증이 있는 레온티오스는 한 편에서는 시체를 보고 싶은 욕망이 있었소.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는 그런 혐오스러운 짓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이성이 있었지. 이때 시체를 보려고 하는 욕구를 거부하는 동기가 바로 기개라오. 욕망을 거부하는 동기로 이성을 끌어들여도 될 텐데 왜 굳이 기개를 거론하는지 궁금하오? 우리가 무엇인가를 배우고 계산할 때 사용하는 차분한 이성으로 어떤 욕망을 억누른다는 것은 말이 안 되오. 삐쳐 나오는 욕망을 억누를 때는 우리에게는 뭔가 흥분되는 격렬한 마음이 일어나지 않소? 그것이 바로 내가 '기개'라고 말한 것인데, '격정' 또는 '분노'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오. 그러니까 우리 영혼 속에서 욕망이 이성과 대립을 하여 욕망을 따르려고 할 때, 우리에게는 그런 자신에 대해 격정 또는 분노가 일어나는 것이지. 당신의 경우도 마찬가지라오. 당신은 카페에 자주 들락거리며 수다를 떠는 자신이 싫어서 탈퇴를 했지만, 얼마 못 가서 다시 들어가지 않았소? 그리고 의지가 나약한 자신을 보고 혐오스러워 했겠지. 레온티오스가 시체를 보는 만큼 혐오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런 자신이 싫으니까 고민을 보낸 것이 아니겠소?
여기서 중요한 점은 레온티오스나 당신이나 모두 욕망을 하는 자기 자신에 대해 분노하고 꾸짖고 있다는 것이오. 이것이 자기반성이오. 레온티오스도 그랬고 당신도 비록 욕망을 극복하는 데 실패했지만, 자신이 지금 추한 것을 지향하고 있음을 부끄러워하고 있소. 당신은 자신에 대한 이상적인 이미지-함부로 나서지 않고 자중하는 모습-가 있는데, 그 이상적인 이미지와 카페에 다시 가입하는 자신의 상황 사이에서 생기는 갈등 속에서 부끄러움의 정서를 느끼고 거기서 분노하는 것이라오. 이상적인 이미지가 없다면 그런 부끄러움과 분노가 있겠소?
그렇기 때문에 나는 당신의 고민이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소. 당신의 분노 이면에는 부끄러움과 수치의 정서가 있으며, 거기에는 좀 더 심층적으로 자기 존중의 심리가 놓여 있기 때문이라오. 누구나 명예와 승리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을 나는 '기개'라고 부르지. 원하는 일을 성취해서 의기양양해 있는 사람을 생각해 보시오. 자신에 대한 강한 긍지와 자신에 찬 태도, 이런 게 바로 기개라오. 그런 기개가 없는 삶은 감정적으로 굉장히 황폐해질 수밖에 없소. 물론 기개도 지나치면 문제가 된다오. 자신에 대한 사랑이 지나쳐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입힐 수 있으며, 애국심이 지나치다 보면 다른 나라 사람들은 무시하기 십상이라오. 기개는 원래 자신의 존재 가치를 인정받고 싶고 명예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인데, 그 인정 욕구가 지나쳐서 횡포가 되는 것이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기개의 본디 뜻을 잊어버린 사람들이오. 자신의 행동에 대해 자기반성을 하지 않기 때문에 양심의 가책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결국 후회할 일을 하지만, 당신처럼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끊임없이 성찰하고 있다면 그런 지나침에 빠질 일은 없을 것 같소.
사람들은 누구나 다 내부에 이성과 기개와 욕망의 세 가지 영혼을 소유하고 있소. 그런데 사람마다 약간씩 다른 비율로 이 세 가지를 혼합하여 가지고 있다오. 지적인 활동에 빠져서 지내는 사람들이 있는 데 비해, 기개의 영역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사람도 있고, 다른 어떤 사람은 욕망이 압도적인 위치를 차지하기도 하오. 그러나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 중 어느 하나가 너무 지나치면 문제가 된다오. 예를 들어 욕망을 억누르는 기개도 아무 욕망이나 억누르면 그건 절제가 아니라 극단적인 금욕이 되기도 하고 반면에 어떤 욕망을 억제해야 할지 잘못 알게 되면 무절제한 행동으로 이어지는 것이오. 이 중용을 맞추기란 쉽지 않소. 그래서 나는 먼저 부끄러움을 아는 것이 욕망을 억제하는 기준이라고 생각한다오. 힘이 없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권력을 내세워 무시라는 것이 부끄럽다는 걸 알고 참는 것처럼, 당신은 남들에게 어느 정도로 수다를 벌여야 부끄러움의 정도를 넘지 않는 것인지 판단해야 할 것이오. 단 부끄러움의 정도는 세상 사람들의 시선으로 정하는 것이 아니오. 그 기준은 철저하게 당신 스스로, 오로지 자기반성을 통해 세워야 되는 것이오.
마지막으로 부끄러움을 안다는 건, 이미 당신이 기개가 무엇인지 절반은 알고 있다는 의미가 아닐까 싶소. 지금처럼 부디 기개를 가진 떳떳한 삶을 살길 바라오.
아카데미아에서
플라톤이
객관적 관념론의 창시자, 플라톤
플라톤(기원전 427~기원전 347)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이다. 소크라테스의 제자이며, 아리스토텔레스의 스승이다. 소크라테스가 등장하는 대화편을 30권 이상 남겼는데, 초기 저작들은 소크라테스의 사상이고, 후기 저작들은 플라톤의 사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가 경험하는 물질적인 세계는 비물질적이고 초월적인 이데아의 세계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에 따르면 감각적인 지식은 억견에 지나지 않고, 이데아의 지식이 참된 지식이다. 아테네에 아카데미아를 설립하여 제자를 길렀다.
"격정이 이성과 한편이 된다!"
"욕망이 어떤 사람으로 하여금 헤아림을 거스르도록 강요할 때, 그 사람은 자기 자신을 꾸짖으면서, 자기 안에서 그런 강요를 하고 있는 부분에 대해서 분개하는데, 이런 사람의 격정이, 마치 분쟁하고 있는 두 당파 사이에서처럼, 이성과 한편이 된다." (플라톤, 《국가》)
'기개'는 그리스어로 'thymos'인데, 플라톤에서 이것은 '분노'의 의미로 곧잘 사용된다. 과도한 욕망을 억누르고 싶을 때 그 반응이 이성에 의한 단순한 거부가 아니라 분노의 형태로 표출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분노는 자신의 욕망에 대한 것임에 주의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분노는 여느 분노처럼 동물적인 것이 아니라 자기반성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쌀 살 돈이 없으니 매일 라면만 먹는구나…. 슈퍼할머니:"어이구, 젊은사람이 라면만 먹으면 어쩌누~" 라면을 사고 나와서 거스름돈을 확인하는데 오만원권이 섞여 들어왔다. 순간 나는 많은 생각이 든다 어? 거스름돈에 웬 5만원!? 이런 큰 돈이면… 먹고싶었던 것도 사 먹을수 있고 밀린 공과금도 낼 수 있어! 하지만… 이 돈은…. 슈퍼 할머니를 생각하며 다시 휙~ 돌아 슈퍼를 간다. 나:"할머니. 거스름돈을 잘못 주셨어요.", 할머니:"으응?! 아이구, 내가 또 착각했나봐~! 고맙네~" 비록 가난해도 부끄럽게 살진 말아야지. 부끄러움을 아는 것도 용기다.
- 글
- 최훈(강원대학교 교수)
- 구성
- 이은지(작가)
- 그림
- 박동현(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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